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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사람 눈물 닦아주는 것, 그게 정치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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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사람 눈물 닦아주는 것, 그게 정치 아닌가?"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16> 정동영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정동영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을 만나고 왔다. 'MBC 보도국 정치부 기자와 MBC 뉴스데스크 앵커를 거쳐 정치에 입문한 후 열린우리당 당 의장, 통일부 장관,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장, 17대 대통령선거 통합민주당 대통령 후보까지 한 유력 정치인이다'라고 그를 소개하기엔 너무 많은 이야기가 행간에 숨어 있다.

2007년에는 대통령이 되는 것이 목적이고, 다른 것은 그를 위한 수단인 것처럼 보였지만 지금은 좀 다른 것 같다는 질문에 "그동안 내가 해온 정치라는 게 정치 개혁, 정당 개혁, 정당의 민주화 또 개성 공단, 9.19 공동성명 등 중요하긴 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개개인의 삶에 깊이 천착한 정치는 아니었다. 다시 정치에 복귀한 게 2009년, 3년 전이다. 그때 우선으로 시작한 것이 용산참사 문제로 상징되는 재개발의 문제였다. 다시 국회에 들어와 선서할 때 정치인들만의 잔치가 아닌. 용산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치, 우는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줄곧 현장에 있으려고 노력했다"라고 답한다.

민주통합당이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정책을 펼칠 수 있는 수권정당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는 "강령에서 이야기하는 가치와 정신을 중심으로 민주당을 재건해야 되는 거다. 그래야 집권을 해도 실패하지 않는다. 그 점에서 내가 반성할 것이 있다. 내가 열린 우리당 초대 당 의장이었는데 그때 첫 번째 공천 기준이 당선 가능성이었다. 그것이 내 오류다. 그 결과 민주당의 색깔이 불분명해졌다. 뼈아프게 반성한다"라고 답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 때도 한미FTA에 대한 사회적 저항은 매우 컸었는데, 왜 그렇게 추진하려 했었냐는 질문에는 "그게 내 반성의 핵심이다. 내가 한미FTA를 막는 데 힘을 보탰어야 하는데 아무 역할도 못 했다는 것이 후회되고, 크게 반성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 때 중책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한미FTA에 대해 별로 고민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고민을 제대로 했어야 했다. 2008년 9월 미국 경제가 무너지는 것을 보며 정치인으로 이것을 상상도 못했던 것과 애초에 시작하지 말았어야 할 FTA를 한 것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지난 8월 반성문을 썼다"라고 답한다.

물음에 대한 답이 반성으로 시작해 반성으로 끝난다. 그렇게 줄곧 반성문을 쓰고 있었던가.

한진중공업 사태에 왜 그렇게 매달렸느냐고 물으니 "재벌 대기업이 얼마나 사람을, 인간을 하찮게 여기는가를 직접 경험할 때마다 너무 놀랐다. 사람을 어떻게 볼트·너트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런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힘들었다. 거기에 인간은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인간 김진숙을 살리는데 매달렸었던가.

그러면서 "오늘 우리 현실 속에서는 밥과 밥줄의 불안으로부터의 자유가 제일 큰 자유라고 생각한다. 밥줄, 즉 직장을 찾기도 어렵고, 밥줄 자체도 불안하다. 비정규직이 거의 대부분이지 않은가. 밥줄이 끊어지면 그다음에는 추락이고. 밥줄인 노동과, 밥인 복지 그 두 가지가 우리는 다 불안하다. 밥과 밥줄, 이 두 가지의 부족에 대한 불안을 어떻게 해소하느냐가 우리 시대의 과제라 생각한다"라고 답한다. 볼트가 아닌 인간이 밥과 밥줄의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회를 향한 꿈이 그로 그렇게 끊임없이 현장을 향해 달려가게 만드는 것일까.

인간적으로 가장 힘들고 외로웠던 시간이 언제였냐고 물으니 "용산 가족들 보면서 그랬다. 문정현 신부님이 미사를 하다가 '저기 있는 저 사람이 책임자다. 정권 뺏겨서 이렇게 되었다' 하시는데 차마 얼굴을 들을 수 없었다"라고 한다. 그때 이해가 되었다. 그가 왜 "정치의 목적이 목숨이다"라고 했는지. 그리고 어쩌면 그때, 용산참사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이름이 그의 가슴에 주홍글씨처럼 새겨버렸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가 2012년 대선에서 "무슨 역할이라도 좋다. 첫 번째는 내가 정권을 내 준 책임자로서 속죄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정권을 내주는 과정에서의 잘못한 점과 부족한 점들을 깊이 있게 생각하고 있다. 민주통합당을 중심으로 해서 의회권력, 정치권력을 찾아오는 데에 나의 역할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에서 김구 선생님의 말씀을 빌자면 '문지기' 역할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라는 그의 답이 그리 미심쩍게 들리지는 않는다. 행여 그게 아니라 할지라도 무슨 상관이랴. 용산참사 현장에서 새겨졌을 주홍글씨가 바래질 틈 없는 가슴 아픈 현장들이 너무도 많이 있는데, 그리고 "우린 아직 배고프다(We are still hungry)!"라고 이야기하는 수많은 '김진숙'들과 용산의 어머니들이 우리 곁에 너무 많이 있는데.


2007년과 2011년 그리고 2012년

▲ 정동영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프레시안(최형락)

이 질문을 많이 받았었겠지만 물어보고 싶다. 2007년 대선에 떨어졌을 때 어땠나?

이런 질문 받는 게 제일 괴롭다.(웃음) 내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운 경험 중 하나이다. 고통스러운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불행하게도 4년 전 예언이 다 들어맞은 꼴이 되었다는 것이다. '2:8 국가가 될 거다, 민주주의가 후퇴할 거다, 남북관계가 깨진다.라는 말이 다 들어맞게 되었다. 그중 제일 안타까운 것은 나의 비전인 '가족 행복 시대'가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들렸다는 것이다. 지난 십수 년 신자유주의의 경제, 교육, 시장, 작은 정부, 자유화, 민영화 속에서 가족들이 불행해진 것 아닌가. 이 사회의 핵심은 행복이고 국가의 역할은 개인의 행복과 가정의 행복을 보장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인데 이런 메시지는 전해지지 않고 '부자 되세요 → 대운하 → 다시 박정희 시대 → 개발시대의 도래 → 일자리 창출'이라는 달콤한 거짓말에 국민이 현혹되었다. 결국 더 불행해졌다. 그래서 그런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DJ와 노무현의 깃발을 정동영이 그 바통을 이어받았는데 크게 패배했다는 것에 상처를 받았다. 내가 불면증이라는 것을 모르고 산 사람인데 그 이후 한동안 잠을 잘 못 잤다.

