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전쟁은 끝났다. 인류의 양심을 시험했던 피의 잔치는 막을 내렸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이 세계를 지배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똑똑히 선포한 제국의 취임식은 미ㆍ영 연합군의 거칠 것 없는 바그다드 점령과 함께 끝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간단한 승리로 끝난 전쟁의 그림자가 아직도 미국 땅 주변을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매캐한 화약 냄새마저 풍기는 미국의 언론은 ‘전쟁’이라는 해커에게 점령당한 웹사이트처럼 전쟁이 끝난 지 두 달이 다 된 지금까지도 온통 “전쟁, 전쟁, 오로지 전쟁” 이야기뿐이다. 미국 환경보호국(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이 공들여 작성한 환경 보고서를 백악관이 ’사전검열‘하면서 의미심장한 정보들을 의도적으로 삭제했다는 엄청난 '사건'조차 “후세인이 죽었을까 살았을까” 따위의 유치찬란한 ’뉴스‘에 밀려서 하찮게 취급될 정도이다. 말하자면 시민들의 ’알권리‘와 같은 삶의 소중한 가치들이 ’전쟁 이데올로기‘라는 유령에 의해서 실질적으로 ’다운(down)'되다시피 한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웹사이트에 대한 해킹 사례들**
여기서 ‘다운(down)'이라는 표현은 ’웹사이트(website)'를 운영하는 컴퓨터가 기능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없어서 사이트의 내용을 아무도 볼 수 없게 된 상황을 일컫는 말이다.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사람들이 자신의 정치적, 사상적 지향점은 물론 취미나 기호에 따른 견해를 인터넷 웹사이트를 통해서 표현하는 일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뜻에 어긋나는 웹사이트를 공격해서 서버(server: 웹사이트를 제공하는 컴퓨터)를 ‘다운’시키거나 홈페이지의 내용을 완전히 엉뚱한 내용으로 바꿔버리는 일도 드물지 않게 발생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 몇 가지만 기억해보자.
비교적 인터넷의 초창기라고 볼 수 있는 1996년 8월에 일단의 해커들이 미국 법무부(Department of Justice)의 홈페이지에 침투하여 히틀러의 사진을 올리고 법무부의 이름을 ‘Department of Injustice(不義)’로 고쳐 놓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달에는 ‘스웨덴 해커 연합(Swedish Hackers Association)'이라고 불리는 해커 그룹이 미국 CIA의 홈페이지를 장악하고 CIA의 이름을 ’중앙 바보부(Central Stupidity Agency)'로 바꿔놓는 사건도 있었다. 1998년에는 전설적인 해커 케빈 미트닉(Kevin Mitnick)의 체포에 분노한 해커들이 뉴욕 타임스의의 웹사이트를 공격해서 신문의 이름을 ‘여성들을 위한 해커들(Hackers for Girls)'이라고 바꾸어 놓는 일도 있었다.
‘해킹’에서 차츰 ‘인터넷 테러’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이러한 공격은 컴퓨터의 보안 시스템이 강화될수록 더욱 발전하여 1999년에는 미국 상원과 백악관을 비롯하여 미 육군의 웹사이트마저 해커들에게 농락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또한 유명한 경매 사이트인 이베이(eBay)의 웹사이트가 어느 해커에게 완전히 함락 당하여 단순히 홈페이지의 겉모습이 변조되는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경매와 관련된 판매 가격이 침투한 해커의 손에 의해서 마음대로 조정되는 일이 발생하여 큰 충격과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그 뿐이 아니다. 2001년에 미국의 스파이 비행기가 중국에 불시착하여 미국과 중국 사이에 정치적인 긴장감이 고조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에 분노한 중국의 해커들이라고 추측되는 그룹이 백악관과 CIA를 비롯한 미국 연방 정부 기관들의 웹사이트에 침투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그밖에 마이크로소프트나 AOL과 같은 대표적인 IT 기업들의 웹사이트가 해킹 당한 사례는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거론할 수조차 없을 정도이다.
***서비스 거부 공격**
이렇게 특정 회사나 기관의 웹사이트의 내용을 변조할 정도로 치명적인 공격은 주로 컴퓨터와 네트워크의 기술적인 원리와 약점을 날카롭게 파악하고 있는 해커들이 수행한 경우가 많다. (이런 해킹 기술은 대중화되어서 이제는 고급 기술에 속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서 많은 수의 평범한 네티즌들이 힘을 합해서 (혹은 소프트웨어를 이용해서) 특정 웹사이트를 짧은 시간동안 집중적으로 방문함으로써 해당 서버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방법도 있다. 이러한 방법은 흔히 ‘서비스 거부 공격(Denial of Service attack)'이라고 불린다. 지난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에서 미국의 안톤 오노가 과장된 몸동작을 써서 김동성 선수의 금메달을 훔쳐간 사건이 있었다. 이에 격분한 한국의 네티즌들이 오노의 홈페이지를 제공하는 서버를 공격해서 기능을 마비시킨 일이 바로 ’서비스 거부 공격‘의 예다.
미국과 영국의 연합군이 이라크 땅에 엄청난 양의 ‘열화 우라늄(depleted uranium)탄’을 퍼부어서 아이와 여성을 포함한 이라크 시민들은 물론 전쟁에 참가한 미국과 영국의 군인들마저 실로 끔찍하고 치명적인 재앙에 노출시키고 있는 동안, 사이버 공간에서는 전쟁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이 서로 상대방의 입장을 표방하는 웹사이트를 공격하는 일종의 ‘사이버 전쟁’이 일어나서 관심을 끌었다. 이 사이버 전쟁에서 사용된 무기가 바로 상대방 웹사이트의 해킹 혹은 ‘서비스 거부 공격’이었다. 이러한 사이버 전쟁의 양상과 관련해서 런던발 로이터통신은 지난 3월 29일에 다음과 같은 소식을 타전했다.
