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이번 중국방문으로 한 가지 분명해진 것이 있다. 북핵문제 해결과 관련하여 노무현 정부는 일관된 입장도, 구체적 전략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강대국에 휘둘리는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
논란이 되고 있는 '당사자간 회담 재개'가 대표적 사례이다. 정부는 중국 도착 이전 기자들에게 "(한국, 일본 등이 참여하는) 확대 다자회담을 위해 한중 양국이 노력"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지난 7일 후진타오 주석과의 정상회담이 끝난 후 공동기자회견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조속한 시일 내에 당사자간 대화가 다시 시작돼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했다고 밝혔다.
중국 측을 만나기 전에는 '확대 다자회담 개최 합의'였던 것이 정상회담 후에는 '(북미중) 3자회담 재개 합의'로 둔갑한 것이다. 지금 노 대통령을 비롯해 한국정부 측에서는 여러 가지로 변명을 하고 있지만 8일 발표된 한중공동성명을 보면 별 설득력이 없다.
공동성명 4항은"양측은 북경회담으로부터 시작된 대화의 모멘텀이 지속돼 나가고, 정세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시켜 나가기를 희망하였다"고 돼 있다. '북경회담'이란 지난 4월 베이징에서 열린 북중미 3자회담을 말한다. 반면 미국이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한국, 일본 등을 포함한) 다자간 협의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다.
이번 한중정상회담 결과를 놓고 국내 진보진영에서는 '차라리 잘 됐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대북 압박을 중시하는 미ㆍ일의 입장에서 벗어나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을 강조하는 중국의 입장에 한국이 동조했기 때문일 것이다. 양측은 공동성명 4항에서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이 가능하다고 확신하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중국의 입장에 한국이 동조한 것일 뿐, 한국의 주체적 입장이라고는 할 수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5월 미국 방문에서는 '위험 증대시 대북 추가조치 검토'에 합의했고, 6월 일본방문에서는 '대화와 압력'을 병행한다고 합의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대화 상대방에 따라 한국의 입장은 그때마다 변해 온 것이다. 다시 말해 노 대통령이 다시 부시 대통령과 대좌한다면 대북 강경조치에 합의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처럼 오락가락하는 한국의 입장에 대해 일본의 닛케이는 9일자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이에 대한 노 대통령의 자세는 정해지지 않았다. 5월 미 부시 대통령과의 회담에서는 "위험 증대시 추가조치 검토"를 합의했다. 한편 지난 달 방일에서는 "대화와 압력 중에서 대화에 비중을 두고 싶다"고 말했으며, 이번 회담에서는 압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원래 북한에 유화적인 노 대통령이 중국에 이끌려 원점으로 회귀한 인상도 있다."
'중국에 이끌려'라는 말이 뼈아프다. 한국외교의 줏대 없음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 같아서다. 중국보다 훨씬 강력한 동맹국인 미국이 대북 강경조치를 고집할 경우 노무현 정부는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베이징의 변심?**
일본 언론은 이번 한중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핵 해법에 대한 접근이 대화 중시의 한ㆍ중과 압력 중시의 미ㆍ일로 갈렸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어쨌거나 다행스런 일이라고 할 수 있다(한미공조를 중시하는 측에서는 우려할 만한 사태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한미일은 미국 주도로 대북압력만을 강조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와는 상관없이 노무현 정부가 당초 회담 목표로 공언했던 '확대 다자회담 개최 합의'가 사실상 무산됐다는 점에서 이번 중국방문은, 적어도 북핵 해법에 관한 한, 실패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실패의 원인을 따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다.
도대체 노무현 정부는 무슨 근거로 중국과 확대 다자회담 개최를 합의할 수 있다고 그토록(사전 브리핑에서 기정사실화할 정도로) 낙관했던 것일까. 한마디로 노무현 정부는 중국을 너무 몰랐던 것 같다. 동북아의 세력균형을 둘러싼 미ㆍ중의 속셈에도 무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번 한중정상회담을 앞두고 국내 외교가와 언론에는 북핵문제와 관련해 중국이 매우 적극적 역할을 할 것이라는, 지극히 낙관적인 견해가 퍼져 있었다. 지난 6월 하순 사석에서 만난 한 중견 외교관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했다.
'지난 93-94년 북핵위기 때와 이번 핵위기 때의 중국의 입장은 천양지차다. 당시에는 북한이 핵을 개발하고 있다는 미국측 주장을 중국이 수용하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중국은 북한의 핵보유를 결코 원하지 않는다. 이는 남한은 물론 일본, 타이완의 핵보유를 부추겨 동북아 국가 중 유일한 핵보유국이라는 중국의 독점적 지위를 위협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후진타오 등 새로 들어선 중국 지도부는 장쩌민 전 세대 지도부보다는 북한과의 유대감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때문에 중국은 이번 핵위기 해결에 적극 나설 것으로 보인다. 미국도 중국에게 북핵위기 해결의 책임을 떠맡긴다는 입장이다.'