지금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을 보면 마음이 어떻나?

두 가지 감정이 있다. '봐라. 내가 경고한 대로 되지 않았느냐' 이런 생각도 있는 반면에, 거기에 대한 죄책감이 있다. '내가 장본인이구나! 내가 아니었으면 어땠을까'란 생각이 있다. 후보가 되어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한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친 것에 대한 자책감이 있다.

솔직히 지난 2007년에는 이명박 후보를 찍고 싶어서가 아니라, 개혁진보세력은 좀 다른가 했는데 기득권 세력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 '그럼, 그냥 돈 잘 벌어준다는데 찍자'는 마음으로 이명박 대통령을 선택했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국민들에게 비전을 주지 못한 민주당과 그를 대표했던 정동영이 더 미웠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어떤 마음이 드나?

2006년, 2007년 참여정부 후반부의 민심은 아주 안 좋았다. 한마디로 기득권과의 싸움에서 밀린 것이다. 재벌 대기업, 보수 언론, 사회 기득권의 총 공세에 효과적으로 대응을 잘 못 했다. 예컨대 재벌개혁의 길을 간 것이 아니라 재벌 대기업에 기대어 성장과 일자리를 만들려 했던 것이다. 거기에 나, 정동영도 답답한 민심을 뚫고 시원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차별 없는 성장과 가족 행복 시대'라는 총론은 있었는데 그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부족했다. 내 역량의 부족이었다.

지난 2007년 대선 때 반MB가 아닌 노동의 가치, 복지의 가치, 경제 민주화 등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다면 한국 사회가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띠지 않았을까 싶다. 그때는 왜 지금만큼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었나?

솔직히 나의 한국사회를 보거나 세상을 보는 것에 대한 시각의 분기점은 2008년 9월의 미국 월가의 붕괴였다. 김대중 정부, 참여정부 때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것이라 봤던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우리도 거역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다. 미국 경제 위기를 보며 그렇게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해진 것이다. 물론 국민의 정부 때 기초생활 보장제, 참여정부 때 복지 예산의 증액 등 대증적 처방은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정리 해고, 노동 유연화, 민영화, 자유화, 규제 완화라는 흐름을 수용했기 때문에 그 속에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선이 2007년 12월이고 미국 경제가 붕괴한 게 2008년 9월인데 개인적으로 충격을 많이 받았다. 불과 9개월 앞에 다가올 일인데 상상도 못했다는 것에 대한 자괴감과 지금까지의 길을 그대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 생겼다. 총론적인 고민은 있었지만, 신념은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 미국 경제위기를 보며 한국 사회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되었고 FTA가 상징하듯이 작은 미국이 아닌 다른 모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예컨대 큰 스웨덴 같은 것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2007년에는 대통령이 되는 것이 목적이고, 다른 것은 그를 위한 수단인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필요한 상황에 자신을 맞추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른 것 같다. 상황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야 할 상황들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것을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 같다. 한진중공업 사태가 대표적이 아닌가 싶다. 혹시 스스로도 그것을 느끼는지? 그렇다면 그럴 수 있는 힘? 원인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 같은가?

총괄적으로 얘기하고 나중에 분해해서 자세히 얘기하겠다. 결국 정치라는 게 여의도가 정치가 아니라 국민의 삶이 정치이지 않나.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이라든가 먹는 물 한잔이라든가 모두가 정치의 결과가 아닌가. 그동안 내가 해온 정치라는 게 정치 개혁, 정당 개혁, 정당의 민주화 또 개성 공단, 9.19 공동 성명 등 중요하긴 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개개인의 삶에 깊이 천착한 정치는 아니었다. 큰 민족문제, 정치 개혁 등 그 속에서 국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하는 데 대한 구체적 대안과 실천이 없었다.

ⓒ프레시안(최형락)
다시 정치에 복귀한 게 2009년, 3년 전이다. 우선적으로 시작한 것이 용산참사 문제로 상징되는 재개발의 문제였다. 그리고 정권이 안 바뀌었으면 죽지 않아도 될 목숨들을 지키는 문제, 정치의 목적이 바로 목숨이다. 생명을 파괴하고 정치를 하는 게 무슨 의미인가. 그래서 다시 국회에 들어와 선서할 때 정치인들만의 잔치가 아닌. 용산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치, 우는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정치가 아닌가. 그래서 줄곧 현장에 있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감명 깊게 생각하는 것은 민주당을 민주통합당으로 다시 시작하며 민주당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강령을 세우는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재벌 개혁 119 특위와 복지국가 특위의 두 책임자를 강령 기초위원으로 추천하여 두 특위의 성과물을 담은 것이다. 당 지도부에 들어와서 끊임없이 민주당이 재벌 개혁, 보편적 복지 두 날개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두 날개로 2013년 체제를 열어야 한다. 이것이 백낙청 교수님이 말씀하신 2013년 체제의 한축이다. 또 다른 하나는 평화체제이다. 그건 내가 2005년 통일부 장관을 하며 개성공단을 실제로 만들어냈고, 2007년 대선에서 핵심공약으로 제시하며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남북문제에 대해서는 나만큼 경험을 가진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내 나름대로 비전을 갖고 있다고 자부한다. 새로운 민주통합당의 3대 목표가 '평화체제와 재벌개혁, 그리고 보편적 복지를 통해 복지국가를 이루는 것'이다. 민주통합당의 강령에 '정동영의 정치'를 그대로 투사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작년부터 이어진 행보를 보며 혹자는 "쇼냐, 쇼라도 좋다! 이렇게라도 계속해다오"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쇼"라는 단어에는 "여전히 그 의심이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고맙다! 좋다! 그렇게만 계속 가다오"라는 주문이기도 한 것 같다. "변신이냐, 변화냐"라며 다른 정치인들에 비해 대중들로부터 유달리 엄격하게 의심받고, 점검받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분석 안 해 봤는데... 전에 현장에서 보이지 않던 정동영이 보이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닌가 싶다. 그 기사를 보고 기자에게 알아줘서 고맙다고 했다.(웃음) 솔직히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나한테만 왜 이리 엄격한가? 그런 느낌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나는 많이 받은 사람 아닌가. 다른 사람들은 정치하면서 민주화 투쟁으로 탄압도 받고 감옥도 가고 그랬는데 나는 정치에 입문해서 금방 여당이 되고 집권당 10년간 중심적인 활동을 했다. 많이 받은 사람이다. 받은 사람인 만큼 책임이 무겁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하지 않았나. 실패한 것에 대한 업보다.

