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 탓" "野 탓" "DJ 탓"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의장의 돌연한 투신 자살 다음 날인 지난 5일, 중앙일보 6면에 위와 같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정 의장의 죽음에 대해 민주당 구주류는 야당의 대북 송금 특검 요구를 수용한 노무현 대통령에게, 신주류는 특검을 요구한 한나라당에게, 한나라당은 '남북경협에 무리하게 기업인을 끌어들인'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잘못된 사태의 책임을 무조건 정치적 반대파에게 떠넘기는 것은 한국 정치의 유구한 전통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다만 필자가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어째서 우리 정치인들의 상상력의 지평은 한반도 남쪽 절반을 뛰어넘지 못하냐는 것이다. 물론 김대중과 김정일을 한 묶음으로 묶어서 정 의장 사망의 배후로 몰아친 극우 논객 조갑제처럼 '통 큰 사고'를 한 사람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역시 한반도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정몽헌 의장의 죽음은 중대한 사건이다. 당장 남북경협의 앞날이 위태로워졌다. 그가 죽음에 이르게 된 배경이나 그의 죽음이 남북관계 등에 몰고 올 파장 등은 앞으로 면밀히 조사되고 이에 대한 대응책이 마련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제기하고 싶은 것은 '미국의 역할' 내지 '미국의 책임'이다. 미국이 정 의장 사망의 직접적 배후라는 얘기가 아니다.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 이후 지난 해 9월에 이르기까지 2년 남짓 한반도와 동북아에 퍼져가고 있던 해빙 기류가 어째서 지난 해 10월 이후 제2의 북핵 위기로 돌변하게 됐는지 그 과정을 되짚어 보면서 남북한의 진정한 화해ㆍ협력에 미국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또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를 냉정하게 점검해 보자는 것이다.
우선 대북 비밀송금 의혹의 첫 단서가 미국 측에 의해 제공됐다는 것부터가 수상쩍다. 5억 달러 송금설을 처음 제기한 미 의회조사국(CRS) 래리 닉쉬 연구원의 한반도 관련 보고서가 그것이다. 이 보고서는 지난해 엄낙용 전 산업은행 총재의 국회 증언에 의해 대북 송금 의혹이 국내에서 처음 제기된 것보다 1년가량 앞선 2001년에 발표됐다. 이후 이 보고서는 송금 의혹을 뒷받침하는 주요 근거가 됐다.
북한 문제에 정통한 한 전문가는 남북 정상회담 1년 후인 2001년에 래리 닉쉬 연구원이 직접 한국을 방문한 뒤에 이 보고서가 발표됐다면서 아마도 국내 정보기관의 전직 관리들이 이같은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남과 북의 자주적 화해 움직임을 불온시한 미국과 국내 냉전수구세력의 합작품이라는 얘기다.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미 대통령 특사의 방북에서 비롯된 제2 북핵 위기는 또 어떤가. 2002년 7월 북한의 과감한 시장경제 도입과 8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북, 특히 9월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에 의한 사상 최초의 북일 정상회담 등으로 한반도에 불어오고 있던 훈풍은 켈리의 방북 이후 차가운 북풍으로 돌변하고 말았다. 나아가 이미 적자에 허덕이고 있던 현대아산의 대북사업은 제2 북핵 위기가 불거지면서 더욱 어려운 곤경에 처하게 됐다. 지난해까지 금강산 관광에 지급됐던 정부 보조금이 금년 들어 북핵 사태를 이유로 전면 동결된 것(약 2백억원)도 그 중의 하나다.
이와 관련, 미국의 저명한 한반도 전문가인 브루스 커밍스 교수(시카고대)는 지난달 말 서울에서 열린 한반도 평화 세미나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을 밝혔다.
첫째, 미국은 이미 클린턴 행정부 때부터 북한의 우라늄농축 시도를 알고 있었으며 이러한 정보를 취임하는 부시 행정부에 모두 알려주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이에 대해 18개월간 아무런 대응조치를 취하지 않다가 2002년 북한과의 대결 국면 조성에 이용했다.
