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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처럼 흐르기 혹은 춤처럼 뒤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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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물처럼 흐르기 혹은 춤처럼 뒤집기

남재일의 ‘사람과 사람 사이’ <6> 서영은

나는 한동안 흐르는 물을 보고 생을 상상했다. 작은 샘에서 시작해서 급류로 달렸다가 완만하게 한숨 돌리며 바다로 흘러가는 그 유장함의 문체를 갖고 싶었다. 왜 하필 물이었는지는 지금도 모호하다.

마라톤을 인생에 비유하는 얘기는 거북했다. 마치 완주해야 하는 골인 지점을 전제하는 목적론적 서사구조가 미심쩍었고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 자기몰입의 과정이 무척이나 고단해 보였다. 등산을 인생에 비유하는 얘기들은 더 답답했다. 생의 서사가 산의 능선을 닮았다느니, 하산할 때야 산의 의미를 알 수 있다느니 하는 얘기들은 아무리 맞는 얘기라 해도 기껏해야 절망에 대한 예방주사에 불과해 보였다. 생의 정상을 넘어 이제 내리막길에 접어든 사람이 발휘할 수 있는 지혜, 그러니까 정상 저 너머에서 산을 오르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말 같았다.

그러니까, 나는 물처럼 땅바닥을 핥으면서 흘러가는, 흐르다 스러지는 삶을 꿈꾸었든 듯싶다.(나중에야 '택도 없음'을 깨달았다. 흐르는 강물이 아니라 강변 바위에 악착같이 붙어 있으려는 이끼 같은 존재가 나란 걸 깨닫는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서영은을 처음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문학잡지에서 단편 하나를 읽었는데 아주 인상적이었다. 지금은 제목도 기억나지 않지만, 한진옥이라는 여자 주인공이 사막으로 여행을 가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새로 발견하는 그런 내용이었는데, 내게는 마치 춤 같았다. 모든 일상적 관계가 정지된 지상의 유일한 추상공간을 무대 삼아 맨발로 춤을 추는 여자, 그것은 분명 어떤 한 생의 이미지처럼 보였다. 춤은 물과 통해 보였고, 흐르는 물의 이미지를 삼인칭 관찰자 시점이 아닌 일인칭 시점으로 돌려놓으면 사막을 춤으로 건너가는 댄서의 영상이 나올 법했다.

내 이분법은 인간을 댄서와 화가로 나눈다. 인간을 육식동물과 초식동물로 나누는 한 친구에게 이 구분이 훨씬 문화적이고 중립적임을 주장했다가 '관념적'이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어쨌거나, 이 구분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인간들이 종종 있다. 평생 댄서를 그린 화가 드가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춤의 한 순간을 정지시키고 싶은 욕망은 전 존재를 하나의 이미지에 투신하고자 하는 순교의 욕망 혹은 죽음 충동과 맞닿아 있다. 그러기에 그는 삶의 어느 구역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고 순교의 지점을 찾아 경계를 응시하며 긴장한다. 나는 이런 경계인에게 본능적인 호기심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의 삶에는 언제나 장르의 관습을 파기하는 예측불허의 서사가 있기 때문이다.

10년 전으로 기억된다. 그를 처음 봤을 때 어디론가 흘러가 버리고 싶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누군가에게 최상급의 찬사를 보낼 때 늘 '거침없이'란 표현을 썼다. 무엇을 위해 어디를 향하든 매이지 않고 나아가는 자아의 양태 자체를 끊임없이 의식했다. 나르시시즘을 매개하지 않고는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춤꾼처럼 그는 춤을 추듯 어디론가 나아가고자 했다. 그러나 동리가 세상을 떠나자 그가 춤을 추던 무대는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요즘 그가 '서초동 시절'이라 부르는 시간동안, 그는 내내 혼돈이었다고 말한다. 나는 그 때 종종 친구들을 몰고 가 그 집의 와인을 축내곤 했는데, 혼돈의 기미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 때 그는 성경공부를 시작했고, 살풀이춤을 배우기도 했다.

삼 년 전 그는 평창동으로 이사를 했다. 나는 일 년에 한 번 정도 연말에 인사를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뭐 하고 지내시냐고 물으면 그때마다 문득 문득 성경공부 얘기를 했다. 나는 종교가 없기 때문에 신앙체험을 한 사람들의 느낌을 이해하는 기제가 없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 특히 나이 들어서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은 삶을 이해하는 패러다임 자체가 적잖은 변화를 겪는다는 것이다. 그의 삶에도 모종의 변화가 찾아왔을 터였다. 나는 그가 이번엔 어디로 흘러가기로 작정했는지 궁금했다.