민주통합당, 노동과 복지의 가치를 중시하는 정책정당으로 가려면

"민주 정부들이 실패한 반작용의 결과가 이명박 정부를 낳았다. 즉, 지난 김대중-노무현 두 진보적인 정부하에서 노동을 배제하고, 분배구조를 비롯하여 고용, 복지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이렇다 할 중요 결정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진보적인 군소정당들이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기는 어려우므로 민주당이 개혁되길 바라는데, 현시점에서 민주당이 그런 역량을 갖추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게 지난 2010년 6월에 민주당에 대한 최장집 교수의 평가였다. 이제는 민주통합당이 되었지만, 민주당이 많은 이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정책을 펼칠 수 있는 수권정당이 될 수 있을까? 그런 희망이 보이기도 하다가도, 폭력사태까지 발생했던 지난 민주당 전당대회나 한미FTA를 막지 못한 모습 등을 보면 또 실망이 된다.

그래서 내가 제안하려고 하는 것이 있다. 종이로서의 강령은 의미가 없고 실천될 때 의미가 있다. 영등포 당사를 내가 만들었는데 거기다 강령을 새겨 넣으라고 하려 한다. 15일 전당대회를 할 때 강령을 손바닥 사이즈 책자로 만들어 참여한 대의원들에게 나눠주자는 제안을 하려 한다. 왜냐하면 강령은 그냥 종이가 아니라 '내가 민주당을 하는 이유'여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 강령이 강령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가야 하는 방향이고 민주당이 집권해야 하는 이유이고 국민이 거기에 희망을 걸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한미 FTA에 대한 재검토, 원전 재검토, 비정규직 차별 철폐 등 핵심 가치를 구현해야 한다.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서 당원은 당원대로 당의 노선과 가치를 숙지해야 하고 지도부는 지도부대로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해야 한다. 얼마 전까지 민주당이 FTA에 대해 취해온 태도를 한마디로 말하면 지리멸렬이다. 한나라당에 가도 손색이 없을 사람들이 앉아서 민주당을 살리자고 하고, 민주당을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 배반이다. 민주통합당의 강령을 자기 양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지. 적어도 출마를 하고 민주통합당 국회의원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FTA 찬성론자라면 한나라당으로 가야 한다.

강령에서 이야기하는 가치와 정신을 중심으로 민주당을 재건해야 되는 거다. 그래야 집권을 해도 실패하지 않는다. 그 점에서 내가 반성할 것이 있다. 내가 열린 우리당 초대 당 의장이었는데 그때 첫 번째 공천 기준이 당선 가능성이었다. 그것이 내 오류다. 그 당시 열린 우리당이 46명이어서 숫자를 늘려야 한다는 일념에 그랬다. 46명으로는 여당 구실을 못 하니까 최소한 100석, 120석 이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당선 가능성을 보고 관료를 대거 영입했다. 그래서 지금 민주당 구성원 중에 관료출신이 제일 많다. 그 결과 민주당의 색깔이 불분명해졌다. 뼈아프게 반성한다.

ⓒ프레시안(최형락)

예전에는 당선 가능성을 보고 후보를 찾았다면 지금은 가치와 노선 중심으로 뽑겠다는 것인가?

당이라는 것은 생각이 같은 패거리다. 근데 현재는 패거리는 맞는데 서로 생각이 너무 다르다. 2007년 대선에 실패하고 2008년 4월 총선에 대패하고 사실 지금 있는 87명의 의원들은 그 와중에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가치와 노선을 중심으로 뭉친 사람들이 아니고 급류에 쓸려나가면서 나무 뿌리를 잡고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너무 범주가 넓은 것 같다.

가치와 노선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솎아내고, 함께 갈 사람들을 뽑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민주통합당 공천 신청을 하는 사람들이 애초에 그 마음을 먹고 들어오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 특히 내년 총선에 민주통합당 공천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올 텐데 그러려면 '이곳은 당의 가치와 노선에 대충 동의하는 시늉만 해도 되는, 만만한 곳이 아니다'란 인상을 주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 같다.

그래서 그런 것을 보여야 하는 사람들이 지도부이다. 그런 일을 하기 위한 지도부를 만들어야 한다. 한미FTA에 대해서 철학을 확실히 가진 사람들로 지도부를 구성해야 한다. 그래서 여기서 최초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 운동을 벌이려고 한다.

첫째로 선거인단 가입운동, 선거인단 개방되었으니까 선거인단 가입 운동, '한미FTA 폐기 지도부에 투표해 주십시오.' 이렇게 해서 지도부를 만들면 그 속에 다 들어 있으니까. 한미FTA 속에 노동, 환경, 산업, 금융, 농업, 전 산업, 경제 분야가 망라되어 있는 것이니까. 그리고 우리가 얘기한 재벌개혁 경제민주화 복지국가하고 한미FTA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한미FTA 폐기로 상징되는 가치와 철학을 중심으로 당의 지도부를 구성하고 그 지도부로 또 총선 공천과 총선을 치르고 그렇게 해서 뜻과 가치를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이 새로운 정부를 창출해야 2013년 체제라는 것이 출발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정치는 사람이 하는 것이지 않나. 그런 점에서 국민의 정부, 참여 정부는 준비되지 않았던 것이다. 임기 마지막에는 대개 관료들이 주무르는데 관료의 나라로 어떻게 기존 체제를 개혁하겠나. 개혁을 얘기하면서 관료를 앞세우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수성이나 태평성대 같으면 안정적인 관료들이 유능하지만 무언가 시스템을 바꾸고 체제를 바꾸고 새로운 길을 가려면 그것을 밀고 가고, 끌고 갈 주체세력이 있어야 한다.

지난 10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내년에 민주 진보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통합진보당과도 함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 사회 진보적인 역량들이 한꺼번에 다 함께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 기득권 세력의 뿌리는 친일파로부터 거슬러 올라가지 않나. 그들은 부를 축적했고 세력을 만들어서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하지만 지난 60년 동안 민주정부는 10년밖에 없지 않았나. 그 기간을 통해 형성된 기득권 카르텔, 본거지가 너무 막강하다. 그런 기득권과 싸워 요즘 얘기로 1%가 아닌 99%를 위한 경제 사회 정책을 펴기 위해서는 99%의 문제를 그 사람들의 문제가 아닌 나의 문제, 우리의 문제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단단하게 결합되어 준비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여기가 분열하면 아무 힘도 쓸 수 없다.

구민주당을 포함한 민주통합당의 변화를 추동하기 위한 구체적인 그림이 있다면 무엇인가?

