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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사상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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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사상 <하>

신세대를 위한 論語 30강 <11>

***한글 번역문**

번지라는 제자가 인(仁)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답하기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논어 원문**

樊遲問仁. 子曰, “愛人.” (論語, 顔淵)

***한글 독음**

번지문인. 자왈, “애인.” (논어, 안연)

***원문 자구 주석**

樊遲問仁 : 번지는 제자. 번지가 인(仁)에 대해 물었다.
子曰, 愛人 : 애인(愛人)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목적어 구조. 사람을 사랑하다.

***해설**

예(禮)에는 본래 두 가지 작용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구별, 하나는 융합.

이게 무슨 뜻일까요? 예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상하(上下), 존비(尊卑), 친소(親疏; 촌수의 가깝고 멈), 원근(遠近; 관계의 멀고 가까움)을 구별하여 차별화하는 것입니다. 일괄 평등하다면 예라는 것이 굳이 있을 필요가 없겠죠. 아버지와 아들이 인격적으로는 평등할지언정 가정 내에서의 지위가 같을 수 없습니다. 그건 황제와 신하, 남편과 아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게 구분입니다.

예의 또 다른 작용은 위와 같은 상하 존비 친소 원근의 관계를 조절하여 서로를 화기애애하게 융합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점이 없다면 예란 단지 구속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버지가 아들보다 나이가 많고 경험도 많고 돈도 많이 번다 하더라도 그러나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전제가 되지 않는다면 부자 관계는 원만하기 힘듭니다. 아들의 경우도 아버지를 믿고 존경하는 마음이 없다면 아무리 돈 많은 가정이라 하더라도 화목하기는 힘듭니다. 이처럼 사랑하는 마음과 존경하는 마음, 이러한 마음을 갖추게끔 유도하는 작용이 예에는 있습니다. 버릇 없이 키운 자식이 나중에 커서 대개 애비를 패고 그러잖습니까? 적절한 규범과 절제는 결국 원만한 관계를 제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에는 융합 작용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이게 융합입니다.

전자는 구별에 주안점을 두었던 것이고, 후자는 융합에 중점을 두었던 것입니다. 예에는 본래 구별과 융합의 두 가지 기능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융합의 핵심은 인자하고 자애롭고 후덕한 마음씨가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공자 이전까지는 이 점에 대해 충분히 인식되거나 적용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공자는 인(仁)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후자의 활용과 적용에 견실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습니다. 이에 따라 예(禮)의 융합조절 기능이 강화됨으로써 삼엄한 등급체계의 종법제도 아래서도 온정이 넘치는 따뜻한 인간관계가 형성될 수 있도록 배려했던 것입니다.

<논어>를 보면 예(禮)보다도 오히려 인(仁)이란 글자가 훨씬 많이 등장하며--105 조목, 인(仁)에 대해 논술한 대목도 58 조목에 달하는 것으로 보아 공자가 인(仁)에 대해 거는 기대와 강조의 정도를 쉽사리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仁)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간단한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랑하는 마음씨」(愛心)라고 하겠습니다. 樊遲問仁. 子曰, “愛人.” (안연편)

그러면 어떻게 사람을 사랑할까요? 여기서 사랑이란 남녀간의 사랑이나 친구간의 사랑이 아니라, 이성적인 도덕관념에 기초한 자각적인 상호간의 이해와 존중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자기 이외의 사람에게는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고 했던 것이며, 진심과 이해심(「忠恕」)을 강조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겸손하고 근신하는 태도를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효(孝)의 덕목이 대단히 중요한데, 효는 사랑하는 마음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부모님의 뜻을 잘 헤아려 잘 행동하는 이러한 효를 사회로 확대하게 되면 곧 신하가 임금에게 진심과 성의로 대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논어의 제1편 첫머리 <학이편>에서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됨이 효순하고 겸손하면서 웃사람에게 덤비는 자는 드물다. 웃사람에게 덤비는 사람치고 사회질서를 해치지 않는 자 없다. 그러므로 사람 도리를 하는 자는 바탕을 중시하는 것이며, 바탕이 바로 되어야 도(道는 길 _누구나 가야할 또는 가는 길-- 지켜야 할 도리)가 서게 된다. 효순하고 겸손한 것이 바로 인의 바탕이 아닐까?” 其爲人也孝悌, 而好犯上者鮮矣. 不好犯上而好作亂者, 未之有也. 君子務本, 本立而道生. 孝悌者, 其爲仁之本歟? (학이편)

물론 인(仁)의 내용은 이것 말고도 더 있습니다. 그러나 인의 핵심은 바로 이러한 혈연관계에서 출발한 「사랑의 마음 씀씀이」를 확대 재생산하게 되면 아들이 부모를 사랑하고, 형님이 동생을 사랑하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동생이 형누나를 사랑하고, 신하가 임금을 사랑하고, 임금이 신하를 사랑하고 ..... 그리하여 가정과 사회와 국가가 화목하게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의 운용은 화목하게 하는 게 제일"이라 했습니다. (禮之用, 和爲貴) 그렇지만 신분이 혼란스러워지면 안되므로 "예로써 절제하지 않으면 역시 성공할 수 없다" (不以禮節之, 亦不可行也)고 하여 결국 예를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누차 언급했다시피 예에는 단지 삼엄하고 엄격한 등급질서만이 있는 것은 아니고 서로간의 유대관계를 온정이 넘치게 만드는 인의 성분도 있기 때문에 오로지 형식적인 복장이나 예식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있는 "이성적인 도덕관념에 기초한 자각적인 상호간의 이해와 존중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는 그 이전의 내용과는 상당히 다른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안과 밖이 조화롭게 결합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공자의 생각에, 인(仁)이 발휘된다면 예는 온정이 한결 흐르는 대신 엄격함은 훨씬 줄어들게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사회는 다시 안정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논어 위정편>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백성을 다스리는데 단지 권력과 법률로써 몰아부친다면 백성들이 하여간에 법과 형벌이 무서워서 죄를 범하지는 않겠지만 부끄러워하거나 수치스러운 마음은 갖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도덕을 가지고 교화하고 예절을 가지고 지도한다면 백성들은 부끄러워하거나 수치스러운 마음이 생겨 당초부터 죄를 범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而且格.

이렇게 본다면 공자의 사상이란 일종의 온화한 개혁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는 옛 것과 새로운 것을 절충하여 예(禮) 속에 포함된 강제적인 엄격함을 다소 제거하고 그 자리에 따뜻한 마음씀씀이를 추가하였던 것입니다. 그 추가된 부분이 바로 인(仁)으로, 이 인의 개념을 가지고 당시 사회난맥상을 치유하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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