그는 일찍 찾아온 생의 허무를 이기기 위해 자신을 몰입시킬 대상으로 문학을 찾았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나이 이순이 다 돼서 찾은 신앙세계는 그의 문학을 어떻게 바꿔 놓았을까? 그는 문학에 대해 무어라고 말할 것인가? 문학과 함께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유일한 길이었다고 말하는 동리의 부재를 그는 무엇으로 채울 수 있었을까?

나는 인터뷰를 위해 그를 두 번 만났다. 평창동 자택에서 와인을 마시며 한번 대화를 나누고, 일주일 뒤 올림피아 호텔 커피숍에서 공식적인 인터뷰를 했다. 얘기를 나누면서 흔히 말하는 '공식적인 질문', 예컨대, "현재의 한국 문학을 어떻게 보십니까?"와 같은 질문을 하나도 던지지 못했다. 대화의 흐름이 평창동으로 옮겨온 이후의 생활에 집중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면적 변화에 초점이 맞춰졌고, 그런 질문을 끼워 넣기가 민망했다. 나는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고, 그는 흘러갔다.

남재일 : 대담이 늘 무슨 계기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이번 대담은 선생님의 환갑기념 문집 출간이 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생을 대담의 영역으로 정하고 나니 무슨 얘기부터 시작해야할지 저도 난감합니다. 우선, 후기에 언급하신 얘기, 그러니까 어린시절 하고 문학의 길에 접어들게 된 동기부터 얘기를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서영은 : 어릴 때 외따로 자랐어요. 친구들하고 떨어져서 혼자 지냈다고 할 수 있어요. 어린 나이에 어떤 확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냥 잘 어울리지 못하다보니까 그렇게 지냈어요. 혼자 지내다보니 다른 아이들이 잘 하는 것에 아주 미숙해서 부모님이 심부름을 시켜도 제대로 잘 못해내고 헤매기가 일쑤였어요. 후기에도 썼지만, 콩나물 사오라고 심부름을 하면 그 과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당황할 정도였어요. 부모들이 재 왜 저러나 저렇게 어설프고 똑똑하지가 못할까 걱정을 했어요. 나도 난 좀 모자라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게 됐고, 그러다 보니 더욱 의기소침해져서 마루 밑에 쳐 박혀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거기서 땅바닥에 새나 달을 그리면 혼자서 생각하며 어린 시절을 다 보냈어요.

나중에 사춘기 때 접어들어서 책을 읽다보니까, 거기 주인공이 다 나와 비슷한 증상이 있는 것 같아서 이게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에게 공통된 삶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좀 위안이 됐어요. 그때부터 열심히 소설을 탐독하면서 나름대로 정체성을 찾아보려고 노력했어요. 이때 책을 통해서 얻은 삶에 대한 영감이랄까, 어떤 편견들이 내 인생의 틀을 짰지 않나 싶어요.

남재일 : 삶의 틀이란 말씀을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책들이 어떤 방식으로 선생님의 삶에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합니다,

서영은 : 빌려서 읽을 수 있는 책들은 닥치는 대로 봤는데, 기억에 남는 거는 '이방인' '구토' '심판' '젊은 예술가의 초상'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런 책들이죠. 인간 실존의 문제를 천착하는 작품들에 끌렸는데, 이 책들이 내 삶의 길잡이가 돼 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뭐랄까, 나를 가두는 막이 되기도 했던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생활을 통해 삶에 대한 느낌을 갖는 게 좋은데, 내 경우는 그게 뒤바뀌었어요. 어린 나이에 세계적인 작가들의 경험을 책을 통해 섭렵해버리다 보니 그 사람들의 생각으로 세상을 보게 된 거죠.

살고 나서 느껴야 되는데, 나는 느끼고 나서 그 느낌을 삶에 적용하려고 했어요. 아무리 정교한 관념이라도 내 눈앞에 전개된 일상의 결을 다 포착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천재들의 눈을 빌려 세상의 이면을 서둘러 보는 대신 일상의 즐거움을 비용으로 지불해야 했다고나 할까, 젊은 나이에 삶의 무의미와 권태를 느껴버렸어요. 사실, 실존의 문제는 안보고 사는 게 좋고 이왕 봐야할 것이면 천천히 마지못해 보는 게 좋은데, 난 그게 무슨 특종이나 되는 것처럼 서둘러 달려갔으니.....

남재일 : 실존의 문제는 살면서 누구나 한번은 겪게 되는 고민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사람들마다 그런 고민을 하는 방식과 정도는 각각 다른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런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 궁금합니다.

