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 일본의 사회운동은 대체로 '실패의 역사'로 한국에는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패에서도 배울 점이 있으며, 실패의 역사라는 피상적 인식 이면에서 전개되어온 건강한 운동들은 정체기로 진입해가는 한국 사회운동 진영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런 취지에서 한국의 사회운동을 전공하는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와 일본 사회운동을 전공하는 케이센대학교의 이영채 교수가 일본 사회운동의 중요한 전환점과 위기의 지점들에 대해서 성찰적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활동가나 학자 등을 두루 만나 연쇄 인터뷰를 진행했다. 호사카 노부토(사타가야 구청장), 가와사키 아키라(피스보트 공동대표), 토리이 잇페이(노동운동가), 아하시 마사아키(학자), 요시다 유미코(생협운동 이사장), 우쓰미 아이코(평화운동가), 무토 이치요(신좌파 활동가), 우에무라 히데키(인권활동가) 등이다.
여덟번 째로 일본 '신좌파' 운동의 산증인이라 불리는 무토 이치요우(武藤 一羊) 씨를 만났다. 이번 "3.11은 전후 일본 국가 형성 논리의 파산"은 지난 4일자 "일본 공산당의 폐쇄성이 좌파운동 분열의 원인"에 이은 무토 씨 인터뷰 2편이다. (☞관련기사 바로가기)
편의상 두 교수의 질문은 구분하지 않고 '조희연+이영채(조+이)'로 통일했다.<편집자>
무토 이치요우(武藤 一羊) 무토 이치요우(武藤 一羊)는 일본사회운동의 중심적 인물로 50년대 이후 '신좌파'운동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그는 일본의 '신좌파'운동의 대부라 할 정도로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고 있으며, 50년대 이후 일본 좌파운동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동경대학 일본 공산당 학생조직의 세포 활동을 시작으로 한국전쟁을 경험했다. 일본 공산당에서 첫 활동을 시작했으며 일본 공산당에서 제명된 후, 베트남 반전운동을 이끌며 70년대에는 일본 국제연대운동의 상징적 기구인 '아시아태평양 자료센터(PARC)'를 설립해 대표를 역임했다. 냉전 붕괴 직전의 활동했다. 일본의 아시아 운동과 국제연대 운동의 개척자적 역할을 하며 80년대 말에는 아시아 민중대회를 개최했고, 90년대까지 그 성과를 이어왔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사회적 대안은 만드는 '민중플랜21(PP21, People's Plan 21)'에서 사회 운동을 주도했다. 현재 그는 PP21의 후속 단체인 PPSG(People's Plan Studies Group) 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으며, 일본 아시아 민중연대와 진보적 사회운동을 개척해 온 활동가로 평가 받고 있다. 3.11 후쿠시마 원전사태 이후에는 전후(戰後) 일본의 좌파운동이 핵문제와 원전문제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반대운동을 하지 못한 책임을 피력하고 있다. |
민주주의와 평화를 지키려는 60년대 안보투쟁
조+이 : 앞에서 50년대 중반 일본공산당의 분열 및 반핵운동 속에서 원수협과 원수금의 분열상황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60년 안보투쟁의 의미와 60년대 중반의 한일회담 시기의 일본 좌파의 인식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결국 일본 공산당에서 분리되어 나온 분트(Bund)그룹이 60년대 안보투쟁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이후 그 총괄과정에서 신좌파로 다양하게 분화되어가지요. 그 과정에서 대립의 쟁점에 대해서 주로 신좌파의 인식을 중심으로 설명을 좀 해주시지요.
▲ 무토 이치요우 ⓒ조희연, 이영채 |
무토 이치요우 : 저는 1964년 3월 체포될 때까지 활동했었는데, 당에서는 학생운동 보다 '사회운동'을 하길 원했습니다. 먼저 60년대 안보투쟁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지요. 제 생각으로는 (52년 이후) 점령이 끝났고, 그래서 해방감이 생겼고, 그러한 해방감의 연장선 상에서 표출된 집단적인 힘이 안보투쟁이었다고 봅니다.
그것은 초기 원수협 운동과도 많이 달랐습니다. 즉 원수협 운동은 자발적인 풀뿌리운동의 모임인데, 안보투쟁은 상당한 조직력을 가지고 있었고, 조직적으로 함께 투쟁한 적이 없었던 혁신세력들이 모여서 투쟁한 것입니다. '안보는 오모이(おもい, 무겁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즉 안보는 무거운 주제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무거운 주제가 대중적 투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1959년까지는 안보문제에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준비가 있었다고 한다면, 학습회를 조직하는 정도였습니다. 몇 명의 뛰어난 분석이 나오기도 했고, 각 조직들이 미·일 관계나 안보에 대해서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분트 같은 경우 '제국주의론'을 이야기하기도 했지요.
안보투쟁은 국회에 미·일 안보조약의 비준 거부를 요구하는 대(對)국회 청원투쟁이 중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전학련은 분향투쟁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학련은 국회 돌입을 하게 되었지요. 국회에 진입하는 행동 자체에 정치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대중적인 정치운동으로는 1968년에 프랑스 파리에서도 행동이 먼저 이루어졌고, 행동이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식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행동하는 소수파가 선도하고, 이러한 움직임이 전체를 움직이는 식이었죠. 그런 의미에서 분트는 상당히 만족해하고, 그것을 정치 과정론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했지요.
조+이 : 분트의 정치과정론은 앞선 설명에 의하면, 혁명적 상황이 아님에도 행동에 의해서 정치적인 충격을 줌으로써 역으로 혁명적 상황으로 바뀌게 한다는 논리였던 것 같은데요. 당시 분트의 주장과 지식인들과의 주장은 어떻게 다릅니까
무토 : 분트는 혁명적 정세기가 아니어도 대중에게 자극을 주면, 대중은 혁명적으로 행동하게 된다고 말했죠. 이것을 정치과정론으로 정립했습니다. 하지만 지식인들은 조금 인식이 달랐습니다.
당시 키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년∼1987년, 내각총리, 만주국 충무청 차장, 태평양 전쟁 후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돼 불기소 처리되면서 공직에서 추방당함. 1958년 수상 취임. 60년 미·일 안보조약 개정을 주도 후 사임.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외할아버지)가 수상이었는데, 키시는 '전범'이었고, 만주 출신으로 이미지가 아주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시내각인 도죠 내각의 각료 출신입니다. 그리고 부패문제도 있었고요. 당시 이와나미(岩波) 서점을 중심으로 활동한 지식인 그룹들이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이 키시와 관련해 공동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지식인들과 키시의 관계를 보면, 지식인들은 그가 민주주의를 잘 모른다고 비판했습니다. '민주주의는 고결하고, 평화는 지켜야 한다'는 취지에서 많은 지식인들이 반(反)키시 인사들이 되었고 미·일 안보동맹에 반대하는 인사들이 됩니다.
당시 안보개정 저지 국민회의(1959년 3월, 공산당, 사회당, 총평 등 100여 개 단체가 결성한 공투단체)가 운동의 주축이었는데, 전학련도 참여단체였습니다. 일본 공산당은 참관인으로 참석했죠. 사회당의 호헌연합도 참여하였고, 이들이 사무국을 담당했습니다. 꽤 큰 조직이었지요. 하지만 '안보 비판회(1959년 10월 문화인들을 중심으로 한 젊은 일본의 회합)'라는 또 다른 모임도 있었습니다. 안보 비판회는 지식인 모임이었는데 이시하라 신타로(いしはらしんたろう, 1932년 출생, 현 도쿄 도지사, 1956년 대학 재학 시절 <태양의 계절>로 아쿠다카와 문학상을 받아 문단에 등단. 1968년 국회의원 당선, 1999년 도쿄 도지사 당선, 일본 우익의 상징적 인물로 활약), 에토 준 (江藤淳, えとうじゅん, 1932∼1999년, 일본 문학계 기예의 신진, 게이오대 교수, 대표적인 반미주의자 문학인)등 우파 지식인의 대변인 역할을 하는 이들도 다수 참여하고 있었고, 오에 겐자부로(大江 健三郎, 1935년∼, 1994년 <만연원년의 풋볼>로 노벨문학상 수상, 일본의 대표적인 전후 민주주의의 지지 문학자) 등의 진보적 지식인도 다수가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투쟁 주제는 전체적으로는 민주주의와 평화였습니다. 신좌익의 분트그룹은 혁명을 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지만, 운동 전체의 흐름은 혁명보다는 민주주의와 평화가 중심이었습니다. 이때 민주주의라는 의미는 1945년 이전, 전쟁 전 시대로 복귀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전전(戰前)의 체제로 복귀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종언이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당시 간바 미치코(樺美智子, 1937년∼1960년, 안보투쟁 중 사망한 도쿄대 문학부, 일본 공산당에 가입 후 분트활동을 하던 중 60년대 안보투쟁에 참가)라는 도교대 여학생이 데모 도중 압사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녀의 죽음에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 1910∼1977년, 일본의 중국 문학자, 안보 개정안 강행처리에 항의하여 도쿄 도립대학 교수직을 사직. 노신을 연구,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근대사의 잘못된 지점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연구), 츠르미 슌스케(鶴見俊輔, 1922년∼, 1938년 미국에 유학하여 하버드대에서 철학 전공, 미·일 전쟁 중 무정부주의자로서 미국에서 체포된 적이 있음.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1914년~1996년) 등과 함께 대표적인 진보적 지식인, 베헤련(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 운동에 참가, 9조회 발기인) 등도 비판 성명서에 참여했습니다. 이들은 민주주의의 옹호로 집중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안보 찬성 혹은 반대에 관계없이 민주주의로 뭉치자는 것이지요. 그것은 일종의 사고 대전환이었습니다. 좌파는 미·일 동맹 및 안보저지투쟁을 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 베헤련("ラ平連,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 상징문자 '죽이지 마라' ⓒ무토 |
부활한 제국주의의 지배적 시스템을 문제시한 68혁명
조+이 : 지금 설명은 안보투쟁은 초기 분트의 실력행사에서 칸바 미치코(樺美智子, 1960년대 분트가 학생운동 추동 세력이 되면서 기동대의 과잉 진압으로 당시 22살이었던 칸바 미치코가 사망, 이를 계기로 학생들은 국회로 난입한다)의 사망 이후 민주주의 투쟁으로 전환되었다는 논리인데요. 그러면 다케우치 요시미 등이 주장하는 미·일 동맹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집중하자는 논리는 대중적으로 설득력이 있어야 하는데 분트를 극복하는 영향력이 있었다고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무토 : 그것은 단지 지식인들의 논리였습니다. 그때까지 지식인들이 큰 힘이 있었지요. 당시 지식인들이 쓴 것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대부분이 전위당을 지향하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요시모토 다카아끼(吉本隆明, 1924년∼, 60년대 안보투쟁 당시 전학련 주류파의 핵심 활동, 이후 자립의 사상을 표방한 잡지<시행> 발행, <마루야마 마사오>론 등을 집필, 68년 당시 전공투 세대들 사이에 가장 영향을 준 지식인)입니다. 신좌익은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의 논리는 공산당을 비판하는 또 다른 전위당 노선이었습니다. 일본 공산당이 전위당의 역할을 못한다는 비판이었지요. 공산당 자체가 인정되지 못한 한국과는 다르지요.
