***46. 침묵은 금이다**
호일병의 말이 맞다. 나는 이 기회를 통해 나 자신에게 내가 이 세상에 있으나마나 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저항할 수 없는 순간에 저항할 수 있고, 거절할 수 없는 순간에 거절할 수 있어야 진정한 지식인이다. 그는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나는 책임이 필요했다. 무책임의 무게가 책임의 무게보다 더 힘겨웠다. 책임질 일이 있다는 것은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고, 또 내가 세상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만일 내가 어떤 세속적인 이유로 그 연결고리를 끊어버린다면 나의 세계는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의미도 없는 진공상태로 빨려 들어가게 될 것이다. 사람에게 가장 큰 고통은 바로 이런 진공상태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고통스러운 책임이라도 책임질 일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인 것이다.
지금 나에게도 기회가 왔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다. 나에게서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박탈할 수는 없다. 나는 아직 세상에 절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절망하고 싶지 않으니까. 소리 내어 외치고 싶은 충동은 너무 강렬해서 절제하기가 힘든다. 이것도 하나의 원인이겠지. 그 농민들을 위해서든 나 자신을 위해서든, 나는 말해야겠다. 외쳐야겠다.
결정을 내리고 나는 곧바로 그것을 실행할 방법을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친구들이 말한 방법이 제일 좋을 것 같았다. 저녁에 나는 동류에게 논문을 쓰러 간다고 하고서는 편지를 쓰기 위해 사무실로 갔다. 삼일 밤을 심사숙고해서 고치고 또 고쳤다. 다 쓴 편지는 감히 서랍에 넣어두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잘 접어서 호주머니에 넣었다. 내려와서 시계를 보니 벌써 한 시가 넘었다. 차가운 바람이 달아오른 내 얼굴에 부딪쳤다.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사람이라면 이렇게 해야 한다. 지식인이라면 더더욱 이렇게 해야 한다. 머리를 들어 별이 걸린 하늘을 쳐다보았다. 십년도 넘는 세월을 뛰어넘어 과거로 돌아온 듯했다.
다음날 자세히 편지를 살펴보니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거기에 언급한 데이터나 상황, 쓰인 용어들이 일개 대학생이 쓰기에는 너무 전문적이고 상세한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편지를 쓰는 사람을 의대 학생으로 설정하고 조사 상황을 약간 추상적으로 고쳤다. 그러나 바꾸고 나니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이전 것처럼 수정했다. 편지를 다 쓴 다음 위생청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복사 가게까지 가서 몇 부 복사를 했다. 타자를 치는 아가씨가 컴퓨터에서 편지를 삭제하는 것을 확인하고, 혹시 누가 와서 물으면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야 봉투에 아무 것도 쓰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내 글씨체는 남길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서 주소를 인쇄해서는 봉투에 붙였다. 주소를 붙이는 중에 갑자기 내가 이 일을 하면서 장갑을 안 꼈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누가 지문감정이라도 하면 어쩌지? 집에 돌아와서는 면장갑을 끼고 마른 걸레로 편지지와 봉투를 싹싹 문질렀다. 지문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편지는 모두 세 통이었다. 하나는 진(陳) 위생부장에게, 하나는 국가 흡혈충병 예방과, 하나는 위생부 지방병 연구소로 보낼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편지를 보내려고 하니 긴장되고 망설여졌다. 다시 서랍 속 책갈피에 끼워놓은 채 며칠이 지났다. 나는 모든 상황을 다 종합해 보고 다시 한번 복사한 편지를 꺼내 읽어보았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무런 빈틈도 없었다.
다음날 편지를 부치기로 했다. 우표를 붙일 때 쓸 장갑도 준비해 놓았다. 그날 오후 나는 퇴근 시간에 감찰실의 막(莫) 여사한테 가는 길에 계단에서 마 청장과 마주쳤다. 나는 나도 모르게 멈춰 서서 그가 지나가도록 옆으로 몸을 비켜섰다.
“마 청장님!”
“지 군!”
그는 나를 보며 웃음을 짓고 지나갔다. 그가 왜 나를 보고 의미심장하게 웃는 거지? 혹시 내가 벌이려는 일을 알고 있는 건가? 나를 꿰뚫어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 웃음 속에는 일종의 신비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순간적으로 받은 인상에 불과했지만, 나는 그 웃음에 담긴 뜻을 곱씹고 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신비로웠다. 나는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말했다.
“지레 겁먹기는….”
그러나 나 자신을 달래면 달랠수록 마음이 더 긴장되고, 심지어 용기가 사라지는 듯했다. 나는 반복해서 스스로에게 말했다.
