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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가 오락입니까?”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29>

“민족주의를 무슨, 오락으로 아나 보죠?”

연변을 방문하는 일부 한국인의 과도한 민족주의 과시를 회고하던 연변의 중견작가 우광훈씨(50세)의 이 말은 분노라기보다 탄식이었다. 그의 회고에 등장하는 한 한국인은 한중수교가 맺어지기도 전에 연길에 와서 택시 기사에게 돈은 얼마든지 주겠다고 윽박질러 택시에 태극기를 꽂고 할 일도 없이 시내를 빙빙 돌았다고 한다.

이런 돌출행동은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지면서 수그러들었지만, 같은 심리상태는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다고 우씨는 말한다. 만주가 옛날에 우리 민족의 판도였다느니, 정계비의 토문강이 송화강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간도는 우리 땅이라느니 하는 주장이 중국 당국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켜 조선족 정책에 불리한 조건을 형성하고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그리고 이런 지적조차 ‘패배주의’라고 매도하는 한국인들의 민족주의는 과연 누구를 위한 민족주의인가 그는 묻는다.

중국 조선족은 현실 속에서 늘 ‘민족’을 의식하고 살지 않을 수 없다. 가장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연변자치주에서도 조선족 인구비율은 40% 전후에 불과하다. 일상생활 속에서 이민족과 끊임없이 마주쳐야 하고, 사회생활을 위해서는 중국어도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들에게 민족주의는 현실에 대한 실제적 고민이다.

대표적인 문제의 하나가 자녀교육이다. 조선어로 공부하는 학교에 보낼 것인가, 중국어로 공부하는 학교에 보낼 것인가. 조선족 학교에 다니며 중국어를 덜 익힐 경우 진학과 취업에 선택의 폭이 좁아진다. 그러나 꼭 중국 명문대학을 나와 중국사회에서 출세하는 것보다 자기 문화를 지키며 그 속에서 사는 것이 더 행복한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있다.

이 갈등을 극복하는 길은 조선족 사회가 잘 발전해, 그 안에서 일 잘하는 것이 민족사회를 떠나 이민족들 사이에서 출세하는 것 못지않게 보람있는 인생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족의 민족주의는 조선족 사회의 현실적 발전으로 귀결된다.

한편 한국내에 사는 한국인의 민족의식은 어떠한가? 대다수 사람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이민족을 접할 일도 없고 외국어를 쓸 필요도 없다. 대통령에서 노숙자까지 모두 같은 민족이다. 따라서 ‘민족’을 의식할 현실적 필요가 없다. 정치를 걱정하는 데도, 돈벌이를 궁리하는 데도, 먹고 마시고 노는 데도, ‘민족’이 실질적 변수로 등장하는 일은 별로 없다.

현실에 자극받지 않는 민족의식은 관념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대다수 한국인에게 ‘민족’은 거룩한 관념이다. 먹고 살기 위해 온갖 추잡한 짓을 하는 사람도 ‘민족’의 거룩한 이름 앞에서는 처신을 삼가야 한다는 관념을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은 가지고 있다.

이에 비해 조선족의 민족의식은 현실적이다. 우리 아이들이 고민을 덜 하고 더 행복하게 해 주는 길이 무엇이냐, 그 길을 찾는 실제적 노력이 그들의 민족주의다. 중국의 국력을 키우는 데 공헌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일본의 투자를 유치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타협주의? 패배주의? 타협도 좋고 패배도 좋다. 조선족 자제 중 빼어난 인재들이 민족사회를 떠나 사는 길을 강요받는 이 현실을 개선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한국인의 민족주의는 국가주의와 혼동되기 쉽다. 전세계 8천만 가까이로 추산되는 한민족 인구의 60%가 남한에 살고 있고, 경제주체로서도 다른 어느 곳의 한민족 집단보다 월등한 규모를 가지고 있다. 그 속에 사는 한국인으로서는 한국인이 한민족을 대표한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중국 조선족이든, 러시아 고려인이든, 재미동포든, 재일동포든, 한민족의 일원으로 행세하려면 뛰어난 민족성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하고 또한 한국을 사랑해야 한다고 당연하게 생각한다.

닥쳐오는 세계화의 시대, 통일의 시대에 이런 민족주의가 바람직한 마음가짐이 될 수 있다면 참 다행한 일이겠다. 그런데 다른 문명권들이 블록화의 길을 걷고 있는 세계화의 시대에 이웃 나라들을 깔보고 미워하려고만 들며 블록화를 거부하는 독선이 바람직한 자세가 될 수 있을까? 다른 체제를 겪어 온 한민족 집단들을 포용해야 할 통일의 시대에 우리 사회의 관념과 표준에 벗어나는 것을 일체 배격하는 편협성이 바람직한 태도가 될 수 있을까?

한국의 민족주의는 조선족의 민족의식에서 배워야 할 것이 많다. 한국인이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영향력 앞에 노출되어 있는 동안 조선족은 중국의 통치권 앞에 노출되어 있었다. 각자에게 주어진 서로 다른 조건 속에서 각자가 어떻게 스스로를 지키고 키워 왔는지는 서로 배울 일이다. 그러나 민족주의를 거룩한 관념이 아니라 괴로운 현실로 끌어안고 씨름하는 자세는 단연 한국인들이 배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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