일본 공산당에 대해서 비판을 하지만, 일본 공산당의 본연의 임무에 대한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평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 전전으로의 복귀에 대한 반대, 훌륭한 전위당으로서 대중운동에 대해 지도해야 한다는 인식이었습니다. 전위당은 필요한데 일본공산당이 체제에 내화되어 있어 역할을 못하므로, 비(非)일본 공산당의 새로운 전위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분트(Bund, 전학련을 주도했던 학생들이 일본 공산당을 탈당하여 58년에 신좌익조직. 공산주의자 동맹을 의미. 안보투쟁 후 60년에 해체, 66년에 재건하였으나 70년에 해체 이후 세분화 됨. 1847년 런던에 망명한 독일인을 중심으로 결성된 공산주의자 동맹에서 따 옴)는 이런 인식 위에서 성립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신좌익은 모두 '동맹'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당을 만들지 못했지만, 당으로 가는 과정에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지요. 왜냐하면 당시에는 코민테른 적 발상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분트 외에 트로츠키파 등의 혁명조직이 등장하는 것도 이런 인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죠.
물론 이런 인식은 안보투쟁까지만 존재하였습니다. 그래서 전위적 사고방식의 운동은 60년대까지로 끝납니다. 2차대전 시기와 점령으로부터 해방된 이후 다시는 그런 시대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 위에서 폭발한 운동이었으니까요.
그런데 1965년 경부터 새로운 운동이 출현합니다. 지금까지는 미국이 적이고 전전의 지배구조가 적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현재를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제 '현재의 지배 시스템이 문제이고 이에 저항해야 한다'는 발상의 전환이 나타나게 됩니다.
조+이 : 60년대 후반은 서구에서 68혁명이 나타나는 시기이고, 이전의 운동과는 다른 결을 갖는 운동이 출현합니다. 일본의 경우도 그렇게 해석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무토 선생이 책<아메리카 제국과 전후 일본 국가의 해체> 중 '전후 일본 국가와 혁신세력의 해체'에서 68혁명으로 인한 패러다임 전환의 특성을 11가지로 정리한 부분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1)기존의 정당계열 식 운동의 변화 2)자율적 운동의 상식화 3)일상적인 사회관계에서 나타나는 권력의 해체의 추구 그러면서 정치의 재(再)정의 4)개발 및 근대화에 대해서의 비판적 시각의 정착 5)전국 정치투쟁을 보편적 집약점으로 하는 구조(구미다테, くみたて)로부터 개별과제(이슈) 별 운동으로의 전환 즉 매크로 운동으로부터 마이크로 운동으로의 전환 6)종적인 강고한 조직으로부터 네트워크형 조직으로의 전환 7)감성적인 해방 등을 열거했습니다. 실제 일본의 68에서는 이런 특성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궁금합니다.
▲ 무토 이치요우 책<비전과 현실> ⓒPP21 |
구체적으로는 동맹 휴업을 선언하고 전체가 투표를 해서 결정하고 집행하는 운동을 했습니다. 당국이 금지하기는 했지만, 대학 자체를 지켜야 하고, 대학은 자치라고 하는 생각을 1965년 이전에는 모두가 했습니다. 여기에는 학교 측은 우리 편이라는 인식이 있었지요.
그러나 1965년 이후 대학 자치라고 하면, 그것은 교수의 자치라고 인식하게 됩니다. '교수가 학생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대학 자체라는 것이 사회 내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라는 식으로 문제설정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대학에 진보적 교수가 많고 논문이나 잡지를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싸우는 학생들을 쉽게 처분해버리고 제명하지 않았는가', '예컨대 동경대는 역대 제국주의의 리더를 배출해 온 기구가 아닌가' 하는 식으로 문제제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전과는 문제제기 방식이 달라졌지요. 이전에는 권력과 싸울 때 내각의 어느 부서에 권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대학을 지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대학의 제도 내부에 권력이 있고, 교수와 학생 간에도 권력관계가 있다는 식으로 발상이 바뀐 것이지요.
이것은 일본의 체제변화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일본이 경제적 복구의 시기일 때는 사람들의 인식을 흡수할 수 있었습니다. 60년대 후반이 되면 일본의 지배체제 자체가 자립을 하게 됩니다. 정보경찰에 의한 통치 시스템이 아니라, 조직화 된 사회 자체가 권력 메카니즘으로 바뀌는 사회시스템의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고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 전에는 '지켜낸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지금은 '부셔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난 것입니다. 현재의 시스템을 방어한다는 인식과는 반대로 이를 부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난 것이지요.
베트남 반전의 시민운동과 폭력혁명론의 혼재
조+이 : 새로운 인식은 이해가 가지만 그게 대중적인 운동으로 전개된 배경은 무엇입니까?
무토 : 왜 그렇게 대중운동으로 확대되었는가. 거기에 베트남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전의 와세다 대학(1965년 등록금 인상 거부투쟁)이나 게이오 대학(1964년 공학부를 중심으로 등록금 인상 반대투쟁을 조직하여 건학 이래 최대의 학생운동을 조직)의 투쟁이 선도적인 투쟁사례로 존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투쟁에서는 등록금 반대투쟁이 있고, 산학공동협력에 대한 반대투쟁이 있었습니다. 기업이 대학을 동원하는 시스템에 대해서 거기에 학생이 만족하면서 취업해 들어가게 되는 것 자체가 억압구조가 아니냐는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평화운동도 이런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베헤련("ラ平連,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 60년대 중반에 결성된 일본의 대표적인 베트남 반전 평화 운동 단체)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예컨대 안보투쟁은 거대조직이 주도했죠. 하지만 베헤련은 오다 마코토(1931년∼2007년, 일본의 작가, 9조회의 제안자, 베헤련 운동의 창시자) 씨 등 시민파 지식인들이 리더를 했지만, 훌륭한 강령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위계적인 거대조직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베트남에 평화를! 베트남은 베트남 사람들의 것으로! 일본은 베트남 전쟁에 협력하지 마라!'는 3가지 슬로건에 찬성하고 행동하면 다 베헤련이었습니다. 무슨 베헤련, 무슨 베헤련 등 지역에 300개 이상의 독자적인 베헤련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중앙에는 본부가 없었습니다. 실제는 동경 베헤련이 사무국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고, 오다 마코토가 중심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전위적인 지도자는 아니었습니다. 모두 평등하게 참여했지요. 그런 의미에서 60년대 안보투쟁과 베헤련은 다른 운동이라고 저는 해석합니다.
68혁명 과정은 유럽의 운동의 영향이 컸는데 일본의 68은 일본 사회의 내부 변화에 크게 기인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이 : 오다 마코토는 종전(終戰) 직전 연합군의 공습을 받은 기억이 미군의 베트남 폭격장면을 통해서 되살아났다고 했습니다. 무토 선생의 경우 전전(戰前) 아버님의 만주국과의 관련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셨는지요? 1965년∼68년에 대중적 운동으로서의 베헤련 운동 관계자들 속에는 전전 일본의 기억이나 시대변화에 공유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지 않나 싶은데요? 특히 젊은층의 참여가 돋보이는 것도 그렇고.
무토 : 사람에 따라서 동기는 제각각 이었기에 전전의 기억과의 연결도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특히 젊은층은 혼다 가츠이치(本多勝一, 1932∼, <아사히 신문>의 스타기자로서 베트남 전쟁 르포기사를 연재, 1993년 <주간 금요일>이라는 진보적 잡지 창간)의 책이 많은 영향을 주었어요. 당시는 뭐, 특별한 사상적 경향성이나 지향을 가졌다기 보다는 오히려 앞서 이야기한 대로 행동을 먼저 하고 그것이 후속 변화를 동반하는 식이었던 것 같습니다.물론 당시 뭔가 공유되는 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로 통일된 것은 아니었지요.
특성이 있다면 60년 안보투쟁 이후 여러 섹터로 분화된 신좌익이 자극을 주었습니다. 1969년 11월 16일 하네다 공항 점거(사토 수상의 방미를 저지하기 위해 신좌익에 의한 공항 점거 투쟁, 사상 최대인 2500여 명 이상 체포됨. 이후 60년대부터 지속되어온 학생운동의 고양기(高揚基)가 끝남)하는 투쟁이 있었습니다. 당시 사토 수상이 미·일 안보조약 개정을 위해 미국으로 가는 것을 저지하는 운동이었습니다. 1951년 안보조약 성립 이후 좌익의 대응은 그렇게 활발하지 않았습니다. 원자력 잠수함이 일본 근해에 오면 투쟁을 했지만, 많은 통제를 받으면서 제약된 형태의 운동이었죠.
