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대엽산(大葉山)에 올라**
그해 초겨울 나는 마음이 별로 좋지 않았다. 허무감에 쌓여 빠져나올 힘도 없었다. 사람은 언제나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신과 마주할 수도 없다. 그런데 나는 바로 그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뭘 해도 의욕이 없었고 재미가 없었다. 나는 깨어 있었지만 내 영혼은 꿈속을 떠다니는 것 같았다.
그 주말은 아주 맑고 화창했다. 나는 아침을 먹고 아래로 내려갔다. 내려와서는 내가 왜 내려왔는지도 몰랐고 갈 곳도 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사택 단지를 나서서 사람들이 오가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길에는 사람들이 많고 북적거렸다. 오가는 사람들을 보니 모두 즐거워 보였다. 도대체 뭐가 저렇게 즐거울까.
어느 버스 정거장엘 가니 사람들이 차를 기다리고 있기에 나도 멈춰 섰다. 버스가 오고 사람들이 밀치며 타기 시작했다. 나는 꿈쩍도 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버스 차장이 머리를 내밀고“빨리 타세요.”하는데 나를 보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아서 나도 그냥 올라탔다. 중간에 사람이 내려서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창밖을 내다봤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는데 차장의“내려요” 하는 말이 들렸다. 그때서야 나는 버스에 남은 사람이 나 하나뿐이라는 걸 알았다.
차를 내려서 보니 대엽산(大葉山) 입구에 와 있었다. 나는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뭣 하러 산을 오르려는 것인지 몰랐지만, 왠지 올라가야 할 것 같았다. 놀러 나온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나는 이 위안 하는 입장표를 끊어 산 입구에 들어섰다. 다른 사람들을 따라 올라가니 운봉사(雲峰寺)에 다다랐다. 절 앞에는 이런 글귀가 붙어 있었다.
장부의 회포 격렬하나
청사에 몇 명이나 이름을 날렸던가.
큰 새 발톱 흔적인가
북망산엔 버려진 무덤 무수하다네.
(壯懷激烈, 靑史幾行名姓
鴻爪一痕, 北邙無數荒丘)
큰문 옆으로는 판매대가 두 줄로 늘어서 있었다. 몇 군데서 향을 팔고 있었다. 아주머니 한 명이 나를 보고 하나 팔아 달라고 했다. 내가 물었다.
“향 하나에 얼마예요?”
“한 세트에 30위안이오.”
“그렇게 비싸요?”
“부처님께 드리는 걸 또 깎으려고요? 정성이 부족해요, 정성이.”
내가 그냥 안으로 들어가는데 그녀가 뒤에서 소리쳤다.
“5위안에 줄게요. 5위안.”
사당 안에는 석가여래상이 있었고, 그 양 옆으로 이름은 모르겠지만 석가여래의 제자들의 상이 늘어서 있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공덕 상자 안에 돈을 넣고 무릎을 꿇어 점괘와 가는 막대를 뽑은 다음, 그걸 갖고 점괘를 풀어주는 스님에게 오 위안을 드리면서 결과가 적힌 종이를 받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사당의 바닥이 타일로 되어 있는 게 나의 눈에 거슬렸다. 타일이 경관을 망치고 있었다. 석판으로 깔았어야 어울릴 텐데. 게다가 기둥도 큰 원목이 아닌 시멘트였다.
옆방에서는 머리를 깎지 않고 수행을 하는, 스무 명 남짓한 속가의 제자들이 검은 옷을 입고 한 사람이 도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한 서른 정도 된 안경을 쓴 여자 하나가 경청하면서 염주를 돌리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 여자는 왜 인생의 모든 욕망과 생각을 버리고 여기에 와 있는 걸까? 아이와 남편은 있겠지? 배울 만큼 배운 사람 같은데 무엇이 저 여자를 저렇게 절망적이게 만들었을까?
나는 저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결코 바보들이 아니다. 그들은 허구의 정신세계를 진실로 삼고, 그로부터 영혼의 귀착점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인간은 궁극을 필요로 한다. 궁극이 없는 인간의 마음은 끝없이 떠돌며 안정을 얻지 못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 궁극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들을 보면서 나는 내 영혼에도 한때는 궁극이 있었음을 떠올렸다. 바로 천하(天下)와 천추(千秋)가 나의 궁극이었다. 내 모든 정신의 구조물들은 바로 천하와 천추 위에 세워졌었다. 그 천하와 천추는 공자의 가르침이자 모든 중국 지식인의 본능이며 종교였다. 최소한 내게는 그랬다. 나는 천하와 천추를 바탕으로 내 정신세계를 세우려고 했었다. 그것이야말로 사람의 삶이 의미를 갖는 이유, 희생이 가치를 갖는 이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단순히 한 개인, 순간을 머무는 생존자에 그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인생이 너무 가련하고 불쌍하지 않은가. 사는 게 그저 숨쉰다는 뜻이라면, 사람은 왜‘사람답게’살아야 하고, 또 지식인이라는 인간은 도대체 무엇이고 무슨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인가?