서영은 : 얼마 전 버지니아 울프 얘기를 다룬 '디 아워스'란 영화를 봤는데 재미있게 봤어요. 버지니아 울프의 불행은 이런 거예요. 보통 여자들 같으면 남편이 자신을 아껴주고 원만한 가정을 갖고 살면 그걸 행복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녀는 그렇지가 못한 사람이죠. 왜냐하면, 보통사람이 못 보는, 아니 어쩌면 알면서 못 본 척할 수도 있는 세상의 이면에 시선이 가 있기 때문에 지금 내 앞에 있다고 남들이 말하는 세계가 무의미하고 무가치 해보이겠지요.

그런데 이런 실존의 문제는 개인에 따라서 느끼느냐 못 느끼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삶 자체가 품고 있는 덫 같거든요. 그 차이는 어떤 운명이라고 밖에 달리 말할 수 없는 개인의 여러 가지 조건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 싶어요. 자신이 이런 문제를 느끼고 싶다고 느끼고 안 느끼고 싶다고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죠. 개인의 노력으로 이 차이를 바꿔 놓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남재일 : '질투는 나의 힘'이란 영화에 보면 문학잡지 편집장이 이런 말을 합니다. "작가는 후벼 팔 수 있는 영혼의 상처가 있어야 돼, 난 그게 없어서 문학을 못해". 이 말은 아주 묘한 뉘앙스가 있습니다. 자신은 상처가 없다는 사회적인 안도감과 문학을 할 수 없다는 탄식이 섞여 있습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문학을 할 수 없는 좌절을 문학에 이물감을 부여하면서 잊고 싶어 하는 사람의 전략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살면서 자신이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이런 태도를 취하는 사람을 여럿 봤기 때문에, 이게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사회적인 문화의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내면이 쓰레기통이어서 들여다볼 의사도 용기도 없는 사회는 요란한 화장술을 필요로 하고, 거기에 적응한 개인은 화장하지 않은 상태를 견디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실존적 고민이라는 것도 제도적인 이데올로기에 비추어보면 세계에 대한 부정의 시선으로 낙찰될 공산이 큽니다.

그래서, 완고하고 편협한 사회에서는 실존적 고민 자체를 음지적인 현상으로 치부하는 묘한 이분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의 가족사를 들먹이며 좌절된 사회관계의 징후로 그 사람의 모든 실존적 고민을 해석하는 악의적인 환원주의는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저는 사실 이런 식으로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조악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대입하면 개인이 온전하게 자신을 지키고 살기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좀 전에 개인이 어떤 실존적 고민에 빠지느냐 마느냐는데 별 의지를 발휘할 수 없고 운명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선생님의 경우 그런 고민을 일찍이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은 어떤 것인지요?

서영은 : 왜 그런지는 설명을 못하죠. 어느 날 보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냥 나는 이렇게 생겼구나 그렇게 받아들이는 거죠. 사회적 문제 때문에 어떤 실존적 고민에 빠진다는 것은 지극히 유치한 발상이죠. 같은 집안의 형제도 고민의 형태가 다 다르고 추구하는 게 다르잖아요. 나는 타고난 감수성 같은 게 가장 결정적일 것 같은데, 그 문제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를 못 느꼈어요. 나는 바뀌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고, 바뀌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내 관심은 어떻게 하면 무의미, 무가치의 늪을 건널 수 있을까 이런 것이었어요. 밖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니까 내 안에서 추구하는 방식이 열렬하면 무의미와 무가치를 무찌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됐고 그래서 찾은 것이 문학이었어요. 의지적 삶의 방편으로 문학을 선택한 거지요. 문학이 자신이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와 관계 맺으면서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니까 내게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기질 탓도 있을 겁니다.

나는 외골수 기질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추구하는 것을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몰입합니다. 선생님(김동리)과 연애할 때도 신격화 하다시피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선생님에 관해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좀 놀라곤 했어요. 한번은 한참 선배 되는 한 분이 그러시더군요. "남자가 그렇게 존경할 만한 존재가 못돼요." 내가 얼마나 맹목적으로 달려갔으면 그런 말을 하셨겠어요. 아마 한 집에서 살지 않고 연애의 긴장관계에서 긴 세월을 지냈기 때문에 그런 환상이 가능했겠지요. 어쨌거나 지금 생각하면 그 때가 행복한 시절이었어요. 삶이 꽉 차 있다고 느꼈으니까.

남재일 : 선생님의 삶에서 동리의 존재는 큰 의미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서른 살 연상의 남자와 살기로 결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어떤 생각으로 그런 결심을 하셨는지 궁급합니다. 저는 한번도 누군가의 존재가 내 삶에 그렇게 커다란 절대적 의미를 가진 적이 없어서 그런 열정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요즘은 절실함과 열정이 왜 생겨나는지는 이해가 조금 되긴 합니다만....