예컨대 30명이 데모를 하면 100명이 포위를 하는 식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기동대를 타격하지 않으면, 기동대가 보호하고 통제하는 속에서 운동을 전개하게 되는 식이 되어버리게 됩니다.대나무 창을 가지고 기동대를 쳐내지 않으면 데모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지요.기동대가 허용하는 정도의 데모는 신문에 나오지도 않고, 무시당해 버리고요.사토 수상의 방미를 저지하고자 한다면, 기동대와 부딪쳐서 기동대를 실제로 패배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당시 삼파전학련(1966년 9월 제2차 분트가 결성되고, 중핵파와 분트의 학생조직인 사학동과 사회주의 청년동맹의 해방파가 만든 삼파전학련, 중핵파가 실권을 장악),트로츠키계인 중핵파, 사회당계의 해방파, 분트 등이 주로 저지투쟁을 했습니다.
▲ 베헤련. 오른쪽 두 번째가 오다 마코토 ⓒ무토 |
조+이 : 일본의 좌파운동내부의 폭력성이 이 시기에 많이 표출된 것 같군요. 이것에 비교하면 베헤련 운동은 매우 평화적인 시민운동의 지향성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데요.
무토 : 당시에 폭력적으로 경찰에 대항해서 투쟁을 하게 되니까 '왜 이렇게 폭력적으로 운동을 하는냐'는 비판이 일었습니다. 또 반대로 이런 정도의 '폭력'이 아니면 아무것도 못한다는 지지여론도 있었습니다.
한편에서는 폭력적 투쟁이 난무하는 속에서 뭔가 새로운 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당시에는 무엇이든지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고요. 요시카와 유이치(吉川勇一, 1931∼, 일본 공산당 출신으로 1965년 원수협 세계대회의 방침에 반대하여 제명당함. 이후 시민운동가로 변신, 베트남 반전 평화운동의 사무국장 역임)와 저를 비롯해서 좌익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외부에서는 학생들의 폭력적인 투쟁에 대한 우려감이 있었던 상황이었지요. 학생들의 섹터운동에 동조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헤련과 같은 열린 장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베헤련 운동은 65년부터 시작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베헤련은 출범 초기인 1965년부터 '탈주병'을 지원하는 운동을 하였습니다. 10월 8일이 하네다 공항 점거 투쟁이었는데, 연이은 탈영병 지원운동이 일본 사회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탈영병 지원운동이란, 베트남 전쟁 반대 탈영병을 해외로 망명시키는 운동이었지요(60년대∼70년대 베헤련은 주일 미군기지의 미군들의 반전운동을 지원했고 탈영병을 해외로 망명시킴. 그 실체는 아직 명확히 파악되지 않음. 최초의 탈영병은 미 항공모함 인토레비트호 4명의 해군으로 오다 마코토, 츠루미 신슈케 등이 소련을 경유해 스웨덴으로 망명시킴).스웨덴에 망명을 시키고 일본 교육회관에서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당시 500여 명의 기자가 모였는데, 우리는 탈영 미군을 소련을 경유해 스웨덴으로 보냈다고 발표했습니다.당시 소련이 미군을 스웨덴으로 보내주겠는가 하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소련 경유를 밝혔습니다. 그것이 사회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몇 백 명이 데모를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실질적인 지원활동을 하려고 했습니다.
스타일은 다르지만,전학련 등의 폭력적 투쟁과 베헤련 투쟁 사이에는 무엇인가가 공유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현재를 방어하는 입장이 아니라, 지금이 문제라는 인식이죠. 안보투쟁이라는 것은 전후를 통해서 쟁취된 평화가 위기에 처해 있었기에 지금을 지켜내는 것이었죠. 베헤련이나 전학련은 지금이 문제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지금 일본 국가와 사회는 미국의 편이 되어서 베트남을 죽이는 입장에 서 있다고 하는 해석입니다.
당시에 베헤련의 슬로건이 '죽이지 마라'라는 광고였습니다. <뉴욕타임스>에 광고를 내기도 했습니다(1965년 11월 16일 <뉴욕타임스> 전면광고는 내외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킴). 반전광고를 내는 것이 사실 처음 활동이기도 했습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 1935년∼, 동경대 프랑스 문학과 졸업, 1958년 재학 당시 <사육>으로 최연소 아쿠다가와 상 수상,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영향을 받은 작가로 알려짐. 전후 민주주의 지지자. 핵 및 국가주의의 문제, 지적장애의 문제 등을 사회적으로 제기함), 카이코 겐(開高健, 1930년∼1989년, 문학가, 60년대 중반 <아사히신문> 임시 특파원으로서 베트남에 파견, 남베트남의 실상을 전달. 베헤련에 참가하였으나 반미·좌파 경향에 반발하여 탈퇴한 이후 우익 문화인으로서 변신)이 <뉴욕타임스> 광고를 제안했습니다. 당시에는 새로운 스타일의 운동이었지요. 보통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수단을 사람들에게 제공한 것이었습니다. 전국적으로 최소 500엔을 모으는 방식으로 했는데, 봉투에 넣어서 보내주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몇백만 엔을 모금할 정도였지요.
그것은 국제적 연대활동이기도 했지만, 풀뿌리운동으로도 이런 운동을 할 수 있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다른 쪽에는 혁명적 입장에서 기동대와 가두에서 싸우는 섹터운동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베헤련 식의 운동이 있었던 셈이지요. 베헤련은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현재의 체제를 비판하면서 싸우는 셈이었습니다.
주변부의 반란으로서의 산리즈카와 미나마타
조+이 : 70년대 전공투 투쟁은 60년대 후반의 이런 새로운 운동과는 어떤 관계를 갖습니까.
무토 : 70년대 전공투 운동은 이런 60년대의 투쟁을 이어받으면서 현재의 지배 시스템의 '범죄성'을 문제 삼고, 일상생활 속의 권력을 문제 삼는 식으로 투쟁을 이어나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권력과의 투쟁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의 투쟁은 역시 산리즈카 투쟁과 반공해운동이었습니다. 산리즈카 공항이 결정된 1967년이고,미나마타 공해 투쟁은 60년대 후반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일본 사회운동에서 매우 상징성이 큰 투쟁이었습니다. 당시 이러한 풀뿌리 공동체의 반란이 전국 여기저기서 일어나게 됩니다. 특히 공해문제는 운동의 중심을 총괄할 수 있는 의제였습니다.
공해문제에도 당시에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주변화 된 코뮤니티에서 다양한 운동들이 일어났습니다. 도시의 인텔리가 아니고 어민, 농민, 도시주민, 빈민들이 중심이 되는 다양한 운동들이 일어났지요. 반(反)원전운동도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생태운동이라고 하는 성격이 있었지만,형태로 보면 풀뿌리 지역운동이라는 성격을 가졌다고 봅니다. 이런 것이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반의 투쟁이었습니다.
일본의 1968년은 도시의 지식인 중심이라면, 70년대의 운동은 주변화 된 사람들의 반란운동으로 시작된 것이라고 할까요. 처음으로 개발의 문제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습니다. 시스템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과 제국주의적 생활방식에 대한 문제의식도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가 곧바로 결합한 것은 아니었지만, 서로 상호영향을 미치고 있었지요. 그 중심에 산리즈카의 나리타 공항 반대투쟁이 있었고, 미나마타의 공해투쟁이 있었던 것입니다.
▲ 산리즈카의 나리타 공항 ⓒ노동정보 |
우먼리브운동과 오키나와 복귀문제를 둘러싼 갈등
조+이 : 전공투 투쟁 이후 70년대 중반의 사회운동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요.
무토 : 당시에 다양한 운동들이 분출했는데 서로 다른 운동을 해 왔던 사람들이 같은 운동을 하지는 않지만 서로 동지라는 인식이 싹튼 것 같아요. 그런 과정에서 출현한 것이 '우먼리브운동(Womens liberation, 일본에서는 베헤련 운동 및 전공투 시기에 1970년 11월 14일 제1회 우먼리브대회가 열려 남녀고용균등법 제정에 큰 역할을 하였다)',즉 여성운동입니다.전후 여성운동과는 다른 운동으로 출현한 것이지요. 일본의 페미니스트 운동의 '제2파'의 흐름이라고 할까요. 동경대 운동이 패배한 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됩니다.
▲ 신좌파 잡지 <임팩션> 특집 '전공투에서 리브 운동으로' ⓒPP21 |
출입국 관리체계에 대한 큰 틀의 반대운동을 저희도 했지만, 구체적인 어떤 지원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일본의 좌파는 제국주의에 반대하지만, 제국주의 희생자들과의 연대는 하지 않고, 자신의 발밑에서 이루어진 폭력에 대해서는 둔감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당시 일본에는 '부락민 차별 철폐운동'(1969년 부락해방동맹 등 제(諸)운동 세력들의 통합으로 동화대책사업 특별조치법을 성립시켜 지원활동이 시작됨. ☞ 일본 시민외교센터 대표, 우에무라 히데키 인터뷰 "'단일민족' 신화 해체야말로 한일 소수자 인권운동의 과제" 참고)이 있었지만, 이런 문제에 둔감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것들은 당시의 일본 사회를 근본으로부터 의문시하는 운동이었습니다.그러한 흐름들이 큰 운동을 만들고,큰 조류가 되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다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학생운동도 실패했다고 할 수 있고요. 베헤련은 꼭 그렇게 패배했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요.왜냐하면 그렇게 무리한 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사실 베헤련에 기초한 운동은 지금도 지역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조+이 : 1972년에 오키나와와 본토로 복속되는데요. 오키나와 문제는 70년대 운동과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무토 : 당시 오키나와 문제는 큰 이슈였습니다. 특히 오키나와 문제는 본토인 야마토(大和, 일본 민족의 다른 명칭. 원래는 왜(倭)라고 적었지만 야마토로 변경. 야마토 민족이 나라 현의 수도를 장악한 것이 계기)와의 관계 설정의 문제가 있었고, 연대는 사실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1952년 그리고 그 이전부터 오키나와 문제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오키나와를 점령하고 통제해 왔는데, 미군의 오키나와 점령이라는 것은 일본의 비무장이라고 하는 전제 위에 서 있었습니다. '미국이 오키나와를 점령하고, 본토는 비무장한다' 즉, 평화헌법 9조를 유지한다는 논리 속에 오키나와 점령이 전제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본토의 운동은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최근에야 이러한 연관을 인식하게 되었죠. 오키나와도 평화헌법 9조로 돌아간다는 인식은 미군 기지를 제거하고 복귀하는 소위 '반전복귀'라는 형태이지요.