나는 개인적으로는 공개 반성문을 썼지만 민주당 내에 한미FTA에 대한 인식이 아직 얕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당이 반성문을 쓰자고 주장했었다. 그래야 선명하지 않나. 대한민국 전문 법률가인 판사들이 곰곰이 뜯어봐도 '이건 아니다'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 민주당 의원들도 한미FTA를 진지하게 뜯어보고 공부를 해서 한미FTA가 우리 국민들의 삶에 미치는 실질적인 영향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한미FTA는 자유무역협정이 아니다. 그런데 이름이 그렇다 보니 막연하게 '자유무역협정(Free Trade Agreement)인데 어때?'라고 생각하는 인식이 있다. 그래서 좀 불안하다.

최근에 한 일은 지난 11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한미FTA 비준안 무효 결의문'을 제안해 관철시킨 것이다. 그리고 16일 마지막 최고위원회에서 민주통합당이 그 결의문을 승계할 것을 제안해서 의결토록 한 것이다. 마침 12월 19일 아침에 민주통합당 지도부 첫 회의에서 결의문을 승계한다고 의결했다. 그 내용은 한미FTA를 반드시 폐기하겠다는 것이다. 일단 한 단계는 넘어갔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다.

ⓒ프레시안(최형락)

한나라당과 박근혜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은 한미FTA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즉, 가진 자만을 위한 나라를 만들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재벌개혁, 경제민주화가 이루어진 보편적 복지국가를 만들려고 한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고자 한다. 한나라당과 이 지점에서 정면으로 갈리고, 갈리는 지점에 바로 한미FTA가 있다.

2008년 9월 미국 경제가 무너지는 것을 보며 정치인으로 이것을 상상도 못했던 것과 애초에 시작하지 말았어야 할 한미FTA를 한 것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지난 8월 반성문을 썼다. 그리고 그 후 지난 10년의 경험과 이 반성을 담아 어떤 세상을 국민들에게 제시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 고민 가운데 나온 답이 담대한 진보였다. 증세 없이 복지국가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부유세를 이야기하고 부자 증세를 이야기했다. 복지국가로 가기 위해서는 담대해야 한다.

2010년 전당대회의 하나의 성과라면 민주당의 강령에 보편적 복지를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지금 강령에 비하면 미약하긴 하지만 그때 출발하면서 부분적으로나마 보편적 복지가 당의 주요 목표로 들어간 것이다. 그때 진보적 색채가 가미되었다.

그리고 올 1년은 환경노동위원회로 가서 "한진 문제에 집중하고 당이 여기에 전면적으로 결합해야 한다. 희망버스에 결합해라. 그리고 이 문제를 당의 정체성으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계속 주장했다. 그랬더니 당이 전체적으로 결합은 안 했지만 "그럼, 정동영 당신이 해라!" 그래서 민주노총 김진숙 지도위원의 크레인 농성 200일째가 되는 7월 24일에 함세웅 신부님 등 종교, 법조, 시민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우리 사회의 양심세력을 대표하는 분들과 함께 한진중공업 크레인 앞에서 희망시국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이어 8월 20일 날 서울시청광장에서도 희망시국대회를 개최했다. 그렇게 끌고 왔다. 어쨌든 그런 과정들을 통해 민주통합당 강령에 노동의 가치, 비정규직 문제, 동일노동·동일임금 등의 문제가 들어갔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그 과정에 조금이나마 기여했다는 것에 대단히 보람 있게 생각한다.

진보정당들과의 연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민주통합당 강령에 '왜 통합하는가, 통합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 가치가 다 담겨 있다. 그런데 그 가치와 노선이 통합진보당이나 진보정당과 사실상 거의 유사하다. 그렇다면 동지적 연대를 형성해야 되지 않나. 그래서 나는 '연대로는 부족하다. 대통합하자'고 계속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 같다. 그렇다면 연대라도 해야 한다. 그것은 국민이 원하는 것이다. 국민은 MB정부를 심판하고자 하는데 그러려면 여당과 야당이 1:1 구도가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총선에서 의회 권력을 교체할 수 있고 집권의 기반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 가치를 공유하기 때문에 이러한 연대가 가능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민주통합당이 '한미FTA 비준안 무효 결의문'을 당론으로 승계하겠다고 결정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그 결의가 굉장히 세게 되어 있다.(웃음) 그냥 반대한다가 아니라 "굴욕적인 한미FTA를 반드시 폐기한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그렇게 되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한 것 같아 너무 좋다. 아, 나에게 너무 깔때기를 댔나?(웃음)

한미FTA 왜, 그리고 어떻게

한미FTA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해보자. 한미FTA 비준안이 날치기 통과되던 날,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뿐 아니라 애초에 이것을 시작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에 대해서도 큰 울분을 토해냈다. 그때도 한미FTA에 대한 사회적 저항은 매우 컸었는데, 왜 그렇게 추진하려 했었나?

그게 내 반성의 핵심이다. 내가 한미FTA를 막는 데 힘을 보탰어야 하는데 아무 역할도 못 했다는 것이 후회되고, 크게 반성하고 있다. 나는 당시 한미FTA 추진론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방관자였다. 그것이 국민들에게 너무 죄송스럽다. 노무현 정부 때 중책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한미FTA에 대해 별로 고민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고민을 제대로 했어야 했다.

ⓒ프레시안(최형락)

한 인터뷰에서 한미FTA에 대해서 "날치기했지만 'FTA는 된 거 아니냐'는 게 아니라, '아니다. 무효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쫄지 말라"라고 했다. 현재 날치기 FTA 무효화 투쟁위원회, 24.5 위원회를 꾸리고 있는데, 한미FTA 정말 폐기할 수 있다고 보는지? 단지 수사가 아니라, 이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들이 있다면 듣고 싶다.

결코 끝난 싸움이 아니다. 분명한 방법이 있다. 첫째, 발효절차를 중단하는 것이다. 이미 이 정부가 계획했던 1월 1일 발효는 불가능한 상태다. 한미FTA 발효를 위해서는 양국이 관련 법과 제도를 개정하고 상호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으로도 미국은 4개 이상의 법률을 개정하지 않았다. 한미FTA 협상을 책임진 통상교섭본부는 이런 기초적인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종훈 본부장을 직무유기로 고발한 것이다. 발효절차를 당장 중단하고 검토 작업에 들어가야 하며,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 제기된 문제를 다시 공론화해야 한다.