서영은 : 젊었을 때 시집가서 아이 낳고 살림 살면서 사는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었어요. 뭔가 나를 몰입시킬 수 있는 사람, 그래서 내 안에서 어떤 의미를 끌어올릴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어떤 카리스마가 있어서 더 이상 삶에 대한 권태에 휘둘리지 않게 해주는 사람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 관계를 한 발짝 떨어져서 제3자의 눈으로 보면 사랑을 빌린 자기 확인의 과정이 아니었나 싶어요. 상대가 아니면 자기 힘이 확인이 안 되는 관계에 있는 두 무사가 있는데, 이 사람들은 날만 새면 강변에 막걸리 한동이 갖다 놓고 싸우지요.

돌이켜보면 선생님과 나의 관계가 그런 게 아니었나 싶어요. 내가 속이 남자 같거든요. 선생님과 맞붙어서 그 힘의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같이 있을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어요. 자기 안에서 힘을 불러 올 때만이 삶이 구체화 되고 고양되는데, 헤밍웨이는 그 점을 분명히 알았어요. 헤밍웨이가 그린 투우사와 소의 관계를 보면 재밌어요. 투우에는 소의 영역과 투우사의 영역이 있는데, 요즘은 투우도 흥행을 위한 쇼로 하니까 서로가 그 영역을 침범하지 않아요.

진정한 투우는 투우사가 소의 영역을 침범하고, 소는 침범당한 영역을 찾기 위해 투우사의 영역을 공격하고 그래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되면 투우사가 목숨의 위험을 받는데, 이때서야 투우사는 생명이 감각적으로 불붙어 자기 안에 있는 힘을 확인할 수 있거든요. 내 안에 있는 권태와 허무가 얼마나 깊었으면 그 길로 가야 삶의 의미를 느꼈겠어요.

남재일 : 선생님의 말씀대로라면 동리의 존재는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부재를 어떻게 받아들였고, 이겨냈는지요?

서영은 : 1990년 7월 30일이었는데 몹시 무더웠어요. 선생님이 대야에 냉수를 가득 담고 머리에 끼얹었는데 뇌혈관이 파열되면서 쓰러졌어요. 그 때 내가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나의 가늠자는 그 상황에 무능했고, 이렇게 머리를 돌려도 죽음, 저렇게 머리를 돌려도 죽음밖에 보이지 않았어요. 망연자실한 상태에서 이가 아파 치과엘 들렀는데, 의사가 내 사정이 가엾고 안타까웠는지 사람을 소개시켜주었어요. 한일카펫트 사장부인인 이영자씨인데, 그 분이 하는 말이 처음에는 도무지 들어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분은 잊을 만하면 연락을 해 왔고, 2년 세월을 그렇게 보낸 뒤에 성경공부를 같이 하게 됐어요. 서초동 살 때인데, 아래층에 미술교사 하던 분과 이영자씨와 나 이렇게 셋이서 성경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래도 생각이 닫혀있으니까, '다 아는 얘긴데 뭐' ' 이거 너무 배타적인 도그마 아닌가' 이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요. 이때 지금 법무장관 이 된 강금실 변호사가 집에 종종 들렀는데, 그 친구 중에 살풀이춤을 하는 사람이 있어 춤도 동시에 배웠어요. 살풀이 하면서 귀신이 내릴 뻔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영과 영이 내 몸을 두고 싸운 것 같아요. 그런 거 아세요?

남재일 : 전 아직 육(肉)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사람이라 영이란 말이 굉장히 낯설어요. 제가 정말 이해되지 않는 게 어떻게 하면 귀신이 내릴까 이런 겁니다. 유물론자라서 그런지 그런 컨셉 자체가 이해가 잘 안돼요. 어떤 심리적 상황을 귀신이라는 의인화된 개념으로 종합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방면에 대해 사실 잘 모릅니다.

서영은 : 영들이 영토 싸움을 하는데 육체에 금이 가 있는 사람들이 영들이 좋아하는 대상이에요. 그런데 영들 중에도 고급 영과 저급 영이 있어요. 저급 영은 독한 배신을 당했거나, 심한 모멸감을 느낀 사람들의 슬픔이나 회한을 터전으로 삼는데, 육체에 난 금을 통해 들어와서는 또아리를 틀고 사람을 이리 저리 끌고 다니지요. 이렇게 되면 자기가 아닌 것에 끌려 다니는데, 제어가 안돼요.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슬픔이나 회한에 주저앉으려고 하면 이런 영의 유혹을 받게 돼요.