요컨대 북한의 핵보유 저지에 더 다급한 측은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며, 따라서 북한의 핵보유가 거의 현실로 다가온 지금 중국은 과거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문제해결에 나설 것이라는 얘기였다.
이러한 노무현 외교팀의 대중국 인식은 국내언론에도 그대로 전달됐다. 조선일보 6월 30일자 31면에 실린 칼럼 '베이징의 변화'가 대표적이다.
"요즘 서울과 워싱턴의 은밀한 화제는 '중국의 변화'다."로 시작되는 이 칼럼은 "지금 외교가에서는 탈북자 문제만 통제할 수 있다면 중국은 미국이 추진 중인 북핵 해결을 위한 대북 압박을 지지할 것이라는 관측까지 등장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외교가에서는 '베이징의 변심'이라는 말까지 나돌 정도"라는 것이다.
이 칼럼은 이어 "분명한 것은 6.25전쟁 이후 지난 50여년간 북한의 든든한 후견인 역할을 해온 중국이 새로운 대북 접근법을 모색하고 있는 점"이라며 "후진타오 주석 체제의 등장에 맞춰 북핵 문제가 터지자 '사회주의 형제국' 북한에 대한 태도까지 바꾸려는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이 칼럼은 "미국 정부는 이런 조짐을 쌍수를 들어 반기고 있다"면서 "콜린 파월 미국 국무장관이 부시 대통령에게 '북핵 문제의 외교적 해결'을 설득할 때 내민 카드도 '중국이 뭔가 역할을 하려 하고 있으니 기회를 주자'는 논리였다"고 전했다.
아마도 주로 미국측 정보에 바탕한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대중국 인식이 노무현 정부로 하여금 '확대 다자회담 개최 합의'를 확신케 한 근거였던 것 같다. 그러나 미국과 노무현 정부가 기대했던 '베이징의 변심'은 사실이 아니었다.
***'북한의 안보 우려 해소'가 뜻하는 것**
후진타오 주석은 북한에 대한 한미일의 압박전선에 동참하기는커녕 대화에 의한 평화적 해결을 일관되게 주장한 것이다. 후 주석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우리는 조선(북한)의 안보 우려도 진지하게 고려해 해결해야 한다고 본다."고 밝혔다. 후 주석의 이같은 입장은 한중공동성명 4항에 "중국 측은 북한의 안보 우려가 해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로 명기됐다.
북한의 핵 보유로 미국보다 중국이 잃을 것이 더 많다는 것은 사실이다. 앞의 외교관의 지적대로 북한의 핵 보유는 남한, 일본, 타이완 등의 핵개발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동북아 유일의 핵 보유국이라는 중국의 독점적 지위는 사라진다. 보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최소한 20년간은 경제개발에 전념하고 싶은 중국으로서는 동북아 군비경쟁이 결코 바람직한 사태가 아니라는 점이다. 반면 어차피 군사주의 노선에 나선 미국으로서는 동북아 군비경쟁이 그다지 나쁠 것도 없다. 중국의 경제성장을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우파정권들로서도 북한의 핵 보유는 군사대국화의 매우 좋은 빌미가 된다. 일본은 지난 1998년 북한의 광명성호 발사 이후 독자적인 첩보위성을 발사하고 유사법제를 통과시키는 등 북한의 군사위협을 빌미로 군사대국화의 길을 걷고 있다. 이같은 속사정은 이미 여러 전문가들이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남한을 제외하고) 중국이 북한 핵 보유를 저지해야 할 가장 절박한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미국 주도의 대북 압박 전선에 동참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이번 한중정상회담을 통해 분명히 드러났다. 왜 그런가?
한 북한전문가는 그 이유는 '북한의 안보 우려 해소'라는 중국 측의 주장에 들어 있다고 지적했다. 더 정확하게는 이러한 중국 측의 주장을 한국 측이 받아들이지 못한 데 있다는 것이다. 앞에 말한 대로 한중공동성명 4항에는 "중국 측은 북한의 안보 우려가 해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고 돼 있다. 중국 측의 일방적 주장일 뿐, 한국 측은 이에 동조하지 않은 것이다.
북한이 미국으로부터의 안전보장을 절박하게 원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는 미국의 고위관리도 인정한 바 있다. 지난 1999년 클린턴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은 미 공영방송 PBS와의 인터뷰에서(9월 17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북한이 미사일 프로그램을 원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첫 번째 이유는 억지력 확보, 즉 안보이다. 북한이 누구를 억지한다는 것인가? 그건 바로 미국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북한에게 위협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북한은 우리를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지난 35년간 한반도문제를 연구했고 북한을 7번이나 방문했던 셀리그 해리슨은 미국으로부터의 확고한 안보가 보장되지 않는 한 북한은 결코 핵 및 미사일 프로그램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지적대로 역대 미국정부는 이러한 '북한의 안보 우려'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미국은 그동안 제네바합의 등을 통해 북한에 대해 무력위협을 하지 않겠다고 수차례 약속했지만 이는 모두 공수표로 끝나고 말았다. 지난 50년간 지속돼 온 정전협정이 북미, 그리고 남북간의 평화협정으로 전환되지 않는 한 '북한의 안보 우려'는 해소될 수 없다는 게 해리슨 등의 지적이다.