둘째,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권이 발효절차를 멈추지 않는다면 한미FTA 협정문에 명시된 공동위원회를 통해 재개정 및 부분폐기를 요구해야 한다. 또한 내년 총선에서 여소야대 국회를 만들어 한미FTA가 헌법 119조 2항 "경제민주화"를 훼손하는 데 대한 효력정지특별법을 추진해야 한다. 동시에 4월 국회에서 바로 청문회와 국정조사를 통해 나라를 팔아먹는 한미 FTA의 실상에 대해 국민들께 낱낱이 알려야 한다. 또한, 이와는 별도로 한미 FTA의 위헌심판청구도 준비하고 있다. 한미 FTA는 헌법 119조와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경제력의 집중과 시장지배력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국가가 규제와 조정을 하라는 건데 한미 FTA는 그것을 무력화하지 않나. 우리 헌법을 무력화한다는 이야기다. 충분히 다퉈볼 수 있다.

셋째, 이 또한 관철되지 않는다면 결국 한미FTA 협정문 24.5조에 따라 서면으로 파기를 통보하여 180일 이내에 자동폐기 되도록 할 수밖에 없다. 한미FTA 비준 절차는 양국의 국회 의결 절차와 법 개정 등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지만, 한미FTA 협정문 상에 폐기 절차는 아주 간단하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한미FTA 종료를 희망하는 내용을 담은 서면 한 장만 미국 정부에 보내면 그날로부터 180일 후에 자동 종료된다. 폐기에는 국회 동의 절차도 필요 없다.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폐기 절차를 그렇게 간편하게 만든 것인데, 지금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카드가 된 것이다.

결국 한미FTA 폐기는 정치세력의 의지의 문제이다. 총선·대선의 승리가 이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국민들이 제2의 을사늑약, 한미FTA 폐기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쫄지 말고 무효화 운동에 적극 나서면 얼마든지 폐기가 가능하다. 최근 한미FTA 문제점을 가장 먼저 제기한 최은배 인천지법 부장판사는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때론 침묵하는 것이 가장 정치적이고, 불의의 편에 서게 될 때도 있다."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다. 한미FTA에 대한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매국 행위에 대한 방조자로 후손들에게 기억될 수도 있다.

"한미FTA 철회 18대 국회는 사실상 끝났다. 진정한 국회는 의사당이 아니라 광장에 있다"고 했다. 이 말의 뜻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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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가 사상 초유의 비공개 날치기로 통과된 11월 22일, 이날은 주권을 넘겨버린 제2의 국치일로 기록될 것이다. 그날 의원총회에서 '의원직 총사퇴'를 주장했었다. 이는 '날치기를 막지 못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임과 동시에, '18대 국회는 더이상 국민의 대의기관으로, 헌법기관으로 기능을 상실했다'는 의미에서였다. 국민의 민심과 현장 온도는 영하 10도인데 여의도에서 느끼는 체감온도는 영상 10도다. 현장의 목소리를 대변하라고 존재하는 것이 여의도 국회인데, 이를 온전히 묵살하는 다수의 폭력이 존재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민심은 광장에서 폭발하고 있다. 그곳이 정치가, 국회가 존재해야 하는 곳이다.

한진중공업 사태와 김진숙 지도위원, 희망버스

2011년 환경노동위원회에 간 이후로 많은 변화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와중에 민주노동당 정동영이라는 별명까지 생겼는데, 그 별명을 처음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나?

글쎄... 노동 문제를 열심히 한다고 평가해 준 것인가.(웃음) 나는 그런 진보 정당들과 대통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대통합론자이기 때문에 크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문제는 민주당 내에는 지금은 통합했지만, 그때의 민주노동당과 함께하면 큰일 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 그 생각을 어떻게 깰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다.

한진중공업 사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정동영 의원이 보여준 진정성 있는 활동에 많은 사람들이 감명을 받았다. 한진중공업 사태에 그렇게 매달렸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나?

내가 복지국가, 증세, 부유세 이야기를 해 왔는데 복지국가의 핵심은 사람이고 노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환경노동위로 올 초에 옮겼는데 그때 한진 문제가 시작된 것이다. 김진숙 씨가 1월 초에 올라갔고 1월에 내가 환경노동위로 왔다. 그전에는 사실 김진숙 씨가 누군지, 이렇게 유명한 사람인지 몰랐다.(웃음) 처음에 갔을 때는 집회에 몇백 명씩 모였는데 그분들이 소, 닭 보듯이 '정동영이 여기 왜 왔느냐'란 식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래서 거기 가서도 반성문을 쓰고 시작했다. 정리해고 체제에 문을 연 민주정부의 과오를 사과하고 '여러분과 함께하겠다'고 약속했다.

한진중공업 사태를 다루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 또 가장 기뻤을 순간을 꼽는다면?

재벌 대기업이 얼마나 사람을, 인간을 하찮게 여기는가를 직접 경험할 때마다 너무 놀랐다. 아무리 돈이 세상을 지배한다 하지만, 사람을 어떻게 볼트·너트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런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힘들었다. 거기에 인간은 없었다. 한진에서 제일 기억나는 것이 크레인 위로 전기 하나 넣어주는 것에 두 달 걸렸다는 사실이다. 6월 27일 크레인 농성자들을 강제로 끌어내리기 위해 법원의 행정대집행이 진행되면서 크레인의 전기를 끊어버렸다. 저녁때가 되면 고공은 특히 더 캄캄하니 정말 위험하다. 생존을 위해 전기는 꼭 필요한 것 아닌가. 인권위에 고발하고, 청문회에서 요구하고, 별수단을 다 써봤지만 전기 하나 넣어주는데 두 달이나 걸렸다. 조남호 회장과 월급쟁이 CEO에게 이야기했음에도 전기 하나 넣는 것이 그렇게 걸린 것이다.

가장 기뻤던 것은 11월 10일 김진숙 지도위원이 살아서 내려온 때였다. 정확하게 다섯 달 전인 6월 11일 1차 희망버스에 참여했을 때, 새벽에 담벼락을 넘어 참여한 시민들과 함께 크레인 앞에 앉아 있었다. 새벽 3시 반 조명 불빛은 휘황하지만 그 주위는 괴괴하고, 그런 상태에서 아스팔트에 주저앉아 있는데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오긴 왔군요. 이런 해방감들이 얼마 만입니까"라는 연설이 35M 고공 크레인 위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제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비틀거릴 때마다 천수보살의 손으로 제 등을 받쳐주신 여러분, 꼭 이기겠습니다"로 마무리된 김진숙 지도위원의 연설은 연설이 아니라 심장을 쥐어짜는 절창(絶唱)이었다. 김진숙 위원이 너무 힘들어서 희망버스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자살을 많이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희망버스가 오고 절망에서 희망으로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저는 우리 조합원들이 혁명적 투지로 무장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키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6개월 전까지 살아왔던 삶을 지켜주고 싶은 것뿐입니다. 저녁이면 땀 냄새 풍기며 집에 돌아가 새끼들 끼고 저녁 먹고 여러분들이 오늘까지 누려왔던 그 소박한 일상들을 지켜내고 싶은 것뿐입니다"라는 김진숙 지도위원의 연설을 들으며 "아, 내가 힘이 된다면 저 여자를 살려내야겠다"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에 '김진숙 살리는 것에 내 정치생명을 걸겠다'고 한 것이다. 결과적으론 정치 생명을 안 걸어도 되었지만 말이다.(웃음)