나는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힘들어 할 때 한동안 이런 영에 휘둘렸던 것 같아요. 그러다 어떤 경고를 받았어요. 강금실 장관의 오빠가 재즈 공연을 하는 날로 기억되는데, 집에서 나가다가 발을 헛디뎌 머리가 깨지고 목 부위에 심한 상처를 입었어요. 그 때 뭔가에 둔중하게 뒤통수를 얻어맞는 느낌이 들면서, 이대로 가면 나는 죽는다는 자각이 들었어요. 어떻게 그 짧은 순간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남재일 : 신앙을 갖게 된 이후로 뭔가 삶을 보는 눈에 많은 변화가 생긴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신앙 말고도 나이가 주는 영향도 클 것 같은데, 나이 들면서 세상 보는 눈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궁금합니다.

서영은 : 살면서 나이 든다는 것을 의식했던 적은 없어요. 서른 살 연상의 남자와 사니까 오히려 늘 실재 나이보다 스스로 나이가 적은 것처럼 느끼고 살았어요. 그런데, 나이가 몸으로 찾아왔음을 느낄 때가 있었어요. 3년 전에 피부병이 심하게 생겼는데, 원인을 알 수 없었어요. 나중에 그게 내 몸에서 일어난 일종의 통과제의 같은 거라는 걸 알게 됐어요. 그전까지 출산의 경험이 없는 내 몸은 처녀의 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피부병이 생겼다 없어진 이후로 중년의 몸태가 나왔어요.

그런 신체적 변화가 사고에도 영향을 미쳐서, 그 이전에 혐오하고 마음에서 밀어내려고 했던 속물적 삶의 태도에 대해 너그러워졌어요. 아마 신앙 때문이겠지만, 생활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는 의미들이 새롭게 다가왔어요. 그 무렵부터 아줌마로 살아온 여성들에 대해 과도하게 찬사를 보내는 버릇이 생겼어요.

남재일 : 아줌마의 어떤 점에 대해 그렇게 찬사를 보내고 됐는지 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서영은 : 아줌마를 재발견한 것은 내 삶이나 문학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내게 아줌마의 재발견은 말하자면 새로운 서사의 발견과 같은 말이거든요. 나는 아주 완성된 미학적 환타지를 설정하고 단숨에 달려가는 삶을 상상했어요. 그런데, 아줌마란 존재를 통해 배우는 것은 끊임없이 어떤 과정과 교섭하면서 지연되는 삶이죠. 서사가 무엇인지는 시간이 가르쳐 주는 것 같아요, 시간이 지닌 놀라운 진실성 앞에서는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어요.
신성이 포착된다고 할까요, 단답식 사유들이 이어져서 하나의 형체를 이루어 낼 때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공복감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되거든요. 어떤 순간에는 모순돼 보이는 듯 하지만 하나의 형체가 이루어지면 모순이 아니라 조화요 총체라는 걸 의식할 수 있어요.

그걸 느낄 때 삶은 살만하구나하는 기쁨 같은 것이 왔어요. 더 이상 내 안에 있는 힘을 끌어올려 확인하기 위해 존재를 외줄위에 올려놓을 필요도 없어졌지요. 삶의 서사는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란 확신을 하게 되면서 조화 속에서 생성된 가치가 아니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절감할 수 있었어요. 자신의 가치와 신념 이런 거 다 내려놓아야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고, 사람을 온전하게 만날 수 있어요. 자신의 가치와 신념은 언제나 동전의 한 면만을 보여줄 수 있을 뿐이지요.

남재일 : 선생님은 문학을 삶의 허무를 이기기 위해 자신을 몰두시키기 위한 대상으로 선택하셨다고 했는데, 몰입을 통한 자기 확인의 필요성이 없어진 지금은 문학에 대한 생각도 상당히 달라졌을 것 같은데요...

서영은 : 나는 세상에서 절대성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문학을 통해 절대성을 추구했어요. 절대의 이미지를 스스로 만들고, 그게 내 삶의 등불이 돼 주리라고 믿었어요. 지금도 인간이 만든 이 세상 자체에는 절대성이 없고 절대를 향한 헌신을 함으로서 불완전한 위치로나마 절대의 자리에 접근할 수 있을 뿐이란 생각을 해요. 내 생각에 변화가 있다면, 뭔가 몰두하면 내가 절대성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이란 것을 알게 됐다는 거지요. 성경공부하면서 세상의 바닥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게 됐는데, 기독교에서 하느님으로 통칭하는 어떤 세계이고, 그 세계는 자연의 이치와도 맞닿아 있지요, 영안을 뜨고 보니 절대진리가 태초부터 있었는데 내가 못 본 것뿐이었어요.