“과학을 믿어, 과학을!”
어쨌든, 마 청장은 내가 무슨 일을 벌이는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좀 놓이면서 계획한 대로 일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날 저녁 안 선생 댁에서 바둑을 두고 집에 돌아올 때였다. 문을 들어서는데 동류의 표정이 영 심상치 않았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 그렇게 늦은 건 아니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그녀의 어깨를 건드리자 그녀가 나의 손을 홱 뿌리쳤다. 성깔 하고는….
“왜 그래?”
“당신 자신한테 물어봐요.”
“내가 뭘 어쨌는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아니, 아마 일파가 태어나고 얼마 안 되어서부터였던 것 같다, 그때부터 나는 동류 앞에서 매우 피동적으로 되었다. 원망 듣고 비난받는 팔자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몇 번 반항을 해보았지만 소용 없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 피동적으로 되었다. 나는 비애를 느꼈다. 남자가 돼서 말이야! 그러나 나는 차츰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부인과 아들에게 면목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그녀는 화를 내면서 말했다.
“당신 아주 훌륭한 일을 하고 있습디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 편지 생각이 났다.
“내가 무슨 나쁜 일이라도 했나?”
“당신이 무슨 나쁜 일을 한 적이 있겠어요? 다 착하고 좋은 일만 하지! 당신은 나와 일파는 안중에도 없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하나?”
그때 그녀가 베게 아래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면서 말했다.
“이거 다른 사람이 우리 집에 숨겨놓은 건가요?”
오전에 꺼내본 다음 담요 아래에 숨겨놓았던 편지를 아내가 발견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내가 쓴 거야.”
“지금 위에다 이런 걸 보고하겠다는 거예요? 당신, 뭐 잘못 먹은 거 아니에요? 조사 들어가면 당장 당신이라는 게 들통 날 텐데…. 다른 사람들이 당신처럼 바보 같은 줄 알아요?”
“이름도 안 쓰고 내 신분도 드러내지 않고, 지문까지 다 문질러 지웠는데 어떻게 알겠어?”
그녀는 들은 척 만 척 콧방귀만 뀌었다. 마음이 싸늘해졌다. 그녀가 말했다.
“누가 알겠냐고? 나도 알아요! 위생청에서 지대위 빼면 이렇게 바보 같은 짓 할 사람이 누가 또 있겠어요?”
“잘못될 리가 만무하다니까!”
나는 앞뒤 정황을 다 아내에게 설명했다. 그녀가 말했다.
“여보, 내 말 들어요. 다른 일은 몰라도 이번 일만은 내가 당신한테 이렇게 부탁할게요.”
“다른 일은 다 몰라도 이번 일만은 내가 당신한테 이렇게 부탁할게.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내가 말했잖아. 그 환자들이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평소에 이런저런 문제들은 그냥 참고 넘어가도 상관없지만, 이렇게 정말 중요한 순간에는 진지하게 임해야 하는 거야!”
“이번 일에 진지하게 임한다고요? 당신 바보에요? 양심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집안부터 먼저 살펴요. 집안 식구들한테 대해서는 양심의 가책도 안 받아요? 나는 당신한테 무슨 양심이 있다는 건지 알 수가 없네요.”
나는 손을 가로저으면서 말했다.
“그냥 이번 일은 모른 척 해!”
그녀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그녀를 쳐다보았다. 우리 둘은 마치 오늘 처음 보는 사람들 같았다. 한참 후에 동류가 외쳤다.
“대위 씨!”
두 손으로 침대 가장자리를 붙잡으면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두 무릎이 바닥 위에 닿자 그녀는 고개를 쳐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내 가슴이 갑자기 쿵쾅거리고, 누군가가 손으로 힘껏 내 목을 조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얼른 그녀를 안아 일으켜 침대 위에 앉혔다. 그녀는 몸부림을 치면서 또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두 손으로 침대 가장자리를 잡았다. 손톱에 힘을 준 나머지 나무 속으로 손톱이 파고들었다.
“당신이 오늘 대답 안 해주면, 나 그냥 이러고 내일 아침까지 있을 거예요.”
“알겠어, 알겠어, 알겠다고! 편지 찢어버리면 되잖아!”
나는 그녀를 안아 일으키려고 했지만, 그녀는 침대 가장자리를 꼭 잡고 손을 놓지 않았다.
“또 있죠! 이 편지 복사본이잖아요.”