70년대의 운동에서는 반전, 특히 반(反)베트남 전쟁이라는 문맥에서 오키나와 미군기지 문제를 쟁점화했습니다. 왜냐하면 오키나와에서 미군이 베트남을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본토에 오키나와가 복귀함으로써 이러한 미군의 기지를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당 및 공산당, 그리고 총평은 헌법 9조가 오키나와의 희생 위에서 서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들도 오키나와 투쟁을 해 왔습니다. 이들은 배를 가지고 아마미 오시마(奄美大島, 규슈 남방 해상의 섬)의 제일 남쪽에 있는 여론도(아마미 오시마 제도의 한 섬)에 대고서 오키나와에서 온 배와 만나서 서로 손을 흔들면서 '오키나와는 우리들의 것이다. 오키나와를 돌려줘'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일본 본토의 주류운동 속에 '일본 본토가 오키나와를 무리하게 합병했다'는 인식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미국에 오키나와를 양도한 것도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단지 미국의 점령을 비판만 하는 형태였습니다. 중핵파를 포함해서 혁명적인 그룹들도 미국으로부터 오키나와를 탈환한다는 문제의식만 있었지, 오키나와의 독립 및 해방이라는 문제의식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1972년 본토로의 복귀문제를 중심으로 처음으로 일본의 사회운동이 국내 식민지로서의 오키나와라는 인식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본이 오키나와를 처음 식민지로 만들었고, 그 이후에는 미국이 오키나와를 식민지로 만들었다는 인식이죠. 최근에는 사회운동 속에서 이런 인식들은 보편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 2006년 3월 10년만에 대집결한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전 집회 ⓒ노동정보 |
주류운동의 패배가 불러온 비주류의 패배
조+이 : 70년대 운동의 패배는 이후 사회운동 전체에 미친 영향이 컸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70년대 운동의 패배의 원인은 무엇이었다고 보십니까?
무토 : 70년대 중반 이후 '사회운동이 왜 극단적인 패배의 방식으로 나타났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측면을 생각하게 됩니다. 운동이 제기하는 이슈들은 다양했는데 각각 가능한 해결방식의 수준이 너무 달랐습니다. 짧은 기간에 해결할 수 없는 것도 많았는데,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제기해서 그것을 과격하게 추구하면서 실패한 경우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시점에서는 운동의 전환을 해야 했었는데, 그 전환 방법에 대한 지혜가 부족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전공투 운동이라는 것은, 대학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느냐는 문제제기를 했지요. 동경대는 동경제국대학을 해체하자는 요구를 했습니다. 동경대라는 것이 사회 속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인재를 재생산하는 기구라고 한다면, 그것을 해체하고자 할 때 그것은 캠퍼스 점령으로만 안 됩니다. 사회적으로 해체운동을 해야 하지요. 학교 밖의 운동과 연결되어야 하고, 밖에 그러한 해체운동이 없으면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런 운동이 없었습니다.
대학투쟁이 실패한 다음에 학생 운동가들이 공장으로 간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는 너무나 자본의 힘이 너무 커서 많은 노동 운동가들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학생운동은 이처럼 사회전체를 바꾸어야 하는 과제를 내걸고 마치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투쟁했던 것이지요.
이 시기 운동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한 경우는 생협(연재 제5회 동경생활클럽 이사장 요시다 유미코 참조)의 경우를 들 수 있겠습니다. 생활클럽(세이카츠 크라브)의 경우 사회당 좌파에서 나온 세력이고, 그린 COOP는 쿠슈 지역의 전공투 세력입니다. 이이다 코프는 공산당 계열이지요.
또 하나 일본 운동의 몰락과 패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좌익 주류파와 그에 대한 반대파가 대립하면서 서로 공생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1955년 이후 주류파는 위력적인 세력으로 존재했습니다. 사회당, 총평 같은 블록이 있고, 일본 공산당이 어느 정도의 연합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주류라고 할 수 있겠지요. 거기에 지식인들이 어느 정도의 대변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주류의 사상적 기반과 힘은 마르크스주의였습니다. 여러 가지 성격과 지향의 마르크스주의라고 말할 수 있지만, 55년 이후 마르크스주의의 우위성이 좌익운동 내에 존재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65년 이후의 운동은 주류의 좌익운동에 대한 반대파들이 주도하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헤련 운동은 그 반대라는 의미를 그래도 적게 가진 운동이었지만요. 학생운동 섹터 운동은 주류 좌파 정치세력에 대항하는 반대파였습니다. 주로 일본 공산당에 대한 반대파였다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이 반대파는 주류파에 반대하면서도 그들에게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주류파가 없어지면, 자기 존재기반이 없어지는 것이지요. 이것이 딜레마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80년대 이후 이들 주류파가 점점 해체되더니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반대파도 힘을 잃어가게 되었고요. 80년대 중반의 국철 민영화, 후반의 총평해체, 그리고 90년대 사회당의 해체 등에 의해서 주류파가 해체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노동조합 운동에서의 주류에 대한 반대파는 의미가 조금 달랐습니다. 그들은 일정하게 사회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대파들은 정치적인 힘은 없지만, 미력하나마 일정하게 선거에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장 투쟁론과 혁명 근거지론이 불러온 운동의 신뢰성 파괴
조+이 : 70년대 전공투 운동은 이후 운동의 패배로 이어지고 이는 73년 연합적군 사건과 같은 돌발적인 형태로 표출되는데요. 왜 이 시기에 급격하게 운동이 패배의식으로 전락하게 되는지요. 그 과정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해주시지요.
무토 : 70년대 중반 이후 일본 운동의 하락과 패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여러 섹터운동이 있었고 전국 정치투쟁이라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사토가 방미할 때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전국적 동원이 이루어지고, 공동으로 정치투쟁을 했습니다. 전국투쟁위원회가 이것을 주도하는 형국이었죠.
그리고 전학련에는 행동위원회가 있는데, 그 내부에서 각 섹터가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섹터는 투쟁을 하다보면,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하는 강박관념이 있었습니다. 병기를 가져와야 하고, 전쟁하듯이 적과 싸워야 하고, 주민을 조직해야 했습니다.
분트 계열 중 일부는 결국 연합적군파(70년 안보투쟁을 계기로 나온 공산주의자동맹의 최 좌익그룹인 적군파에서 분리된 분파. 일본 국내에서 혁명거점 투쟁을 주장했으나, 71년∼72년에 걸쳐 산악캠프 린치사건과 아사마 산장 인질사건을 주도함. 요동호를 피랍해서 북한으로 이동한 요동호 그룹과 팔레스타인에서 해외 혁명거점 투쟁을 벌인 일본 적군파와 구별됨)을 결성하게 되는데, 그들은 실제 무장투쟁을 하려고 했습니다. 연합적군의 과격한 행동은 탄압을 받게 되었고, 더 과격하게 되면서 궁지로 몰리게 됩니다. 준(準)전시체제로 싸우는데, 전략은 거의 없었지요.
또 하나는 혁명 근거지론입니다. 일본만을 바라봐서는 안 되고, 세계혁명의 일환으로 연대하기 위해서는 전 세계의 혁명근거지를 지지하고 옹호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요도호를 납치해서 평양으로 가는 요동호 그룹(1970년 3월 31일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 9인이 일본 항공 요동호를 납치하여 북한에 착륙시킨 사건의 그룹을 명칭. 승객은 후쿠오카와 서울에서 석방됨. 북한이 망명을 받아들였으나 미국에 의해 테러국가로 지정됨. 실행자 3인은 북에서 사망, 2인은 일본에 귀국하여 유죄판결, 4인은 북한에 체재 중)이 결성됩니다. 또한 팔레스티나와 연대하는 아랍적군파(1972년 5월 30일,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항에서 일본 적군에 의한 공항 난사 사건을 일으킴. 최고책임자 시게노부 후사코(重信房子)가 2000년에 체포, 2001년에 옥중에서 일본 적군의 해산을 발표, 2009년 6월에 <산케이신문>에 인터뷰 게재)도 결성됩니다.
이들 전투적인 섹터는 좌파 전체로 보면 주류는 아닌데, 일부 영역 내에서는 강력한 영향을 준 것이 사실입니다. 결국 운동이 갈 데가 없는 한계에 봉착한 상황에서 최후의 혁명근거지의 건설이라는 논리로 나아가게 되었지요.