마음을 열면 하찮은 것에서도 어떤 절대성이 예정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사물 하나하나가 모순되고 파편화 돼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체를 이루면서 어떤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 자신이 절대성의 형상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알게 됐지요. 그 순간은 정말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부터 제 삶의 패러다임이 나도 모르게 바뀌었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알 수 있었지요.

남재일 : 그럼 앞으로 문학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문학적 경향이나 방법론이 상당히 바뀔 것 같은데....

서영은 : 내가 신의 의지를 드러내 보이는 파이프 역할을 했으면 싶어요. 내가 형상을 만드는 게 아니라 그냥 파이프로 전달만 하는 그런 역할 말이지요. 에세이와 소설이 교직되는 그런 작품을 지금 생각 중이예요. 신앙인으로 깨달은 것을 에세이로 쓰고, 과거에 내가 만약 신앙과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으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를 가정법의 형태로 소설로 써서 교직시키는 형식이지요.

남재일 : '먼 그대'와 같은 작품을 보면 비극적 위치에 있는 여성의 열정적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요즘 젊은 여성들의 사랑에 대한 시각에는 가부장제를 의식하는 사회학적 강박관념이 강하게 투영돼 있습니다. 그런 시각으로 보면 비극적 여성의 열정적 혹은 헌신적 사랑은 비판받기 쉽습니다. 이 문제를 포함해서 사랑에 대한 생각의 변화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서영은 : 난 남자와 여자를 나누어서 사랑을 상상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내가 여자니까 여성으로서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이지 여자의 사랑과 남자의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랑에 대한 생각은 신앙을 갖기 전이나 후나 비슷해요. 나는 사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상대를 높이고 자기를 죽이는 거라고 봐요. 일체가 되는데 상대가 자기 안에서 죽기보다는 자기가 상대 속에서 죽는 것이 생명을 만드는 행위이고, 그게 사랑이죠. 그 이외의 어떤 것도 거짓의 혐의를 벗기 어렵죠.

만물의 순환을 봐요. 애벌레가 고치가 되고 고치에서 성체가 탄생하는 과정에서도 어느 지점마다 죽음이 예정돼 있어요. 죽지 않으면 변신이 안 돼요. 자기 안에서도 새 것을 만들기 위해 죽음의 제의가 있어야 되지만, 관계 속에서 그런 제의가 매일 매일 있어야 돼요.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시대 여성들과 남성들의 사랑관은 경박해서 참기 어려워요. 인연의 값을 끝까지 다할 때 진리를 터득하게 돼 있는데, 너무 쉽게 만나고 너무 자주 헤어지잖아요. 사랑에 대해서 영화 같은 꿈만 꾸면서요.

남재일 : 요즘 한국사회의 이혼율이 세계 2위라고 하면서 가정의 위기를 거론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한국의 이혼율이 급상승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진단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급작스럽게 신장된 여성의 경제적 지위와 그에 따른 남성들의 의식의 지체를 꼽는 견해도 있습니다. 여성운동 하는 사람들은 남성들의 문화적 지체가 심각하다는 지적을 하곤 합니다. 인연의 값을 다한다는 것은 이런 관점에서는 참고 살라는 표현으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서영은 : 나는 사회적인 불평등은 해소해야 하지만 너무 거기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평등관계는 아주 기본적인 전제이지 그게 된다고 사랑이란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전혀 아니죠. 남자들은 몸에 있는 것을 내뿜는 생리구조를 갖고 있어요. 빠져나온 만큼 채우고자 하는 결핍의 존재가 남자죠. 그러니 다른 꽃을 찾아가야 하고 서성거려야 하잖아요.

여자는 몸을 통해 자기를 찢고 수용하고 생산하는 존재인데, 이게 자궁 가진 동물의 위대함이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마치 여자가 참고 수용하고 살아야 한다는 사회적 담론으로 바로 연결되는 것을 상상하는데 그렇지가 않아요. 자신 안에 수용돼 있는 힘을 발견하고 사용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거예요. 요즘의 여성들은 자기 안에 보물을 두고 남성의 흉내를 내면서 남자와 경쟁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난 그런 사회적 평등에 지나치게 몰입해서 함몰되는 것이 여성이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타까운 거예요.

가부장과 관련해서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가부장은 결핍이고 사랑이 부재하기 때문에 권력에 집착하는 존재예요. 여성이 사랑의 노예가 되어도 상관없으니 그 결핍을 채워버리면 가부장은 없어져요. 내면이 풍요로운 존재는 권력의 비교우위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들지 않겠지요. 사랑으로 충만한 여성은 가부장을 없앨 수 있다는 거지요. 사회적 평등의 추구와 함께 여성이 가진 내면적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데, 요즘은 거저 눈에 보이는 것만 강조되는 것 같아서 씁쓸해요.