그러나 나의 정신세계는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나의 사고도 이미 파괴되고 있었다. 시대가 변하는데 사람이 안 변할 수가 있나. 언제까지고 환상에 빠져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나는 본능적으로 내가 개인적인 틀을 깨고 무엇을 해야 하고 또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때마다 그런 생각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이성적으로, 그리고 잔인하게 느끼고 있다. 시대가 변했다. 세계는 거대한 괴물이 되었다. 사회가 얼마나 분업화되었는지는 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나는 그저 아주 작은 한 부분을 차지할 뿐이다. 이렇게 작은 한 구석에서 천하의 큰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희생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단지 그 희생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까봐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만약 나의 희생이 바다 깊은 곳에 가라앉은 작은 배처럼 암흑의 시간에 영원히 잠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나는 스스로를 속일 수 없다. 그리고 시장은 눈앞에 있는 것만을 인정하고, 시간 뒤에 어떤 신비한 무언가가 있을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시장은 정확하다. 그렇지만 그런 정확함은 또한 너무나 많은 인간의 상상을 파괴해버렸다. 모든 것이 소비욕망의 평면 위에서 펼쳐지며, 사람들은 더 이상 천하와 천추 같은 것들을 상상하지 못한다. 하물며 그런 희생의 의미와 성스러운 광휘(光輝)들이 이젠 시간에 떠밀려 범속하다 못해 쇠락한 진상을 드러내고 있다. 결코 달갑지 않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했다.
모든 것은 과정이고 한 순간이다. 아무리 대단한 인물이라도 이런 비극적인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 순간을 잡으면 본질이 잡히고 영원이 잡힌다. 인생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 자기 자신밖에 없다.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세계는 하나의 장기판이고, 내가 바로 장기판 위의 장군이다. 슬프고 절망적인 생각이다.
세계를 내려놓고 나서 나는 홀가분해짐을 느꼈다. 그러나 그 홀가분함은 어떤 의미에서 더더욱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지식인이 가장 감당하기 힘들어 하는 것은 바로 자기가 감당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천하와 천추를 가슴에 담고 살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들의 정신세계가 파괴되어 가고, 그런 정신에 기반을 두었던 그들의 신분 또한 상실되고 있다.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을 가져서는 안 된다. 또 다시 희망을 품었다가는 이 한 평생 정말 아무런 희망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나더러 마음에서 세계를 내려놓으라고, 세계에 대한 어떠한 신념도 포기하라고 하는 것은 나더러 자살하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어떻게 스스로를 그렇게 잔인하게 대할 수가 있어? 난 못해. 그렇지만, 그렇지만,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다. 지금 포기하면 이젠 정말 끝장인 것이다. 한숨이 나왔다. 오늘부터 사는 데에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뒤의 일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먼 곳의 일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생각한다고 할 수 있는 일도 없기 때문에, 생각하더라도 아무런 의미도 없다. 사람은 자신을 속일 수도 또 속이지 않을 수도 없다. 자신을 속이는 것이 너무 잔인하지만, 그러나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로 잔인하다. 생명의 진상은 꾸밈없이 내 눈 앞에 놓여 있는데, 난 정말 그를 똑바로 쳐다볼 여력이 없다.
석가여래의 상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그 신비한 미소의 그 특별한 의미가 알고 싶었다. 그 미소가 결국은 어느 조각가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그 신비감은 떨칠 수가 없었다. 스님이 말했다.
“점 한 번 보시죠. 여기 부처님이 무척 영험하십니다.”
보아하니, 시장은 사찰 안까지 파고들어와 있었다. 내가 물었다.
“정말 그렇게 효과가 있습니까?”
“믿으면 있고, 안 믿으면 없고(信則有, 不信則無), 뭐 시주하시는 분의 성의에 달린 거죠.”
성의라 함은 돈을 내라는 건데, 절 앞에서 향을 팔던 아낙과 다를 게 하나 없었다. 이상한 마음에 이끌려 나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세 번 절하고는 대나무 통을 수십 번 흔들다가 그 안에서 얇은 대나무 쪽 하나를 집어 스님에게 건넸다. 그가 물었다.
“뭘 비시겠습니까?”
“특별히 빌 게 뭐가 있나요?”
“재물, 결혼, 사업, 평안, 사람 일이면 아무거나 다 됩니다.”
부처님은 참 여러 가지에도 신경 쓴다고 생각하면서 말했다.
“사업을 봐주십시오.”
그는 나무 상자 안을 한참 뒤지더니 종이쪽지 하나를 나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좋은 일이 있습니다. 상상(上上).”
나는 오 위안을 주었다. 그가 말했다.
“상상(上上)은 십 위안입니다. 잘 안 나오거든요.”
할 수 없이 나는 오 위안짜리를 다시 받고 십 위안을 주었다.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말없이 일심으로 믿으면 하늘로 날아올라
태산의 보배를 배에 가득 싣고 돌아온다.