좌익 혁명론에는 전위당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당시 모든 좌파세력들은 모두가 유일 전위당론에 서 있었습니다. 자신만이 존재하는 하는 유일한 것이 여러 가지 존재하고 있는 형국이지요. 혁명을 위해서는 유일 전위당이 필요한데, 모두가 다 '자신들이 유일한 전위당이다'라고 생각하면, 반대파는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지요. 그러다 보니까, 자신들의 유일 전위를 방해하고 있는 반대파를 살해하는 우치게바(내부폭력, 독일어 'Gewalt' 위력, 폭력에서 유래. 일본의 신 좌익운동 내에서 좌익 당파 간의 린치 및 테러 등 폭력을 이용한 내부 투쟁의 의미. 기동대 등 국가 권력에 대한 폭력은 소토게바(외부폭력)라고도 불림)라는 극단적인 내부 투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치게바의 명분은 유일 전위 정당론이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무장폭력에 의해 경찰에 쫓겨 소수화되면서 결국 권력과 싸우지 못하고, 자기 세력과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같은 트로츠키파라고 할 수 있는 중핵파는 자신의 분파인 가쿠마루(일본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혁명적 마르크스파. 약칭 가쿠마루파)를 스파이라고 하고, 가쿠마루는 중핵파(1959년에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전국위원회, 약칭 중핵파(中核派))를 스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따라서 자기들이 반대파와 싸우고 그들을 죽이는 것은 동지가 아닌 공안과 국가 권력에 대항해서 싸우고 죽이는 것으로 정당화되었습니다. 공권력과 싸우고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킨 것이지요. 이러한 행위는 조직의 존립 근거를 정당화하기도 했습니다. 긴장감이 없으면 조직은 해체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것은 전체 운동의 신뢰를 추락시키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연합 정치투쟁에서 이런 우치게바 같은 행위를 하는 섹터가 참여해 어느 한 섹터가 신뢰를 잃어버리게 되면, 전체 정치투쟁도 신뢰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연합 정치투쟁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게 되고요. 이러한 영향으로 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전국 정치투쟁은 전개되지 못하고 개별 섹터투쟁만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려갑니다. 상황 자체가 전국 정치투쟁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지요. 전투적 투쟁을 하는 자신의 운동 역량도 소진되고, 그들이 참여한 전국 투쟁도 파괴되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결국에는 섹터와 그 주변의 운동 관계자들만 남게 됐지요. 점차 국가의 정책에 대해서 전국 공동투쟁은 없어지고 오히려 그런 공동투쟁을 기피하게 되어버렸습니다.
▲ 전공투 시대 신좌익 헬멧 ⓒPP21 |
스탈린주의의 모순에서 기인한 우치게바와 혁명적 폭력의 정당화
조+이 : 한국에도 무장 혁명론이나 폭력 혁명론이 존재했지만, 우치게바와 같은 극단적인 행태로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단순히 비교하기는 그렇지만, 농담으로 '한국은 선비의 나라이고, 일본은 사무라이의 나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치게바는 일본 고유의 특성인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는데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무토 : '연합적군파의 폭력이나 가쿠마파와 중핵파의 우치게바의 폭력을 개별사례로 보아야 하는가, 일본 좌익 전체의 문제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쟁점이겠지요. 정치적 투쟁 과정에서의 갈등을 폭력으로 해결하는 경우에도, 중핵파가 선택한 우치게바라는 폭력의 행위와 아사마 산장 캠프사건(연합 적군 산악 캠프 린치사건 : 1971년 12월 말∼2월 말, 무장투쟁노선을 표방하여 경찰에 쫓기던 연합 적군파는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산악에서 공동 군사훈련을 전개하던 중 '총괄'이라는 이름으로 개개인의 자아비판을 강요하였고, 집단 폭력을 동원한 처벌로 30명 중 약 12명을 살해한 사건)에서 12명을 죽인 폭력행위는 성격이 다른 것 같습니다.
캠프에서 동료를 죽인 사건은 일종의 혁명적 모럴리즘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즉 진정한 공산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인격적인 성숙을 해야 하고, 공산주의적 인간형을 만들어가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데 이것을 '총괄'이라는 이름으로 실행하게 됩니다. 그 속에서 모럴적인 순환구조가 만들어지게 되지요.
문제는 이 모럴적인 순환구조 속에서 그것은 가능하면 철저하고 가혹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결국 공산주의적 인간형을 만들려는 철저함이 그곳에서 낙오되는, 바람직한 행위를 하지 않는 동료를 처형하는 행위로 나타나게 된 것이지요. 처형은 패배적인 죽음이라는 식으로 총괄을 하게 됩니다. 일종의 극단적인 모럴 순환구조 속에서 동료를 죽이게 되고요.
이와는 달리, 우치게바는 자기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 동료를 죽이고 다른 조직을 적으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혁명에 성공하기 위해서 혁명 일탈세력을 죽이는 행위이지요. 이것은 일본 좌익운동 전체의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 원류는 소련 공산당이고, 스탈린주의 문제에서 발원된다고 봅니다.
조+이 : 신좌익은 본래 반(反)스탈린을 표방하고 출발하였는데, 왜 스탈린적인 모습으로 돌아갔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데요.
모토 : 스탈린주의에 대한 이해방식의 문제이겠지요. 스탈린주의를 세계 혁명의 포기와 일국 사회주의 고수로 생각하면 신좌익이 반(反)스탈린주의적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사실 신좌익의 정치적 행위는 스탈린주의와 동일한 점이 많았어요. 혁명의 형태만을 스탈린주의라고 할 수는 없어요. 정작 자신들의 행위가 스탈린주의적이라고 하는 것을 인식하지는 못한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중핵파와 가쿠마루는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계열(革共同, 50년대 일본 공산당의 무장투쟁노선에 대한 비판과 1956년 스탈린 격하운동을 배경으로 일본 트로츠키 연맹의 전신인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의 탄생으로 신 좌익운동을 주도. 반 스탈린주의를 내세운 쿠로다 칸이치를 중심으로 59년에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전국위원회, 약칭 중핵파)를 결성. 63년 쿠로다파가 분열하여 중핵파에 대항한 가쿠마루파로 독립)이고, 제4인터 계열과는 또한 다릅니다. 제4인터파는 소련을 '타락한 노동자 국가'라고 규정합니다. 그렇게 보면 소련은 타도대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혁공동(革共同)은 소련을 타도대상으로 봅니다. 제국주의와 스탈린주의의 유착에 의한 세계 지배체제가 소련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80년대 국수주의와 글로벌주의의 동시진행의 시대
조+이 : 80년대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가 보지요. 80년대 일본 사회는 통상국가를 지향하면서 대외팽창이 두드러진 시기이기도 한데요. 당시의 시대인식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무토 : 80년대에는 70년대 운동의 여파가 아직은 남아 있었습니다. 80년 초에 나카소네 내각(1982년∼87년)이 등장했는데, 그의 등장은 위험하다고 모두들 생각을 했습니다. 나카소네 내각은 취임 직후, 전후(戰後) 국가의 청산을 표방하면서 개헌론을 들먹였습니다. 그는 '천황은 빛나는 태양이다'라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당시는 제가 아시아 태평양 자료센터(PARC : Pacific Asia Resource Center, 베트남 반전운동 이후 아시아 민중과의 연대를 목표로 설립된 시민단체, 1973년 설립)에 있었는데, '나카소네는 정말 위험한 인물이다'라고 전후 보상문제를 연구하는 우츠미 선생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카소네를 어떻게 특징지을까' 고민하고 있었던 거지요.
나카소네 시대는 국수적인과 국제적인 것의 동시진행형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를 들면 나카소네는 선거운동을 할 때 '이 헌법이 있는 한 일본 전후는 끝나지 않았다. 이것은 미국이 만든 헌법 때문이다'라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습니다. 그런데 나카소네는 당선 후 미국에 가서는 정반대로 "일본은 경제적으로 소련을 봉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일본으로 날아오는 소련의 미사일을 격추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시는 미·일 경제마찰이 일어나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는데요. 그래서 '나카소네가 어떤 놈인가'하는 식의 논의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국수주의자이고 민족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글로벌화가 진행되고 있던 시기이고, 세계가 글로벌화를 지향했던 시기였지요. 영국에서 대처 수상이 등장하면서 대체로 유사한 정책을 썼습니다.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일종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시작되는 시기였지요. 사회운동진영에서는 이 시기를 어떻게 분석하고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논쟁이 있었습니다. 당시 <신(新) 지혜>라는 저널에 제가 장문의 정세분석 논문을 실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 때는 일본 자동차가 미국을 석권하던 시기였습니다. 미국에서 일본 제품 불매운동도 있었던 시기입니다. 미국의 자동차공장 노조원들이 도요타, 닛산 자동차를 망치로 부수는 퍼포먼스가 행해지기도 했습니다. 이 무렵 미네소타의 포드 공장에 갔는데, 좌파 노조가 강성이었습니다. 공장 입구에 'Hungry? Eat Japanese Car(배고파? 일본산 자동차를 먹어)'라는 구호가 적혀 있었습니다. 이런 미국의 반일감정에 대처하기 위해, 나카소네 내각은 1인당 100달러 씩 미국 제품을 사라고 권유하기도 했습니다.
조+이 : 결국 일본은 1985년의 플라자 합의에 동의해 그것이 일본의 사회변화를 가져오는 요인이 되는군요.
모토 : 그렇습니다. 1985년에 '플라자 합의'(미국 플라자 호텔에서 G5의 재무장관들이 엔화, 마르크화 등의 대달러 환율을 상승시키는 정책기조로의 전환에 합의한 조약. 이후 달러화 약세로 미국 제조업체들은 해외시장에서 경쟁력을 일정하게 회복했으나 일본은 엔고로 인해 버블 붕괴 등의 후유증을 앓았다.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문제가 제기된 것도 이 합의의 결과였다)가 이루어지지요. 이른바 워싱턴 콘센서스(동의)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는 엔화의 평가절상에 대한 합의가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일본 경제가 크게 바뀌게 되었지요.
플라자 합의 이후 달러 중심체제에서 세계의 기축통화는 3각 체제로 바뀌게 됩니다. '일본은 왜 이 합의를 했는가'인데요. 그 이유는 첫째, 과잉유동성을 만들어서 금융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일본이 버블경제로 가는 계기가 되지요. 예를 들어 나카소네 내각은 리조트법(1987년 제정)을 만들고 골프장을 많이 허가하게 됩니다.