남재일 : 선생님의 생각은 겉보기에는 여성문제에 대해 보수적인 관점으로 비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강조하는 지점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녀의 여자'란 작품을 보면 레즈비언 관계를 다루고 있는데, 레즈비언 관계에 대한 승인은 섹슈얼리티 문제에 대한 진보의 한 지표로 받아들여집니다. 물론 이것도 겉으로 보기에만 그렇습니다. 성문제를 정치적 관점에서 보수와 진보로 나누는 시각은 불가피하지만 사랑과 관련해서는 이런 식의 구분은 무용할 것 같습니다. 이 작품에 레즈비언 관계를 끌어들인 의도가 무엇이고, 동성애와 사랑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서영은 : '그녀의 여자'는 원래 제목이 '시간의 얼굴'인데, 시간의 흔적에 관한 얘깁니다. 주인공이 너무나 큰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 누군가를 잡아두려고 하지요. 관계 속에서 일체가 되는 것이 중요하고, 관계는 기억의 힘을 빌은 서사에 의해 유지되는데, 주인공은 너무나 절실한 나머지 자기 안에 누군가를 집어넣어 두려하지요. 이 상태에서 관계 속으로 자리를 찾아가고 그러기 위해 서사가 중요하다는 얘기를 암시하는 게 작품의 의도인데, 홍보될 때는 아무래도 레즈비언 관계가 부각돼 그게 마치 주제인 것처럼 됐어요. 나는 사랑은 레즈비언이다 아니다 이런 외형적 관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내면의 상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레즈비언 관계를 끌어들인 것은 하나의 경우에 불과할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어요.

남재일 : 여기서 '어떤 내면의 상태'라고 하신 걸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떤 것이죠?

서영은 : 그건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어떤 주관적 느낌인데....난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진리적 이성이라고 봐요, 세상 전체를 아우르려는 의지, 존재에 대한 연민, 이런 걸로 마음이 차서 사랑하는 사람으로 되어 있는 상태가 중요해요. 결코 대상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고, 주관적인 의지가 중요하죠, 그리고 사랑은 고착관계가 아니고 흐름이고 역동의 상태여서 사랑하는 사람은 주변을 살찌울 수 있어요.

남재일 : 사랑이 고착관계가 아니고 흐름이고 역동의 상태란 건 무얼 말하죠? 소유가 아니라 존재다 이런 식으로 들리기도 하는데...

서영은 : 사회를 가만히 보면 사람들은 서로 갉아 먹고 살아요. 내가 갉아먹기도 하고 남이 나를 갉아먹기도 하고.... 어떤 자리에 있느냐 그 위치가 바뀌면서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 삶이 아닌가 싶어요. 그렇게 서로 연루되고 개입돼 있다는 것은 삶의 고단함을 연상하는 비관적 감정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사랑의 필연성을 가르쳐주는 낙관적인 인식이기도 해요, 말하자면, 생의 바닥을 치게 만들어서 사랑에 눈뜨게 해주는 거지요. 사랑이 역동이고 흐름이란 건 이 바닥에서 사랑을 상상할 때 가능한 생각 같아요.

'쥴리아'란 영화가 있는데, 여주인공 쥴리아가 아버지 같은 나이의 유명작가와 살면서 글을 배우고 로맨스 작가로 성공해요. 쥴리아는 독일에서 반나치 활동을 하는 여자친구와 연인처럼 지내는데, 남편은 한발짝 떨어져서 그냥 지켜봐요. 나중에 이 친구는 살해당하고 남편은 나이가 들어 죽고, 쥴리아 혼자 남게 되는데 남편과 살던 호숫가 집에서 죽을 때까지 낚시 하면서 20년을 혼자 살죠. 쥴리아가 혼자 남아 살 수 있는 힘은 바로 기억, 그러니까 서사의 힘이죠. 남편이 주었던 사랑, 친구가 주었던 사랑 이런 걸 다 기억하면서 그걸로 충만해 하고, 나머지는 자족하고 살죠. 이 영화에 나오는 세 사람의 관계가 자족할 건 자족하고 줄건 줘요. 자족이 없으면 사랑이 역동성을 갖기는 어렵겠죠. 사랑의 역동성이란 자족한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어떤 자연스런 베풂 같은 것이겠죠.