나는 서랍을 열어 몇 통의 편지를 꺼내 그녀 손에 쥐어주었다. 침대 가장자리에 몇 군데 옻칠이 벗겨져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난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일어나서 침대 위에 앉더니 첫 번째 편지를 들고 천천히 찢어버렸다. 갈가리 찢어버렸다. 그리고 두 번째 편지를 들었다. 마지막에는 침대 앞에 종이 쪼가리가 수북하게 쌓였다. 작은 무덤 같았다. 아버지의 무덤이 순간 내 마음 속에 떠올랐다. 눈물이 솟았다. 눈물 속에서 몽롱하게 두 개의 무덤, 하나의 허상과 실재하는 하나가 겹쳐져 구별할 수 없었다.
동류는 여름에 모기향 피울 때 받치는 사기접시를 가져와서 종이 조각들을 그 위에 놓고 불을 붙였다. 살살 타오르는 불빛이 동류의 얼굴을 얼룩얼룩 비추었다. 불꽃은 가운데서부터 빠른 속도로 사방으로 번졌다. 가운데 검은 구멍이 점점 커지면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라 퍼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전부 다 태우고 나서 불길은 꺼지고 재만 남았다. 방 안에는 연기가 가득했다. 나에게 익숙한 그런 연기가 아니었다. 바로 눈앞에 가까이 있지만, 또 아주 생경하게 느껴졌다. 예전에 아버지가 한 대 한 대 담배를 말아 피우시던 그 적막한 저녁에도 방 안에는 연기가 가득했었지. 내게 그 연기는 익숙하고 친근했었다. 동류가 일을 끝내는 것을 보고 나는 코웃음 소리를 몇 번 내고는 밖으로 나왔다.
대문 입구까지 오자 길을 걷고 싶어졌다. 그러나 막상 문 밖으로 나와 보니 갑자기 세상이 온통 텅 빈 것 같았다. 다시 몸을 돌려 마당을 몇 바퀴 돌았다. 마당은 고요했다. 달빛이 내 그림자를 땅 위에 드리우고 있었다. 지금은 저 달만이 나를 이해해 주는구나. 내가 몸을 움직이자 그림자도 따라 움직였다. 나는 조용히 탄식했다.
“깜짝 놀라 뒤돌아봐도, 인기척 하나 없구나. 인기척 하나 없어.” 시계를 보니 벌써 열한 시가 넘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안 선생 댁으로 걸어갔다.
안 선생은 옷을 걸치면서 조금은 긴장된 얼굴로 나에게 무슨 일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왔냐고 물었다.
“아내와 싸웠어요.”
그는 뭔가 묻는 듯한 눈빛으로 나에게 되물었다.
“싸워?”
그런 일로 이 밤중에 찾아왔다는 건 믿을 수 없다는 말투였다. 나는 일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대위, 자네 너무 순진한 거 아니야?”
“안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게 뭐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다 아는 사실 아닌가? 새로울 것도 없잖아?”
“안다면 누군가는 나서서 뭐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나서서 밀고 나가는 사람이 있어야 정부에서도 예산을 좀더 넉넉하게 짜서 환자들을 도울 수, 아니 사람들을 살릴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건 지도자들이 알아서 할 일이야. 왜 그 사람들의 신경을 건드리려고 해? 먼저 자네 그 편지의 운명에 관해서 생각해 보자고. 위생부에서 그런 편지를 받게 된다면, 그것도 흡혈충 질병 감염 지역의 대학생이 보내온 편지라면, 그건 이만저만 심각한 문제가 아니지. 만일 그 편지가 책임자의 손에 들어갔다고 치세. 그 사람이 어떻게 할 것 같은가? 다른 일 다 제쳐두고 먼저 장항향으로 달려가서 진상을 알아보려 할까? 천만에! 그냥 성(省)에다 얘기하고, 다시 청(廳)에다 얘기하고, 그러면서 그 편지는 자기네 손에 그냥 들고 있는 거야. 그리고는 그 편지의 비밀을 캐보겠지. 대학생이 자기 이름을 숨길 필요가 뭐가 있겠나? 뭔가 켕기는 게 있는 사람이 쓴 것이 분명하지. 누가, 뭐가 켕겨서? 주변 사람일 게 뻔하고 이 일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겠지. 여기까지 분석해보면 틀이 대강 잡히겠지. 이번에 조사하러 갔던 사람들을 하나씩 조사해서 그들의 평소 인격이며 한 말과 행동들을 알아보고, 게다가 강 주임이 자네 혼자 장항향에 다녀왔다고 보고하게 되면 그걸로 모든 게 끝나는 거지. 도망갈 구멍 있어?”