▲ 잡지 <AMPO> Vol.12 No.1-1980 ⓒ이영채 |
당시 프랑스의 알랑 리피에츠(Alain Guy Lipiec, 프랑스 경제학자, 2001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녹생당 대통령 후보) 같은 바보 학자들은 매년 도요타 초청으로 일본에 와서 이것을 '포스트모던 생산방식'이라고 극찬했습니다. '효율적인 생산방식이며, 시장에서 역 피드백을 활용하고, 노동자의 경영참가방식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을 대단한 경제이론으로 포장했습니다. 그의 조절이론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실체는 노동자와 회사원들은 거의 사생활이 없어질 정도의 착취를 당하는 직장으로 변했습니다. QC는 자기 생활까지 작업장 논리에 종속되고 모든 것을 서로 경쟁을 시키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전국 집회라던지, 지역에서는 QC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했습니다. 이런 조치는 결국 민간기업의 노동조합들이 약해지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회사들 간의 경쟁구조에서 노동조합운동이 결정적으로 약화되어 버린 것이지요. 당시 프랑스식의 경제해석은 일본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한국에는 이것이 도요티즘(Toyotism, 일본적 생산방식)이라고 알려졌지요.
총평 해체와 렝고의 탄생으로 인한 일본 노동운동 우경화
조+이 : 80년대 이후 일본노조 운동의 쇠퇴의 원인을 효율화 조치에서 찾는 셈이군요. 선생님은 전후 일본 국가를 지탱하던 절대평화주의의 균열이 노동운동에서는 80년대 국철의 민영화 반대투쟁의 좌절에서 시작되었다고 분석하고 계시는데요. 노동운동의 진보성의 퇴조와 기업 노조주의로의 전환의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요.
무토 : 노조의 쇠퇴의 원인은 QC조치뿐만 아니라, 그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1955년에 자민당과 사회당의 대립체제가 출범하지요. 공산당은 6전대회를 통해 전환을 합니다. 정치적 전환점의 시기인데 일본 정부는 생산성 본부라는 것을 만듭니다. 생산성 본부는 노조 대표를 미국에 연수를 보내기 시작합니다. 노조 대표들로 하여금 미국에 가서 보고, QC를 배워와 적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QC는 데밍그(1900∼1993년, 미합중국의 통계학자, 1950년부터 일본의 경영기업자의 생산성향상에 대해서 교육)라는 미국 학자가 고안한 것인데,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통계학적 방법을 활용하여 경쟁을 시키는 것입니다. 먼저는 노동자의 생활패턴을 바꾸게 됩니다. 이것이 노동자의 '소(小)집단화'라는 식으로 나타납니다. 직장마다 소수 집단을 결성하게 되고 생산성 향상시키기 위해 무엇이 가능한지를 서로 논의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회사에서의 일상적인 생활이 되어버리게 되지요.
일본 노동운동에 QC가 파급되면서, 이것은 일본의 노동자를 마치 자신이 경영자처럼 생각하게 하는 효과를 가지게 됩니다. 이전부터 이런 경향이 있었지만, 노동자들이 회사의 생산성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하는 것은 대단히 중대한 변화입니다.
또 한 가지 노조를 약화시킨 원인은 노조의 분열입니다. 조합을 분열시켜서 노조다운 노조를 소수화시켜버리는 것이지요. 이 중요한 계기가 복수노조의 도입입니다.
조+이 : 맥락은 다르겠지만, 한국에서는 복수노조가 2010년 7월부터 실시되기 시작했습니다.
무토 : 아, 그렇군요. 복수노조는 전전(戰前)부터 있기는 했는데, 이때부터 큰 힘을 발휘합니다. 그때까지는 숙련노동자를 중심으로 일반노동자가 존재했는데, 숙련노동이 해체되고 일반노동자 중심으로 변화하게 되지요. 하지만 철강 산업만을 보더라도 숙련노동자 해체에 대해서 노동자들의 저항이 많았습니다. 기술혁신과 인사정책 간에는 미묘한 관계가 있는데, 숙련노동자가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 회사는 통제를 해야 하기에 자연히 갈등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이제 숙련노동자를 해체하고 대신에 강제적인 행정감독을 거기에 투입하게 됩니다. 그래서 행정 감독에 의한 평가제를 도입하게 됩니다. 인사에 그것을 반영하고요.
행정감독의 평가에 의한 주관적인 인사평가 시스템으로 바뀌는 것이지요. 총평 노동자는 이 시스템에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저임금 노동 문제를 주로 다루었을 뿐이지요. 평균 임금을 인상하고 기본금 인상투쟁에 집중하는 형식이었습니다. 그러나 QC, 인사평가 등이 개별 노동자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침묵했습니다.
이것이 1955∼1985년까지의 일본 노동운동 현황이었습니다. 노조가 이 영역을 넘어서 개입하려 하면 폭력단이나 우익을 동원해서 제거했습니다. 그런 방식이 닛산자동차에서부터 도입됩니다. 강성 노조가 있는 곳을 하나씩 하나씩 파괴하는 과정이 오랫동안 진행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총평은 아주 강력한 노조였습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일본이 고도성장을 할 때 산업이 급속히 확장되는데 노동력이 부족했지요. 이처럼 공급 부족이 일어나는 상황이 바로 총평의 교섭력을 강력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임금이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본은 현장감독제, 개별 기업에서의 임금차별제 등을 통해서 노동자계급을 분열시켜오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60년대 들어서 총평의 교섭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철강이나 자동차분야에서 노동운동이 파괴되고 있었던 시기입니다. 춘투(春鬪, 매년 2월 열리는 일본 노동조합의 단체협상. 먼저 자동차, 전기, 철강 등 금속산업 및 제조업을 시작으로 단체교섭을 하고 그 이후 철도 및 전력 등 비제조업 분야가 동참. 1955년 5산별단체 공투회의, 55년에 8산별단체를 결성해서 전개)진행되고 있었지만, 매년 그 영향력은 약화되어가는 추세가 되었습니다. 민간 노조는 거의 우파에게 장악되거나 회사조직으로 체제화되었으며, 공공노조만 남게 되는 역설적 상황이 되는 것이지요.
80년대 중반부터 바로 이 공공부문 노조에 대해서 강한 공격이 나오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강성노조를 가지고 있는 국철의 민영화 전략입니다. 국철의 민영화는 이후 총평의 해체와 렝고(연합)의 탄생, 그리고 사회당의 붕괴로 이어집니다. 그 시기 공공부문 조직의 중심은 국철, 자치로(자치단체의 노조들), 교직원 노조였는데, 이들은 이후 총평 해체 이후 평화포럼(포럼-평화, 인권, 환경 단체. 1989년 총평의 해체 및 렝고 합류 이후 총평시기 노동조합의 평화운동을 계승하기 위하여 렝고 내에 설립한 단체)을 결성하는 기반이 됩니다.
90년대 초 냉전붕괴 이후 계급운동의 해체와 NGO운동의 성장
조+이 : 총평이 해체되고 렝고가 출범한 시기는 80년대 말∼90년대 초반인데요. 이 시기는 냉전의 붕괴와 소련의 해체와도 맞물리는 것 같습니다. 냉전붕괴가 미친 영향은 어떠했습니까.
무토 : 맞습니다. 바로 이 무렵 소비에트연방의 해체가 나타났습니다. 좌파세력이 강했을 때 이런 현상이 있었으면 치열한 논쟁이 있고 핵분열도 있었을 텐데, 이때는 이미 그런 역량도 없었습니다. 아마도 1950년대 소련 내의 스탈린 비판이 일본 운동에 거대한 충격을 주었던 것과 비교한다면, 영향이 미미할 정도였습니다. 대중은 이미 사회주의에 관심이 없었고, 운동세력도 오랫동안 소련에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한 기대가 조금 있었을 뿐이지요. 중국에 대해서는 1989년 천안문 사태로 인하여 이미 저항감이 있었고요.
하지만 이 무렵 변화라고 하면 운동이 아닌 엔지오(NGO. 비정부기구)가 출현하는 현상이지요. NGO는 합법적 활동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제가 있던 아시아태평양자료센터(PARC)의 방향 전환과도 연관됩니다. 90년대는 유엔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1992년 리오 환경회의가 있었고, 93년에 빈에서 세계인권회의가 열렸고요, 베이징 여성대회 등이 열렸지요. 운동의 전망이 없어져 가는 시점에 이러한 국제적인 회의가 열리는 시대가 된 것이지요.
90년대 일본에서는 정계개편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자민당 체제가 균열되면서, 1993년에 호소카와 내각(1993년 8월 9일부터 94년 4월 28일까지 지속된 내각)이 탄생합니다. 94년 6월에는 사회당-자민당 연립정권이 이루어지게 되고요. 정작 사회당의 무라야마 정권 때 사회당은 해체되고, 자위대도 합헌(무라야마 정권은 안보 조약 긍정, 원전 긍정, 비무장 중립의 포기 결정)으로 결정되는 모순이 일어납니다. 사회운동의 오랜 투쟁의 대상이었던 미·일 안보조약을 사회당이 인정하게 되고요. 혁신세력, 혁신정당세력이 없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총평 해체로 인하여 혁신세력의 실체가 없어졌다고 하면, 사회당의 해체로 이데올로기적인 상징의 축이 없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대신에 자민당도 패배했죠. 자민당도 그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변화의 시대에 진입했다고 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변화의 시대에 유엔이 국제회의를 크게 여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거리의 운동이 아니고 참가형 사회라고 할까. 참여하고 기획하는 시대가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정부와 기업과 NGO가 합작하는 가버넌스(governance, 일본에서는 참여하고 기획하는 참획(參劃)이라고 표현)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일본운동 전체에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1998년에 NPO법(비영리단체지원법)이 만들어지고 이것이 시대의 대세가 되어버립니다. 여러 운동이 아직 개별운동으로 존재하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노동운동은 거의 해체상태에 있고요. 그 속에서 정부와 무엇인가를 함께 하려고 하는 즉, 정책제안을 하는 운동, 애드버커시(advocacy) 운동 형태가 지배적으로 출현하게 됩니다. 이것은 물론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에 의해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하는 환상을 저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국철 민영화 반대 투쟁 국철 민영화 반대 투쟁은 일본 노동운동의 상징적인 투쟁이다. 나카소네 내각하에서 사회당 등 혁신세력의 기반인 국철의 노조를 해체하기 위해 국철을 JR철도회사로 민영화시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총평의 핵심이었던 국철 노조가 치열하고 장기적인 저항을 하게 된다. 강제로 국철이 JR철도회사로 민영화된 이후, 국철 노동자들은 민영화에 따른 정리해고에 반대하여 법적 투쟁을 포함하여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한다. 실제 JR철도회사는 국철 노조원들을 재고용하지 않고 해고하는 부당 노동행위를 하였고, 이에 해고자들과 국철 노조 자체는 일종의 '법외 노조'로서 이후 20여 년 동안 해고철회 및 복직투쟁을 지속하였다. 한국에서 광주항쟁이 80년 이후 반독재 운동에서 지속적인 핵심 사안이었듯 국철투쟁이 이후 일본 혁신 사회운동의 중요한 쟁점 중의 하나였다. 국철 해고단은 지난한 투쟁 속에서 법원으로부터 정리해고 자체가 부당하다는 판결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2009년 민주당이 들어선 이후 정치적 해결을 모색했으며, 2010년 4월 최종적으로 정부의 사죄와 1인당 2200만 엔의 보상금을 받는 형태로 최종 합의하였다. 가장 상징성을 갖는 '원직복귀'는 조합원들이 이미 정년에 가까운 상태였기 때문에 2011년 7월 최종적으로 국철 노조총회에서 복직을 요구하지 않는 합의안을 승인함으로써 국철투쟁을 종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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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중반 의사 화해로 타협한 일본 사회의 지식인들
조+이 : 역설적으로 사회주의와의 대결이 일본의 전후 체제를 지탱해주고 있었고, 그런 점에서 사회주의 붕괴 이후 90년대 중반이 일본의 변화의 시기였던 것 같기도 한데요.