“이라크 전쟁의 지지자들과 반대자들은 스프레이 페인트나 플래카드와 같은 전통적인 방법이 아니라 ‘사이버 행동주의(cyber activism)'를 실천하기 위한 일환으로 직접 웹사이트를 해킹함으로써 자기들의 입장을 표출하였다.“
이 기사에 따르면 미국이 이라크에 대한 침공을 개시한 지 일주일만에 전세계적으로 무려 2만개의 웹사이트가 ‘사이버 행동주의’의 표적이 되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제일 치명적인 공격을 받은 웹사이트는 유명한 아랍권 뉴스 사이트인 ‘알자지라(al-Jazeera)'였다.
“가장 주목할 만한 희생양은 영국과 미국 병사의 주검과 전쟁 포로를 담은 필름을 방영하여 많은 서구인들의 분노를 자아낸 카타르의 위성 TV 네트워크인 알자지라였다.”
알자지라의 영어판 페이지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에는 ‘서비스 거부 공격’을 당해서 아무도 내용을 볼 수가 없었고, 며칠 뒤에 영어판 페이지가 겨우 복구되었을 때에는 사이트를 방문한 사람들의 눈앞에 난데없이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하라(Let Freedom Ring)"는 말과 함께 미국 성조기 로고가 등장하여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알자지라의 영어판 페이지가 해킹을 당해서 내용이 변조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 ‘애국 자유 사이버 민병대(Patriot, Freedom Cyber Force Militia)'라고 이름을 밝힌 미국 ’해커‘들의 소행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의 이름을 사용하지 말라**
실제 세계에서 이라크와 미ㆍ영 연합군 사이에 존재하는 현격한 무력의 차이는 사이버 세상에서도 그대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시작된 곳도 미국이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해커들이 등장한 곳도 미국이 아니었는가? 그러나 합법과 비합법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해커와 자유주의자들을 위한 값진 정보를 제공하는 계간지인 [2600]의 편집진은 2003년 봄호에서 “우리의 이름을 사용하지 말라(Not In Our Name)"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서 ‘애국 자유 사이버 민병대’와 같은 집단은 진정한 해커들과 같은 부류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밝혔다.
“하나의 집단으로서의 해커는 스스로를 특정한 정치적 당파성이나 국가에 소속시키지 않는다. 한편 개인으로서의 해커는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우리는 보다 생각이 깊고 또한 기본적인 권리를 위해서 권력을 쥐고 있는 세력과 끊임없는 투쟁을 벌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좀더 냉소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주어진 답변이 어떤 식으로든 완벽하게 증명되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한다. 이러한 점들로 비추어 보았을 때, 누구든지 해커가 전쟁을 지지한다 혹은 반대한다고 말하거나, 부시에게 충성한다 혹은 부시를 혐오한다고 말하는 것은 주제가 넘은 일이 될 것이다.”
[2600]을 통해서 활동하는 해커들은 알자지라 웹사이트의 해킹을 자기들과 같은 ‘진정한’ 해커들의 소행으로 해석한 미국 사회가 자신들에게 (평소의 차가운 시선과 달리) 은근한 호감의 눈길을 던진 사실에 당혹스러워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진정한 ‘해커 정신’은 권력이 정보를 독점하는 것을 막고 시민 사회의 기본적인 권리를 지키는 ‘자유 정신’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름에서부터 유치한 냄새가 나는 ‘애국 자유 사이버 민병대’의 소행은 비록 그들의 이름 속에 ‘자유’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진정한 자유 정신과 아무 관련이 없는 눈먼 애국주의의 산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름을 사용하지 말라”는 글이 밝히고 있는 해커의 입장이 사실이라면, ‘생각이 깊고’, ‘기본적인 권리를 위해서 권력을 쥐고 있는 세력과 투쟁’을 벌이는 해커의 눈에 미국 땅을 배회하고 있는 (전쟁) 유령의 끔찍한 형상이 보이지 않을 리가 없다. 함께 뛰놀던 귀여운 여동생이 폭탄을 맞고 숨지자 제발 대답을 해보라며 울부짖는 눈이 커다란 소녀, 귀가 잘려나가 피투성이가 된 갓난아이를 안고 어쩔 줄 몰라하는 젊은 엄마,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하는 할머니와 여인네들, 줄줄이 시체가 되어 실려 나가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허공만을 응시하는 늙은 사내들, 이 무고하고 가엾은 사람들의 귀에 대고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하라”고 떠들어대다니 도대체 그 ‘자유’는 무엇을 위한 누구의 자유란 말인가?
인터넷의 출현과 더불어 세상에 등장한 새로운 형태의 정치 행위인 ‘사이버 행동주의’는 앞으로 점점 더 조직화되고 강화되어 나갈 것으로 예측된다. 이러한 ‘사이버 행동주의’는 시민 스스로 정치적 입장을 표출하는 방법의 하나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문제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모든 정치적 행위가 그렇듯이 표출하고자 하는 정치적 입장이 인류 사회 전체의 자유와 진보에 기여하는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한다면 그 ‘사이버 행동주의’란 결국 맹목적인 파괴행위로 그치게 될 뿐이다. 그런 점에서 보았을 때 세계 어느 나라보다 현실 참여적인 한국의 네티즌들이 만들어나가는 ‘사이버 행동주의’의 다양한 내용과 형식은 실제로 인류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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