“화원현의 위생국 사람이 쓴 것일 수도 있잖습니까?”
“남한테 화를 뒤집어씌우겠다고? 그리고 편지를 보낸 곳이 성(省)으로 나올 텐데, 화원현 사람이 쓴 것일 리가 있나?”
이어서 또 말했다.
“가명으로 서명을 한다고 치세. 조사해 보면 그 동네에서 의과대학 다니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금방 알 수 있잖아. 그럼 또 다시 자네한테로 화살이 돌아오는 거야. 그 사람들이 이런 일에는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우는지 자네는 상상도 못할 거야.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자네가 이번 일을 확대시켜서 위생부 차원에서 새로 조사를 하게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야. 만일, 정말로 만일,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만분의 일의 가능성이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위에 있는 사람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건데, 그런다고 그 윗사람이 쓰러지겠어? 또, 그 사람이 자리보전할 경우, 그 사람이 자네를 어떻게 생각하겠어? 자네 처지가 어떻게 되겠느냐고. 동류는 직감적으로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알았던 걸세. 그녀 생각이 맞아. 윗사람들의 의지는 굳건하기가 반석 같다네. 자네가 뭐라고 한다고 움직일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세상에 양심만큼 못 미더운 것도 없다네.”
“침묵은 금이라는 말이 이렇게 좋은 말인 줄 몰랐습니다. 선생님의 분석은 다 맞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저는 책임을 느낍니다. 누군가는 그 사람들에게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저는 그 일에 참여했고, 그래서 그냥 침묵할 수가 없었어요. 제가 그 사람들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네가 그들을 책임지겠다고? 그럼 자네는 누가 책임지나? 그 사람들이 자넬 책임지겠다고 할까? 다시 자네라는 것이 알려지고 나면 그 다음은? 딱히 자네 이름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는 않겠지만 끊임없이 이야기할 걸세. 누구가 우리 위생청의 명예를 끌어내리려고 했다고. 윗사람도 얘기하고 아랫사람들도 얘기하겠지. 사람들은 자네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알지만, 자네와 가까이 하려고 하지는 않을 거야. 그들에게 있어 사람 좋고 나쁜 건 중요하지 않아. 이해관계가 중요하지. 자네는 갑자기 자네 주위의 공기가 냉랭해지는 걸 느끼게 되겠지. 당장은 자네를 어떻게 하지는 못하겠지만 사실상 자네는 끝난 거나 마찬가지야. 울고 싶어도 울지도 못해. 자네는 억울하다고 하겠지만, 사실 누구 하나 딱히 자네를 손본다거나 자네를 비판하는 사람도 없을 거야. 속이 시꺼멓게 타 들어가면 자네도 아, 나는 이제 끝이로구나, 하고 알게 되겠지.”
나는 힘주어 말했다.
“끝이면 끝인 거죠. 산에 들어가 나무 벗 삼고 넝쿨 벗 삼아 살면 되죠!”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사람이 그렇게 팩 하는 마음으로 한평생을 살아서야 쓰나? 자네 한평생이 걸린 문제인데 그렇게 성질내고 돌아서서야 쓰겠냐고. 아직 이 세상의 터럭 하나 건드리지 못했는데, 그러고 돌아설 수 있겠어?”
안 선생님은 대학시절 한 여학생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는 같은 반 남학생과 사귀었는데 졸업 후에 각기 다른 지방으로 발령이 나고, 남학생이 갑자기 그녀에게 냉담해지기 시작했단다. 그녀는 팩 하는 마음에 더 좋은 남자를 찾아서 그 남학생을 분하게 해주려고 마음을 먹었다. 한 번 부린 성질이 몇 년 갔다. 더 좋은 남자는 만나지 못하고, 나이는 점점 들고, 마음은 더 독해지는데 밑천은 점점 떨어지고…. 조금 있으면 퇴직할 나이인데 아직도 혼자라고 했다. 안 선생이 말했다.
“생활은 자네가 돌아설까봐 두려워하지 않는다네. 어쨌든 지는 쪽은 자네니까. 내 그 친구도 제때에 마음을 돌렸더라면 아마 오늘처럼 저런 처지에 놓이진 않았을 거야. ‘때를 알고 노력하는 사람이 뛰어난 인물이다’(識時務者爲俊傑)는 옛 어른들의 피와 눈물이 담긴 말도 있지 않나! 아무나 준걸(俊傑)이 될 수 있는 줄 알았나?”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명백한 일인데도 전혀 손을 쓸 수 없다니…. 정말 이 정도일 줄이야!”