김정일 급서, 남북관계 그리고 한반도 평화

정말 예상치 못하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했다. 이 상황이 앞으로 한반도에 불어 닥칠 여파가 상당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특별히 정치권이나 시민사회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북한의 특수성 속에서 보면 북한은 김정일 위원장 시대에도 김일성 국가였다. 북한 주민은 김일성 민족이다. 김정은 체제시대에도 여전히 북한은 김일성 국가고, 김일성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나라다. 더불어 북한의 정치 군사 외교 전 분야에 가장 영향력이 큰 나라인 중국의 목표가 북의 안정화다. 이게 중요하다. 유훈 통치는 계속될 것이라고 본다.

최근 애틀랜타 학회에 북측이 참가했다. 남측에서 '김정은이 경제나 군을 잘 아냐'고 물었다. 경제에 대해서는 말을 흐리는데 군은 장악했다고 답한 것으로 알고 있다. 작년 9월 당대표자대회에서 중국 표준에 따라 김정은을 조선노동당 군사위 부위원장으로 앉혔다. 그 후 1년 3개월 동안 김정은의 시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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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지금 현 정부가 김정은 체제에 대한 입장을 아직 밝히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데 이명박 대통령이나 이 정부는 '6.15 남북 공동성명'이라든지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 때 이루어진 성과는 부정하지만, 유일하게 인정하는 것이 1991년 12월 노태우 정부 시절의 '남북 기본합의서'라고 이야기한다. 그 기본합의서에 따르면 김정은 체제는 당연히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기본합의서 1조가 "남과 북은 서로의 체제와 제도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여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어찌 됐건 북이 자신들이 김정은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을 영도자로 추대하고 그 체제를 일단 출발시킨 마당에 이 시간까지도 김정은 체제에 대한 인정 여부에 정부가 입장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가부간에 어쨌든 입장은 선명하고 분명해야 한다. 그 점에서 이 정부가 대북 정책, 한반도 정책과 관련해서 철학이 없다는 것, 이 점이 안타깝다.

특히 조문 정국과 관련해서 한바탕 내홍을 겪을 것 같다. 이 문제가 남북 간뿐 아니라 남남갈등으로 번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정부가 지금이라도 공식 조문단 파견을 결정하면 된다. 공식 조문단 파견을 요구하는 근거는 두 가지이다.

첫째, 김정일 위원장은 이명박 정부가 정상회담을 추진하던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맞이한 급서에 대해 애도를 표하고 조문단을 파견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당연한 일이다. 둘째, 조문은 외교이기 때문이다. 적대적 관계였던 중국과 대만도 양국 최고 권력자 사망 시 서로 공식적인 애도의 뜻을 표시했다. 외교는 철저히 실용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공식 조문단은 남북의 긴장을 푸는 열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한몸이었다. 정부의 공식 조문단 파견 반대에 대해 화답하듯 박 위원장은 국회 차원의 조문단을 반대하고 나섰다. 또다시 남북관계를 반전시킬 수 있는 의미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어 통탄스럽다.

여러 정황상 우리 정부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급서한 후 이틀이 지나고서야 겨우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남북한 간에 핫라인이 사실상 완전히 끊긴 결과가 아닌가 하는데, 전직 통일부 장관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유일한 분단국가에서 국정원의 핵심적인 역할은 정보를 수집하고 접촉하고 대화하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부 들어와서 대북정보기능과 대북 접촉, 대북 대화 기능을 거의 없애버렸다. 결국 정보통신부를 없애서 IT 기술이 후퇴하고 대북 기능을 축소해버리고, 무엇보다 청와대의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사령탑을 없애버린 것, 이런 것이 심각한 문제다. 아무리 전임 정부(참여정부)의 성과를 다 부정한다 하더라도 잘 작동됐던 시스템은 더 발전시켰어야 하는데, 잘 되던 시스템을 전임정부 것이라 해서 이렇게 망가뜨림으로써 국가 비상시에 위기관리에 구멍이 뚫린 것이다.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17년이 지났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이러한 충격적 일을 북한 특별방송, 평양방송을 통해서 알게 된다. 17년의 시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상황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정보를 알았느냐 알지 못했느냐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 근본적인 핵심은 남북관계를 지난 4년 동안 이렇게 차단하지 않았더라면 1년에 수십만 명이 서로 오고 가고 투자하고 정치·경제·군사 문제와 관련해서 빈번한 교류가 있었을 것이고, 이런 상황은 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참여정부 때는 매년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평양과 개성을 오고 갔다. 그리고 권력 핵심부와 소통이 원활했다. 그 이상의 어떤 정보망이 있고, 정보 채널이 있을 수 있는가. 정상회담뿐 아니라 각급 장관급 회담, 그리고 실무회담 그 이외에도 비공식 접촉을 통해서 인적인 교통과 신뢰, 이런 것들이 쭉 쌓여가고 있었다. 그런데 4년 동안 이걸 전부 차단해버린 것이다. 현 정부의 이러한 대북정책은 엄청난 실책이라고 본다.

2012년 대선

2012년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2012년 내년은 어떨 것 같나? 2007년과 다른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나?

서울대 장덕진 교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2011년 올 한해는 '깨달음의 해'였다. 한국, 세계 곳곳의 99%가 더 이상 1%의 지배 전략에 운명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했는데 굉장히 통찰이 있는 말이라 생각한다. 2011년 지구촌이 깨어나지 않았나. 'Occupy Wall Street'나 희망버스나 다 1%의 지배전략에 우리의 운명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의 소산이다. 이러한 깨달음이 행동으로 나타나고, 가시적인 사회 현상으로 나타날 해가 2012년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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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은 신자유주의의 한복판에 있었다. 한국만 깨어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전 세계가 그랬다. 전 세계가 신자유주의가 맞다고 생각하던 상황에서 2010년, 2011년에 들어와서야 그게 아닌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예를 들면 일본의 경우, 자민당 정권이 50년 넘게 이어오다 2010년에 처음으로 민주당으로 정권이 바뀌었다. 이것은 2008년 9월을 분기점으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를 만들겠다는 일본 국민의 선택의 결과이다. 이때 하토야마 총리가 출범하며 정권 교체 전날 뉴욕 타임즈에 "일본의 새로운 길(A New Path for Japan)"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첫 문단이 "냉전이 끝난 이후 일본은 계속해서 미국이 주도하는 시장근본주의라는 풍파에 시달려 왔다. 세계화라는 말로 더 많이 알려진 이 흐름은 자본주의의 본원적인 지향을 노골적으로 추구하며, 사람들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취급한다. 결과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이 상실되었다"로 시작되는데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인간이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말을 읽었을 때, 그 때 받은 충격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우리에게도 민주 정부 10년이 있었지만, 불행히 민주 정부 10년도 신자유주의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 '깨달음의 2011년'이 지나고 다가오는 2012년은 그래서 대전환의 해가 될 것이라고 본다.