***동북아 패권을 둘러싼 미중의 대결**
이처럼 북핵 위기 해결의 최대 선결요건이라고 할 수 있는 '북한의 안보 우려 해소'를 중국이 주장했고, 한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 한국의 배후에 미국이 있기 때문이다.
미 부시행정부는 지금 북한의 군사위협을 빌미로 동북아지역에 미사일방어망(MD)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MD 구상이 중국을 겨냥한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하지만 만일 미국이 북한의 안보 우려를 해소해주고 이에 따라 북한의 군사 위협이 사라진다면 MD 구축의 표면적 근거도 없어지게 된다. 부시 행정부로서는 결코 원치 않는 상황전개인 셈이다. 북미 평화협정과 동북아 MD 구축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과제이다. 따라서 한미군사동맹에 발이 묶여 있는 한국 정부로서는 '북한의 안보 우려 해소'라는 중국 측의 주장에 선뜻 동조할 수 없는 형편이다. 한국 측의 동조는 곧 한미일 군사동맹의 와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앞에 말한 북한 전문가는 "'북한의 안보 우려 해소'라는 중국의 주장에는 중국 자신의 안보 우려가 포함돼 있다"면서 "이같은 주장에는 한미일이 벌이는 MD 구축 노력에 대한 불쾌감과 함께 간접적 경고가 담겨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한미일의 군사협력이 강화되면 될수록 중국과 북한간의 협력도 강화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번 한중정상회담의 결과를 놓고 보면 노무현 정부의 외교팀이나 언론들이 이러한 측면을 간과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즉 북핵문제의 배후에는 동북아 패권을 둘러싼 미중간의 물밑 대결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미국은 북한 핵을 빌미로 중국 봉쇄를 위한 한미일 군사동맹의 협력 수준을 노골적으로 강화시켜 나가고 있는 반면, 중국은 그러한 시도를 용납할 수 없다는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리고 그 틈새에 남북한이 끼어 있는 형국이다.
***노무현 정부, 무엇을 할 것인가**
장기적으로 보면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이라는 중국 측의 입장이 바람직한 것은 물론이다. 한국이 미국의 하위동맹국으로서 중국과 군사적 대결을 벌여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더구나 한국경제에서 중국의 경제적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동북아시대를 지향하는 마당에 중국과의 선린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는 반대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주한미군 철수 위협, 보복관세, 신용평가 등 미국의 정치ㆍ군사ㆍ경제적 압력에 밀려 한국은 부시 행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대(對)중국 군사포위망에 한발한발 끌려들어가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중국과의 관계 강화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단기적으로 미국의 압력에 밀려 중국과의 대결적 자세를 강화하고 있는 형국이다.
게다가 한국에게는 활용할 만한 외교적 지렛대가 거의 없다. 그나마 김대중 정부 시절에 이뤄놓은 남북한간의 관계개선이나 상호신뢰도 노무현 정부 들어 상당 부분 훼손된 상태다.
미국에 가서는 북한을 능멸하고, 일본에 가서는 민족지도자 백범을 깎아내리며, 중국 방문 전 인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전임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폄하한 노무현 대통령의 일련의 언동이 현 정부 대북정책의 실상을 잘 말해준다. 미국의 MD동참ㆍ대북봉쇄 요구를 단호히 거부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미국에 가서는 대북 강경책을, 중국에 가서는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을 합의한 노무현 현 대통령의 태도는 너무도 대비된다.
한마디로 현 정부에는 대북정책에 관한 입장도, 노선도, 철학도, 전략도 없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게다가 외교안보팀 내부는 미국의 군사협력을 강조하는 측과 중국과의 경제협력을 중시하는 측으로 갈려 어중간한, 불안한 동거를 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상태가 계속된다면 한국은 결국 우리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가장 힘센 자에 이끌려 가고 말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한 북한전문가는 이렇게 말한다.
"원래 한국에게는 북핵 문제 해결과 관련해 이렇다 재량권이 없는 입장이었다. 그나마 DJ때 쌓아놓은 남북관계 개선 등의 성과도 상당 부분 까먹은 상태다. 현 정부는 한반도 문제에 대한 능동적 청사진을 갖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분명한 방식의 문제해결을 추구하다 보니 오락가락 한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전략적 모호성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 때를 기다려야 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무작정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나름대로의 외교적 지렛대를 마련해가야 한다. 한국이 확보할 수 있는 최대의 외교적 지렛대는 남북관계이다. 조용히 남북 경제협력과 신뢰구축 등을 통해 나름대로의 외교적 지렛대를 키워가야 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