둘째, 북한의 우라늄농축 시도에도 불구하고 클린턴 행정부는 미사일협상이 왼료되고 북미관계가 정상화된다면 북한의 어떠한 핵무기 계획도 무산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셋째, 미국의 독립적 전문가들에 따르면 북한의 우라늄 농축으로 핵폭탄을 만들려면 4-5년이 걸릴 것으로(따라서 긴급한 위기가 아니라고) 보고 있는 반면 부시 행정부는 몇 개월 내에 가능할 것이라며 사태를 과장했다.
넷째, 2002년 9월초 켈리 차관보가 일본을 방문해 북한의 새 핵무기 프로그램에 관한 증거를 제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이즈미 총리는 그 직후 방북을 강행했다. 이는 2차대전 종결 이후 미일관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일본의) 독립적인 행동이었다(일본은 방북 3일전에야 이 사실을 미국에 통보했다). 당시 부시행정부는 고이즈미의 방북을 반대했으나 미일관계의 균열을 우려해 공개적으로는 지지를 표명했다.
커밍스 교수는 결론적으로 "만일 북한이 핵폭탄을 갖게 된다면 이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따라서 그 폭탄을 부시의 폭탄이라고 부르자. 왜냐하면 이제는 미국 대통령이 새로운 문제거리가 됐으니까(북한은 단지 지난 58년간 풀리지 못한 문제였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이번 핵위기는 미국이 기획하고 연출한 미국발 위기라는 것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명백히 드러난 것은 미국은 어떤 국가든지(그것이 한국이든 일본이든)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독자적인 행동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 말이 의심스러운가?
미국의 현실주의 외교전략가 브레진스키의 다음 말을 보자. 지난 1997년 미국의 젊은 세대에게 미국의 1등적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유라시아 대륙을 통제하는 것이 핵심이라며 그 전략을 소상히 밝힌 저서 <거대한 체스판>에서 그는 한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한은 극동지역의 지정학적 추축이다. 남한이 미국과 맺고 있는 밀접한 관계는 미군이 일본에 대규모로 주둔하지 않고서도 일본을 보호할 수 있게 해주며, 따라서 일본이 '독립적인' 군사강국으로 성장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고 있다. 통일 혹은 중국영향권으로의 편입 등으로 말미암아 남한의 지위가 변화하면, 극동에서 미국의 지위 역시 크게 변화할 것이고 일본의 지위도 마찬가지로 크게 변화할 것이다. 부연하자면 남한의 증대된 경제력으로 인해 남한은 어느때보다도 중요한 '공간'이 되었고, 남한에 대한 통제는 더욱 값진 것이 되었다."
더욱이 정몽헌 의장의 죽음에 즈음한 워싱턴포스트의 5일자 사설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과 비하를 드러내고 있다. 한마디로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목표는 남한에 대한 통제의 계속 유지, 그리고 미국의 뜻을 거스르면서도 생존을 유지하고 있는 북한의 굴복 및 붕괴이다. 부시 행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인권이나 민주화 문제는 겉치레에 불과하다. 노암 촘스키의 지적대로 미국에 대한 가장 큰 죄는 '불복종'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주민들의 안전이나 평화, 번영은 그들의 1차적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은 한반도의 자주적 화해, 협력, 평화, 통일에 중대한 걸림돌이 될 것임이 점차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만일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盧 탓" "野 탓" "DJ 탓"만을 한다면 외세에 국권이 휘둘리고 결국은 나라를 잃고 만 구한말의 비극을 되풀이할지도 모른다.
오늘은 고 정몽헌 의장이 이승을 떠나는 날이다. 그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 한다면 한국의 위정자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정몽헌 의장의 부인이 전하는 그의 말을 다시금 되새겨 들어야 한다.
"우리가 부시 뒷다리만 잡고 가면 패망할텐데, 남북이 서로 이해하고 화합하고 자주적으로 문제를 풀어야 할 텐데... 핵포기의 해법은 경협밖에 없다고... 그런 말씀을 마지막 자리에서도 한두마디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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