그 가운데 본인이 생각하고 있는 역할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무슨 역할이라도 좋다. 첫 번째는 내가 정권을 내 준 책임자로서 속죄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정권을 내주는 과정에서의 잘못한 점과 부족한 점들을 깊이 있게 생각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정치인의 삶이 산속에 홀로 있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장의 문제들을 몸으로 부딪히고, 정책으로 담아낼 수 있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정당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도 민주통합당을 중심으로 해서 의회권력, 정치권력을 찾아오는 데에 나의 역할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에서 김구 선생님의 말씀을 빌자면 '문지기' 역할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대선 출마 계획이 있나?

배가 뜨려면 물이 차야 한다. 말에도 때가 있다. 지금은 그런 얘기 하면 속없는 사람이 된다.(웃음)

지금까지 말했던 노동의 가치가 인정되고, 경제민주화를 통해 보편적 복지국가를 이루는 기초를 만들기 위해선 내년 대선에서의 승리가 무척이나 중요할 텐데, 그 승리의 주인공이 본인이 아니어도 괜찮나?

노동의 가치가 인정되고, 보편적 복지국가를 만드는 것이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가치다. 나의 역할보다는 내가 갖고 있는 꿈을 현실로 펼 수 있다면 언제라도 나 개인의 욕심을 내려놔야지 않겠나. 내 꿈을 이룰 수 있다는데.

자유에 대하여

인터뷰 코너 제목이 자유인이다.(웃음) 정동영에게 자유란?

자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가 생각이 난다. 대학생 때 민청학련 사건으로 내가 유치장과 서울구치소에 몇 달 있었다. 유치장에서 서대문 구치소로 이송되어 가면서 군법회의에 끌려갈 때 호송차 틈으로 반팔입고 활보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것이 자유라는 생각을 했다. 평소에 그냥 걸어 다닐 때는 그 가치를 잘 못 느끼는데 갇혀 있으니까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는 느낌을 강렬히 받았다. 신체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헌법에는 있지만 그 부분에 대한 제한을 받고 나서야 그 자유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지금 우리에게 자유라는 것은 '불안으로부터의 자유'라 생각한다.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노후 불안으로부터의 자유, 자녀 양육비로부터의 자유, 취업에 대한 불안으로부터의 자유 등 아이들부터 청장년, 노인들까지 모두가 불안한, 총체적으로 불안을 안고 사는 사회다. 이렇게 우리를 늘 불안하게 만드는 생활, 좌절, 분노 등 경쟁과 압박이 심한 사회 생활로부터 오는 불안은 우리를 자유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그래서 현재 한국 사회에서 자유를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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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 우리 현실 속에서는 밥과 밥줄의 불안으로부터의 자유가 제일 큰 자유라고 생각한다. 밥줄, 즉 직장을 찾기도 어렵고, 밥줄 자체도 불안하다. 비정규직이 거의 대부분이지 않은가. 밥줄이 끊어지면 그다음에는 추락이고. 또 밥은 복지를 말하는데, 밥이 너무 부족하지 않나. 밥줄인 노동과, 밥인 복지 그 두 가지가 우리는 다 불안하다. 밥과 밥줄, 이 두 가지의 부족에 대한 불안을 어떻게 해소하느냐가 우리 시대의 과제라 생각한다.

청년 정동영

지금까지는 주로 정치인 정동영에 대해서 들어보았는데, 어린 시절 정동영은 어떠했나?

우리 또래 중에서 유치원을 다닐 수 있는 사람은 많이 없었다. 나는 유치원을 다녔으니까 굉장히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17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비바람 부는 고난이 시작되었다. 서울로 와서 어머니와 옷 장사를 했다. 옷감을 떼어다 어머니가 아동복을 만드시면 내가 배달을 했다. 밤새 옷을 만들어 배달 가면 수금한 돈이 나온다. 그 돈을 가지고 재료를 사서 다시 옷을 만들 수 있었는데, 수금이 바로 되는 것이 아니고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 철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책을 보곤 했다. 그렇게 책을 보았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유복하게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 내 자아 형성에 있어서 좋은 환경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꿈꿀 수 있고 자유분방한 성격이 된 것이 그 영향인 것 같다. 그리고 청소년 시절을 어렵게 보낸 것은 단련의 의미였다고 본다.

존경하는 분이 있다면?

아버지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서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청년 같다. 기자일 때 아이들과 같이 보낼 시간이 없었지만 아이들이 나중에 말하길 내가 입에 달고 산 말이 '사랑한다, 아들. 너를 믿는다, 네가 아들인 것이 자랑스럽다'였다고 한다. 그 세 마디로 자기들을 키웠다는 것이다.(웃음) 이 세 마디가 아이들에게 굉장히 자양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은 아버지가 늘 나에게 해주시던 말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인 나를 늘 자랑하고 싶어 하셨고 어린 마음에도 그것이 늘 감사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책무감, 책임감도 느끼게 되었다. 지금 보면 아버지가 훌륭한 교육을 하셨구나란 생각이 든다. 성적이 떨어져도 "잘했어!"라고 해주시고 한 번도 못했다거나 그런 말을 안 하셨다. 어머니께 꾸중을 들을 때도 엄호해 주셨다. 아버지가 늘 내 빽이었다. 그래서 중학생 때 존경하는 인물을 쓰라고 하면 '정진철'이라고 써냈는데, 선생님이 누구냐고 물으시면 아버지라 답해 애들이 웃곤 했다. 그때는 아버지를 존경하는 인물로 쓴 애들이 거의 없더라.

청년 시절 꿈은 무엇이었나?

상록수의 주인공인 박동혁의 꿈이기도 한 '농촌계몽운동'이 꿈이기도 했고, 시인도 되고 싶었고, 인권변호사도 되고 싶었다. 자꾸 바뀌더라. 그리고 기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기자는 했다.(웃음)

청년 정동영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추억, 또는 낭만이 있다면?