길을 물으면 좋은 일이 이루어지나니
앞에서 귀인이 끌어줄 것이다.”
(勿言一信向天飛, 泰山寶貝滿船歸.
若問路途成好事, 前面仍有貴人推.)
다 거짓말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갑자기 전에 들은 얘기가 생각났다. 운봉사의 몇몇 법사가 서로 주지가 되겠다고 싸움을 벌였다가 결국은 돌아가면서 주지를 하기로 했다는 것 같았다. 아까 그 스님에게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보자, 그는 고개도 안 들고 말했다.
“출가한 사람은 속세의 일을 묻지 않습니다.”
나도 그냥 관심을 접었다. 사당의 뒷문을 나와 나는 좁은 계곡을 따라 산꼭대기 쪽으로 갔다. 사람이 점점 안 보였고, 나중에는 길도 없어지고 정상이 나타났다. 산바람이 불어와서 내 옷 속으로도 바람이 들어왔다. 나는 무릎을 감싸고 자리에 앉았다. 저 멀리로 강물이 산을 돌아 흐르는 것이 보였다. 모래를 나르는 배들이 강 위를 움직이고 있었다. 여행객을 태운 좀 빠른 배들도 있었다. 좀 있으니 여객선이 항구에 도착하고 무겁고 둔탁한 뱃고동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강변의 집들은 그저 희뿌옇게 보이고, 높게 솟은 빌딩만이 한 눈에 탁 들어왔다. 그 외에도 많은 고층건물들이 건설 중이었다. 크레인의 쇠 팔이 움직이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구별할 수 있었다. 다리 위로 차들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빨간 소형승용차가 천천히 강 저쪽으로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 차가 내 시야에서 없어질 때쯤 나는 그 안에 어떤 사람이 타고 있는지 또 어디를 가려고 하는지 궁금해졌다.
생명의 참 뜻은 이렇게 평범한 순간에 있는 것이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 동안 나의‘정신의 빌딩’을 지탱해 주던 천하와 천추의 정서 역시 그저 영혼의 한때 상황에 불과했다. 그 의미래야 고작 나 혼자의 주관적 의미였던 것이다. 믿으면 있고, 안 믿으면 없고. 그런데 나는 왜 그것이 있다고 믿고 나를 구속해 왔을까?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삶의 본원적 의미를 포기했고 그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지만, 그러나 나는 또한 본원적 의미를 찾으려는 어떠한 노력도 경계한다. 결국 나는 이상주의자이고, 무신론자다. 나는 진상을 제대로 보고 있다. 의미는 사라지고 가치는 떨어졌지만, 사람은 살아야 한다. 세상을 너무 정확하게 보기에, 너무 정확하게 이해하기에, 이렇게 슬픈 것이다. 마치 벼랑 끝에 서서 더 이상 앞에 갈 길이 없는 것과 같다. 빠르게 쇠퇴하는 시대이다. 모든 것은 생성과 동시에 소멸하고, 번영과 동시에 시들고 있다. 기존의 정신적 세계는 이미 무너졌다. 나는 이제 보다 짧은 시간과 보다 좁은 장소, 새로운 시공(時空)의 관념 위에 개인의 현실적 생존을 기초로 하는 새로운 정신세계를 다시 구축해야 한다. 비참하게 들리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그 순간 나는 뭔가 확 뚫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너무 많은 생각은 하지 말자. 지나친 생각은 나만을 옭아맬 뿐이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이 더 오랫동안 생각에 잠기거나 망설이고 배회하기를 바라면서 자기는 그 틈에 현실에서 그 팔과 다리를 힘껏 펼치려는 인간들이 있다. 나도 그들과 같아지고 싶다. 현실로 돌아오고 싶다. 자아의 생존이 제일 중요한 현실이고, 이는 어떤 논리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살아가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내가 전부이며, 그 목표를 위해서라면 어떤 식의 조작에도 유연하게 대처해야 하고, 구속은 사라져야 한다. 생각하면 무서운 일이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끌리고 가슴이 쿵쿵 떨려왔다. 새로운 가능성이 펼쳐지고 있었다. 더 이상 무엇을 고집할 필요도 없다.
나는 나를 해방시켰다. 타락의 쾌감과 공포가 동시에 느껴졌다. 나 지대위가 이렇게 오랜 시간 방황한 끝에 이런 결론에 다다를 줄이야. 내가 개, 돼지라고 욕하던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 나는 그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정소괴, 임지강 그리고 광개평까지도 다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좋은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나쁜 사람들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저 생존에 적합한 사람들일 뿐이다.
나는 바람을 맞으며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왼쪽 볼은 바람을 맞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엄청난 허탈감을 느끼고 산을 내려왔다. 그 허탈감은 너무나 현실적인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현실 이면의 것은 아무 것도 믿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살아야 한다. 나에겐 일파와 동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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