남재일 : 기형도 시 '질투는 나의 힘' 마지막 구절이 '나는 미친 듯 사랑을 찾아 헤맸지만, 단 한번도 나 자신을 사랑하진 않았노라'입니다. 저는 한번도 자족을 통해서 베풀고 싶은 사랑의 역동성을 체험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자선행위와 같은 일순간의 퍼포먼스를 할 때 그런 유사 감정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만, 여자와 연애할 때 작동하는 것은 늘 결핍의 구조였던 것 같습니다. 살면서 그런 역동의 느낌을 가졌던 적이 어떤 경우입니까?

서영은 : 선생님이 살아계실 때였는데, 하루는 집안으로 저녁 햇빛이 들어오고 조용한 상황이었는데, 고양이가 발목을 스윽 스치고 갔어요, 그 느낌이 참 좋았는데, 고양이는 서예하고 있는 선생님에게 가서 다시 부비면서 재롱을 떨었어요. 그때 아 저기 누군가 있구나, 떨어져 있지만 내 안에 뭔가 꽉 차 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냥 존재 자체만으로 자족할 수 있었어요.

이런 느낌은 둘 사이에 어떤 서사가 있을 때 가능하겠지요. 요즘은 그런 관계를 한 사람과 맺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에게 확장해서 공동체적인 분위기로 살았으면 싶어요. 신앙이 내 몸의 모든 코드를 바꾸어서 후배는 후배대로 사랑스럽고 속 썩이는 형제에게도 내 힘을 나눠줄 수 있었으면 해요. 요새 이상한 감정을 경험하는데....집 근처에 벽돌 재생공장이 있어요. 거기서 어떤 아주머니가 시멘트가 잔뜩 붙은 벽돌을 망치로 떨어내는 작업을 해요. 적막한 동네라 그 소리가 우리 집 안까지 선명하게 들려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 소리가 처연하게 들리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뭔가 미안하다, 미안하다 이런 말이 자꾸 나와요. 외출할 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아주머니 앞에 무더기로 쌓여 있던 벽돌 덩어리가 재생이 돼서 가지런히 쌓여 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진리라는 것이 야단스럽지 않고 저렇게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하고 맞닿아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역할로 봐도 그렇고 내면으로 봐도 그렇고, 하여간 그런 감정이 들어요. 미안하다는 정서로 아주머니 하고 나하고 연결이 되니까 더 이상 남 같지 않아요.

남재일 : 혹시 지금 상영중인 '그녀에게'란 영화 보셨어요? 그 영화에 피나 바우쉬 춤도 나오고 그러는데...

서영은 : 말은 들었는데 아직 못 봤어요. 근데 왜요?

남재일 : 그 영화가 제 평점기준으로는 아주 잘 만든 영화인데, 기독교적 헌신과 모성을 버무려서 사랑에 대한 정의를 독특하게 내리거든요. 선생님하고 잘 맞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한번 보시라고요.

서영은 : 그럼 이 인터뷰 끝나고 그 영화 봐야겠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한 여성이 동석을 했다. 서영은 선생은 그 여성과 함께 '그녀에게'를 보러갔다. 나는 경복궁 어귀까지 함께 차를 타고 나오다 작별을 고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처음 봤을 때와 오늘 본 모습에서 가장 달라진 점이 무엇일까 생각해 봤다. 나는 선뜻 그게 뭐라고 꼬집어 낼 수 없었다. 그는 세상을 좀 더 원경으로 보기로 한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좀 더 관대하고 여유로워진 듯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이순의 나이로 보이지 않는 외모와 열정을 갖고 있었다.

나는 열정과 관대함은 서로 상충하는 힘들로 관계 맺고 있다고 생각했다. 열정은 육체의 힘이고 관대함은 정신의 힘이니, 정신과 육체는 불화하는 힘들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발달된 감각을 지닌 쾌락주의자는 정신과 육체의 불화를 지연시키는 능력이 있다. 우리는 그걸 타고난 낙천성이라고 말한다. 이 낙천성은 세계를 바라보는 의식과는 무관한 힘이다. 니체의 견해를 빌리면 의식은 부정적인 힘들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쾌락주의자의 의식은 감각을 보존하기 위해 세계와 제휴할 뿐이다. 그리고, 감각으로 세상을 받아들이고 교감한다.

나는 서영은 선생에게서 진지한 쾌락주의자의 미덕을 종종 발견한다. 쾌락주의자는 아무리 정교한 엄숙주의자의 도그마보다 이미 훨씬 정교한 눈으로, 혹은 몸으로 세계를 응시하고 있다. 그는 외면하지 못하고 거짓말 하지 못한다. 그래서 물처럼, 돌아가거나 건너 뛰어가지 않아도 세상이 생긴 대로 흘러갈 수 있는 것이다.

<문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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