연애 시절인 것 같다. 복학생 때 연애도 하고, 또 실연도 당하고 그리고 다시 몇 년 만에 시도해서 결혼하게 되고.(웃음). 연애했던 시간이 청년 시절에 제일 빛나는 부분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애들에게도 20대 때 연애 못하면 나중에 연애하고 싶어도 못하니, 연애하라고 말하곤 한다.

인간적으로 가장 힘들고 외로웠던 시간이 있었다면?

용산 가족들 보면서 그랬다. 문정현 신부님이 미사를 하다가 '저기 있는 저 사람이 책임자다. 정권 뺏겨서 이렇게 되었다' 하시는데 차마 얼굴을 들을 수 없었다. 한순간에 가족의 행복이 깨져버린 것 아닌가. 전재숙 어머니라고 남편은 옥상에서 돌아가시고 아들은 지금 징역 5년을 살고 있다. 그 어머니에게 평범했던 일상이 어느 날 산산조각이 나버린 것 보면서 신부님 말씀처럼 내가 조금 더 잘했더라면 하는 자괴감에 너무 죄스럽고 힘들었다.

정치인이 아닌 한 개인으로서 가장 행복한 시간들이 있다면?

가족들과 요즘 가끔 영화 보러 가고, 될 수 있으면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그런 시간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최근에 도가니란 영화를 같이 봤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답답하더라.(웃음)

정치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다면?

MBC 기자를 17년 동안 하면서 처음으로 눈물을 흘려 본 게 기자 같지 않은 '월급쟁이 기자' 역할을 하다 40여 명 기자들이 모여 노조를 만들었을 때이다. 이 40명이 나중에 6개월 뒤에 1500명으로 되었다. 사장을 2명 갈아치우고 했는데도 노조 운동만 갖고는 언론 자유가 확보되지 않는 걸 보면서 정권이 바뀌는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 근본적인 정치 참여의 동기였다. 그리고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에서 무너진 잔해를 보며 '대한민국이 이렇게 무너질 수 있구나'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때 새정치국민회의 참여 제안이 와서 정치를 하게 되었다.

정동영에게 정치란?

'세상이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란 꿈을 구현할 도구가 정치이다. 내 속에 들어 있는 '내가 세상을 뜨기 전에 분단된 조국이 하나 되었으면 좋겠다'란 꿈을 이뤄주는 것도 정치이고 평범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도 정치가, 정치인이 해야 할 일이다. 내가 영국에도 살아봤고 미국에도 살아봤고 독일에도 살아봤는데, 참 부러운 게 그 나라의 보통 사람들은 걱정이 없던 것이었다. 우리는 걱정이 너무 많다. 결국 정치가 이런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수단과 도구가 아닌가 생각을 한다. 그런 생각으로 (정치에) 참여했고, 그런 생각으로 (정치를) 하고 있다.

또한, 상처받은 자에 대한 공감이 정치의 본령이라 생각한다. 위대한 정치가들은 다 상처받은 시대, 상처받은 사람에 대한 공감 능력이 뛰어났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가 이런 것이다.

지금 가장 바라고 소망하는 것이 있다면?

'2013년 체제', 백낙청 선생님이 쓰신 말씀인데 좋은 것 같다. 87년 헌법으로부터 25년 살고 오늘 주어진 과제는 경제민주화, 경제 주체 간에 조화로운 삶인데 그것을 할 수 있는 2013년 체제를 만들어 내는데 모든 힘을 다해야겠다. 그래서 그 속에서 제2의 김진숙이 나오는 것도 막아야 하고 그것이 정리해고 체제로 인해 20명, 21명째 쌍용 자동차 노동자의 죽음을 막는 길이기도 하고, 제2의 용산 참사를 막는 길이기도 하다. 제2, 3의 이명박 체제가 계속되어서는 이 불행을 끝낼 수 없다. 그리고 그 동시에 아까 가치와 노선을 강조했는데 우리 자신이 그런 세상을 열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시대정신, 그리고 청년에게

희망하는 한국사회의 미래상은 무엇인지, 앞으로 한국 사회를 이끌어갈 시대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현재 한국 정도의 국가적 위상과 부가 축적되어 있는 국가라면 그 구성원들이 행복을 추구할 만한 물적 토대는 갖추어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변의 수많은 서민들은 삶의 질이 떨어지고,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이러한 점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분배에서 정의롭지 못하고, 또 공정한 사회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부와 가치의 배분에 있어서 공정해야 하는데 그것이 왜곡되어 있다. 공정한 사회를 이룰 수 있음에도 그것을 현실로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노하고, 더한 것은 공정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 앞장서야 할 위정자들이 오히려 공정사회를 이루는데 방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우리 국민은 정말 선량한 국민이라고 생각한다. 희망버스를 보아도 그렇고, 우리 국민들은 이웃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갖고 있는, 선한 의지가 충만한 국민이다. 문제는 그것이 중심이 되지 않고, 경쟁이 중심이 되고,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게 만드는 사회가, 사회를 그런 방향으로 이끄는 지도력의 문제라 본다. 제대로 된 제도개혁과 함께 좋은 지도력을 가진 지도자가 나온다면 한국사회는 더 행복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아르바이트하지 않고 학교 다닐 수 있고, 학교 나온 뒤에 취직 걱정 안하고 지낼 수 있고, 충분히 그렇게 만들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는데 안타까움이 있다. 내가 청년 시절에 어머니는 아프시지, 동생들은 돈이 없으니까 학교는 휴학했지, 나는 군대 강제 징집돼서 가 있지,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는데 탈영이라도 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 탈영할 수도 없지. 그때 '국가는 어디에 있는가'란 생각이 들었다. 개인이 불행에 빠졌을 때 국가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돈이 없으면 죽어야 하는 거였다. 참 막막했다. 지금 청년들이 그만큼 막막하지 않을까 싶다. 앞은 보이지 않고 등록금이나 부모를 생각하면 그럴 것 같다.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아까 얘기대로 2011년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깨달음을 실천하려면 연대뿐이라고 생각한다. 연대의 힘! 나 혼자 발버둥친다고 어떻게 바꾸나. 하지만 실제 이런 사람들이 서로 끈으로 연결돼 있는 거다. SNS가 그 가능성을 깨닫게 해주었다. '99%가 연대하는 세상으로 바꿀 수 있겠구나'하는 깨달음이 된 해가 2011년이었다. 내년은 '청년이여 참여하라, 참여하면 당신들이 바꿀 수 있다'라고 말하고 싶다.

(인터뷰 및 정리 : 정치경영연구소 김경미 선임연구원, 조윤경 인턴)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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