무토 : 90년대 초 변화의 흐름 속에서 1995년에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국철 해고자 문제에 대한 타협안이 제시되지요. 3당 합의안이라고 하는 것이 제출됩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종군위안부 문제입니다. 잘 알려졌다시피,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민기금 형태의 해결안이 제출됩니다. 그 전에는 "민간업자가 했으므로 정부는 관계없다. 하지만 자료가 제시되었으므로 도덕적 책임은 느낀다. 그러나 법적 책임은 없다. 그러나 도덕적 책임에 대해서 국민기금 형태로 해결하자"라는 식이지요. 저는 이런 일본 정부의 태도를 의사(擬似)해결, 가짜 해결이라고 주장합니다.
1995년은 패전, 종전 50년이 되는 해이었습니다. 국회 결의안을 만들기로 했고, 만장일치로 해야 한다는 의견이 강했습니다. 이것도 의사해결의 한 예입니다. 전쟁책임을 소위 무라야마 담화(전후 50년을 맞이하여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내각 총리가 발표한 역사인식에 대한 성명)로 해결한 것이지요. 도의적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95년이 하나의 경계였던 것 같습니다. 이 의사해결에 대해서 누구도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위안부 분들은 오히려 화를 냈고요. 아주 성실히 운동해 온 분들이 화를 많이 냈지요. 국철해고자 문제도 미나마타 문제도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본 사회는 이것을 화해라고 했는데, 아닙니다.
당시 유행한 개념이 화해인데, 원칙 없이 화해된 것입니다. 심지어 잡지 <세카이>(世界, 1945년 12월에 창간된 이와나미 서점이 발행한 시사 잡지. 좌파 잡지의 대명사)도 "처벌의 시대가 끝나고 화해의 시대가 왔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와다 하루키(도쿄대학교 명예교수) 씨가 <세카이> 잡지에 영향력이 많은데, 와다 씨가 그런 입장을 취해서입니다. 이 시기는 리버럴의 패배 시대라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와나미 그룹(1913년에 이와나미 시게오(岩波茂雄)가 연 서점. 공산주의 강좌파의 거점)이나 잡지 <세카이>, 와다 하루키가 그런 안을 지지했습니다. 이것은 역으로 일본 지식인 사회와 운동을 분열시키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우익도 이런 타협안에 대해 반대를 하고 조직적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자민당은 역사조사위원회를 만들었고, 대동아공영권, 아시아해방전쟁이라는 주장도 다시 부활하게 됩니다. '일본의 새로운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1996년에 결성된 사회운동단체, 일본의 역사반성은 자학적인 역사관이라고 규정, 이를 극복하려는 우익적 역사교과서를 지향)도 출현하고, 아베 신조 등이 참여한 우익 국회의원 모임들도 결성됩니다.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義則, 1953∼, 만화가, 사상평론가, 만화 <전쟁론>을 통해 일본의 대동아전쟁을 긍정적으로 주장, 새로운역사교과서모임 이사, 극우 역사관의 중심적 인물)라고 하는 전쟁미화 만화가도 등장하게 됩니다.
당시 우리는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소련이 패배했으므로, 미·일 안보조약의 필요성이 없어졌기에 이것을 없애기 위한 논쟁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논쟁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의사해결방식으로 리버럴(진보) 지식인들이 타협해 간 것이지요. 정작 미·일 안보조약은 거론하지도 않고, 평화기본법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 일본군 위안부 해결 1000회 수요집회, 도쿄 외무성 포위 인간 사슬 집회 ⓒ이영채 |
전후 일본 사회 구성의 3가지 계승원리의 변화
조+이 : 선생은 책에서 전후 일본국가의 3가지 구성 원리를 미국의 반공 자유주의, 헌법의 절대 평화주의, 대일본 제국의 계승으로 표현한 바 있는데, 이 세 가지의 관계는 어떻게 분석할 수 있습니까.
무토 : 전후 일본 국가를 역사적 개념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바이마르 민주공화국이라는 시기가 독일에 있습니다. 2차대전 이전이고 나치 등장 이전의 역사적 시기이지요. 하지만, 그런 개념으로 볼 수 있는 전후의 독특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전전(戰前)과 다른 전후 국가의 특성이지요. 첫 번째 원리는 일본은 점령 중의 미국의 세계전략 속에서 만들어진 국가라고 하는 성격입니다. 그것이 전후 국가를 강하게 규정합니다. 전후 미·일 관계라고 하는 것은 2개의 국가의 외교관계가 아니라, 미국이라는 것은 일본 국가 내부에 존재하고 있고, 그것의 표현이 자위대의 존재방식입니다.
자위대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경찰 예비군으로 만든 것입니다. 경찰 예비라는 것은 미군의 예비군이라는 의미입니다. 간접 침략이라는 개념이 당시에 유행했지요. 재일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면 한국전쟁의 연장에서 북한군이 일본에 침략하지는 않지만 간접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경찰 예비병력이 필요하다는 논리였습니다. 이것은 미군의 연장으로서의 군대이지요. 이것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점령이 끝나면 해체해야 하는데, 일본 국가의 무장력으로 존재했습니다.
게다가 미·일 안보조약 하에서 자위대는 미군과의 연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식의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의 국가 안의 군대가 미국의 직접 영향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미국과의 외교관계가 아니라, 한 국가 내의 내부관계가 미국의 영향력으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한국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미국과의 내부관계이겠지만요. 하지만 그것은 군 내부만이 아니라, 외무성도 그런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의 경제 기획성은 미국에 매년 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미·일 안보조약이 존재하고 미군이 진주하고 있습니다. 오키나와는 1972년까지는 미국의 점령 하에 있었고 72년 이후에도 미국이 자기 영토와 똑같은 관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국은 헌법에 의해서만 통치를 할 수 있지요. 그러나 헌법은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USA)'입니다. 전후 일본의 사회운동은 이 헌법을 활용해왔습니다. 이런 점에서 일본 헌법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 있습니다. 미국에 의해 강제된 것이지만, 그것이 일본국의 원리화한 것입니다. 단지 미국제 헌법이었다고 한다면, 이렇게 오래 지속되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평화원리, 민주주의의 원리, 평화적 생존권 등이 일본 것으로 바뀐 것이지요.
일본국 헌법은 미국의 군사원리와는 대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 공산당은 이것을 샌프란시스코 체제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종속되어 있다는 논리이지요. 헌법체계와는 모순되고 있다는 일본공산당의 논리입니다. 결국 미국에 의해서 강제된 것이기도 하면서, 일본 사회에 뿌리를 내린 또 다른 평화주의의 원리가 존재합니다. 이것이 전후 일본 사회의 두 번째 원리입니다.
여기에 제3의 원리가 있는데, 그것은 '대일본 제국의 계승'이라고 하는 특성입니다. 일본은 과거의 일본 제국을 합리화할 뿐만 아니라 계승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일본의 역사 교과서 문제, 야스쿠니 문제 등으로 표출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익들은 '조선의 식민지 지배는 정당했다', '진주만 공격은 정당했다'라는 식의 논리가 튀어나오게 됩니다. 물론 우익들이 진주만 공격을 공개적으로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시아 지배는 공개적으로 정당화합니다. 문부성은 '일본 국체 보존청이다'라고 표현됩니다. 교과서 문제는 단지 교과서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원리의 문제이지요. 일본의 역사교육 수준이 높아진다고 이 문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일본 제국의 계승의 원리는 미국의 반공자유주의 원리와는 모순이 됩니다.
평화헌법, 대일본제국, 미국의 반공 자유주의이라고 하는 전후 일본 국가의 세 가지 구성원리가 서로 다 다 모순됩니다. 이것을 경쟁시키면서 전후 일본은 성장해왔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나의 원리가 맞으면 다른 두 개가 틀렸다고 해야 하지만, 꼭 그것만은 아닙니다. 이 세 가지가 구성 원리였는데, 중요한 것은 이제 일본 사회가 이 세 가지의 특성을 다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이 : 전후 일본 사회의 3대 구성원리의 변화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되었으면 합니다. 그것과 관련해서 미국과의 내부관계에 있어서 한국에서는 사대주의라는 것이 문제가 되는데, 일본에서는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 문제가 지적되고 있지 않습니까.