“손 쓸 수야 있지.”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말씀해 주십시오. 무슨 방법입니까?”
“방법은 바로 그 자리에 자네가 앉는 걸세.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자네 뜻대로 되는 거야.”
나는 금세 힘이 빠졌다.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안 될 것은 또 뭐 있나? 어쨌든 사람 앉으라고 있는 자리인데.”
나는 마음이 움직여서 말했다.
“좋은 일을 하고 싶으면 그 도장을 손에 쥐지 않으면 안 되겠어요.”
안 선생이 말했다.
“세상일이란 사실 간단해. 자네를 책임지는 사람을 자네가 또 책임지는 거야. 생각해 보게. 누가 자네에게 더 높은 월급과 지위, 집, 자존심, 그 모든 것을 책임져 주나? 그 한 사람에 대해서만 책임지면 되는 거야. 일만 명, 백만 명 서민들을 생각해서 뭐 하겠나. 옆의 화공청의 임(林) 청장, 자네 알지? 그 사람이 임 서기가 되었다네. 재작년 성 위원회 조직부에서 청장 연임을 건의했다가 성 인민대표회의에서 협조해주지 않아서 통과 안 된 적이 있었지. 통과 안 시켜줘? 좋다, 두고 보자. 그 후 임 청장이 임 서기가 되어서 계속 업무를 주도하고, 청장 자리는 그렇게 빈 채로 몇 년이고 가는 거야. 어떻게 하겠나? 이제는 진급까지 해서 성 경제위원회 부주임까지 겸임한다네. 생각해 보게. 일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될 수 있을까 싶지? 실제로 현실이 그렇다네. 자네 생각엔, 임 서기가 누구에 대해 책임을 질 것 같은가? 대위, 자네도 돌아가서 잘 생각해 보게.”
마음이 복잡한 채로 문을 나섰다. 안 선생의 말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나는 이제야 현실세계의 추잡한 가장자리를 모호하게나마 느끼게 된 것 같았다. 이 현실은 전혀 시적(詩的)이지 않았다. 나를 슬프게 하고, 마음속 깊숙한 곳까지 썰렁하게 한다. 나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부르르 떨었다. 또 한번 부르르 떨었다. 마음이 차가워진 것인지 몸이 차가워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집 앞에 도착해서 나는 발을 멈추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열두 시가 넘었다. 나는 몸을 돌려 사무실로 갔다. 그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있었으나 나는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고독이 구석구석 빈틈 없이 채워져 왔다. 책상을 바라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내가 이 책상에 앉아 일한 지도 벌써 사 년도 더 되었군. 나이를 네 살이나 먹었는데 책상은 하나도 변한 게 없다. 잉크가 묻어 있는 것도 그대로다. 이렇게 몇 년 더 앉아 있으면 내 인생도 완전히 끝이 나겠지. 기다림에 몸도 마음도 다 지쳤지만, 나는 계속 기다리고 있다. 자신도 상상할 수 없는 미래를 기다린다.
어쩌면 어느 불가사의한 날부터 갑자기 불가사의한 일들이 정말로 생길지도 모른다. 그날이 오면 허무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세상은 순수하고 밝게 변할 것이다. 하늘은 푸르고, 물도 푸르고, 풀도 푸르고, 봉황새가 날개 춤을 추고, 노루가 뛰어 놀고……나는 미쳤다. 내가 미친 게 분명하다. 미쳤다. 미쳤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래층에서 동류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 잠시 후 그 소리가 복도에서 나기 시작했다. 동류가 내게 말을 시켰다. 내가 말했다.
“그냥 조용히 있고 싶어.”
그때 일파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아빠!”
“일파야! 시간이 늦었으니 엄마랑 먼저 돌아가.”
그때 갑자기 아들이 밖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어도 무섭지 않아요. 눈이 와도 무섭지 않아요. 나는 우리 아빠를 찾을 거예요. 우리 아빠. 아빠를 찾아서 같이 집에 갈 거예요.”
나는 시큰거리는 코를 움켜잡았다. 눈을 꼭 감았다. 나오는 눈물을 참고 참았다. 그 오랜 시간 나는 내가 무슨 인자(忍者)라도 되는 양 생각하고 살았다. 그렇지만 나는 도대체 무엇을 참았던 것일까? 수많은 억울한 일, 수많은 수치를 참았다. 마음이 아플 때까지 참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끝도 없이 참아야 한다. 나는 문을 열고 일파를 안아 들었다.
“우리 아들!”
밖으로 나오자 뭔가 차가운 것이 내 손에, 얼굴에, 목에 떨어져 내렸다. 눈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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