무토 : 일본에서도 역시 사대주의 문제가 개입됩니다. 일본과 한국의 사대주의의 의미는 조금 다르지만요. 일본의 좌익들은 어떤 의미에서, 평화주의와 평화헌법만 유일한 구성 원리로 보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60년대 이후 우익 운동이 성장했을 때, 그들은 '제국의 계승'의 원리만을 중시하면서 그것만이 절대화되어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미국의 구성 원리가 냉전 붕괴 이후 더욱 전면으로 등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아베 신조가 총리가 되었던 것은 '제국의 계승' 원리의 적자가 국가책임자가 된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정작 역설적인 것은 아베가 총리가 되니까, 역으로 공개적으로 이런 원리를 주장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출현합니다. 아베 총리는 심지어 무라야마 총리의 담화를 답습하겠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제국 계승의 원리가 일본 국가 원리로 정면 등장하지는 못했고, 실험용으로 등장했다가 좌초 내지는 붕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세 원리를 넘어서는 새로운 원리의 출현의 시대가 되어야 하는데 지금은 이 원리가 불명확한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평화와 민주주의의 원리를 기본으로 해서 평화와 민주주의의 약점을 어떻게 줄이면서 우리가 이것을 전면화할 것인가 하는 전망을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가 될 것입니다.
3.11 이후 일본 사회의 변화와 좌파운동의 전망
조+이 : 새로운 원리출현의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과 관련하여 3.11 지진과 원전 사고 이후 전개되는 일본 사회의 변화 속에서는 어떤 가능성이 보입니까.
▲ 무토 이치요우 씨의 2011년 신간 <잠재적 핵 보유와 전후 국가> ⓒPP21 |
조+이 : 무토 선생의 일본 상황에 대한 암울한 분석과는 반대로, 그래도 일정하게 일본 정치에 균열과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은데요. 2009년 선거에서 자민당이 민주당의 1/3의 의석으로 대거 축소되고 정권교체를 이룬 것은 그래도 일본사회의 변화의 움직임이 있는 것은 아닌지요? 특히 하토야마, 간 나오토 내각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자민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패권체제 내의 일정한 균열의 요소는 없는지요. 3.11 이후 일본 사회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무토 : 2009년 민주당으로 바뀐 후, 저도 초기에 정권교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양당제도의 정착에 의한 정권교체라고 생각을 했지요. 그러나 현재 일어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 판명되고 있습니다. 민주당 국가는 자민당 국가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민당 지배라는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여기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자민당은 앞서 이야기한 전후 일본 국가의 3가지 원리를 활용하면서 위기를 극복해왔습니다. 이러한 자민당 국가의 지속에는 그것을 지탱해온 여러 축이 있습니다.
하나의 축이 국가 예산을 사용해서 특정 지역의 이익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특정 지역에 이익을 분배함으로써 그 지역의 지지기반을 통해 정권을 유지해 왔습니다.
또 한 가지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사회질서를 만들었습니다. 대기업의 이해와 국가의 이해를 일치시켰습니다. 그것을 일본식으로 기업국가라고 이야기했지요. 20년 전에 동경대 사회과학 연구소가 '기업사회'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대기업의 정규직 노조는 연공서열, 일본적인 고용환경, 그리고 숙련노동자가 가장 대접을 받는 구조가 존재했습니다. 거기에다 대기업 주변의 중소기업이 하청업체로 남아 있는 구조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구조 위에서 일본은 경제성장을 했고, 정치라는 본래적 기능은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치가 작동하지 않아도 일본 사회는 돌아갑니다. 이것에는 여러 가지 논쟁이 있지만, 그런 원리 속에서 일본 사회가 움직입니다. 예컨대 평화헌법이 존재하고 안보조약이 있어서 국민들은 안정되게 느끼고 생활하지요. 예를 들면 국민들에게 전쟁이나 타 국가와의 대결과 같은 국민의 생명을 요구하는 일들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을 하면 사람이 죽는데, 미·일 안보조약의 구조 하에서 안주하면 일본 국민이 죽는 것을 요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쉬운 정치를 하는 것입니다. 전후 일본 국가는 그런 통치방식을 써 왔습니다. 하지만, 점점 파산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역설적으로 신자유주의적인 글로벌주의가 이런 것들에 대한 변화를 촉발합니다.
일본 자본주의는 예컨대 내수경제와 같은 형태로 일본 내의 국경 중심의 경계를 갖는 축적양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시작되기 전, 일본 기업은 대개 일본에 생산기반을 두고 제품을 수출하는 구조였습니다. 그러나 나카소네 내각이 등장하고 나서 미·일 무역마찰이 일면서 미국에 생산 공장을 두는 형태로 변화해야 했습니다. 수출 대체형 해외 투자였지요. 다국적 기업과 같은 사고방식은 아닙니다. 수출해야 하는데, 미국과 마찰이 있으니까 미국에 공장을 만드는 식이지요. 테네시 강 주변에 공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변화의 시작은 근본적으로 일본의 생산구조의 전환을 요구받게 되었습니다. WTO 질서라는 것이 이런 것이지요. 고이즈미 정권이 이를 전면으로 추진했습니다. 일본 사회를 글로벌적인 축적구조로 바꾸고자 한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연공서열 같은 질서는 유지될 수 없는 것입니다. 경단련이 신자유주의시대의 일본적 경영방식이라는 발표를 하게 되었습니다.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바꾸고, 파견직을 양산하는 구조조정안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업은 사회적 통합이나 국가적 통합의 장소가 되지 못하게 됩니다. 정부는 복지를 사회 전체로 확산하지도 못하고 노인 보호도, 농업 보호도 못하게 되고 결국 기존의 질서는 해체되게 되는 것이지요.
아베 내각에서는 정작 일본 제국의 계승성을 전면화 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실현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수의 기반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나옵니다. 저는 자민당이 선거에서 패배한 이유는 바로 전후 국가를 성립시킨 조건이 이미 없어졌고, 전후 일본 국가는 폐허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런 속에서 거시적인 국가개조의 비젼을 둘러싼 각축은 사라졌고, 정권을 쟁취하는 것이 정당의 유일한 목표가 됩니다. 정치사상이라던가, 정치원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채 말입니다. 개헌파에서 호헌파까지, 우파에서 좌파까지 존재하지만, 공통의 목표는 오직 정권장악이었습니다.
선거 전에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1953∼, 민주당 외무장관, 간사장 역임) 인터뷰가 있었는데, '이 선거의 쟁점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정권교체라고 했습니다. 놀라운 대답인데, 실제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민주당 시대는 무엇을 가져왔는가, 무엇을 계승했는가. 결국 폐허가 된 집을 상속받은 것 외에 없었습니다. 자민당하고 차이점을 정식화하기 위하여 물론 일부 아래로부터의 요구를 반영했었습니다. 예를 들면, 대등한 미·일관계, 아동수당 등이 그런 정책들입니다. 민주당의 매니페스토에 넣었지요. 그러나 어느 하나도 원칙에 충실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정책이지요. 또 언제든지 다시 필요하면 다시 흩어지고 재결합하는 과정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지요.
결국 일본 국가의 전면적인 재구축을 위해서는 민중 자신이나 민중운동 측면에서의 인식의 공유가 전제로 필요합니다. 그것이 있을 때 전면 해체를 하면서 재구축을 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3·11 이후 그런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3·11 자체는 불행한 일이지만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들이 모이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입니다.
새로운 평등한 사회의 구성방식으로서의 인터 피플사회
조+이 : 인생을 거슬러 올라가 새로운 삶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으십니까. 다음 세대에 전해주고 싶은 운동적 지혜가 있다면요.
▲ 계간 <피플스 플랜>, PP21의 기관지 ⓒPP21 |
이후 저희들의 생각은 몇 가지 단계가 있기는 한데, 민주자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여러 종류의 집단 속에 자치라는 것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있지만 일관된 자치를 하는 것이 가능한가, 100명의 집단이 있다면 이들이 대등하게 존재하는 방식은? 예컨대 남성이 있고 여성이 있고, 다양한 층들이 존재할 때, 이 다양한 층들이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등등 새로운 평등한 사회의 구성방식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예로 저는 '자치'라는 것에 대해서 '인터피플(inter-people)'이라는 개념을 쓰는 것도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입니다.
조+이 :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토 : 제가 마르크스주의자인가 물어보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개의치 않습니다. 저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는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책이 <포이에르바하의 테제>입니다. 이 테제를 가지고 처음 마르크스를 이해했습니다. <자본론>이나 <공산당 선언>이 아니었습니다.
조+이 : 장시간 대단히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시오.
(무토 선생의 인터뷰는 건강상의 문제도 있어서 2주간 두 번에 걸쳐서 장시간 이루어졌다. 인터뷰 후에는 교류회장에서 중국에 대한 견해, 동아시아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공유 등 다양한 문제에 대해 솔직한 의견 교환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내용들은 지면상의 제약으로 향후 다른 기회에 소개하고자 한다.)
* 이 인터뷰는 성공회대 민주주의 연구소의 후원으로 진행됐으며 시민사회신문에도 요약본이 실릴 예정입니다.
인터뷰 진행자
조희연 교수 :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겸 NGO대학원 교수. 현재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공동대표.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소장, 참여연대 집행위원장, 학술단체협의회 상임공동대표 역임. 저서로는 <한국의 국가 민주주의 정치변동>,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빈곤과 계로>, <박정희와 개발독재체제>, <동원된 근대화> 등이 있다.
이영채 교수 : 일본 케이센대학교(惠泉女學院大學校) 국제사회학과 교수. 케이오대 및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일본 PARC(아시아태평 자료조사센터) 연구원 및 현장잡지 <노동정보> 편집위원 역임, 야스쿠니 반대 동아시아 촛불행동 일본실행위 사무국장. <참세상>에 일본사회운동에 대한 글을 연재하고, 일본의 노동현장 잡지 <노동정보>에 한국의 사회운동의 글을 연재하는 등 한일시민/민중연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初恋」からノムヒョンの死まで』(梨の木舎),『なるほど!これが韓国か--名言・流行語・造語で知る現代史』(朝日新聞社),『IRISで分かる朝鮮半島の危機』(朝日新聞社)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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