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연재되었던 “반전ㆍ평화 외치는 한국과학기술자는 없는가”라는 ‘Citisci의 과학기술@사회’의 객원칼럼은 그동안의 다른 칼럼에 비해 매우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만큼 칼럼이 논쟁적이기도 했고 민감한 쟁점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이번 글은 객원칼럼에 달린 답글들에 대한 일종의 진단이다. 비록 시간이 조금 지나기는 했지만, 지난 칼럼에 대한 다양한 반응들을 다시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자들이 “과학기술자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물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칼럼의 내용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들은 대략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우선 “과학기술은 활용하기에 따라 좋은 방향으로도 나쁜 방향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견해가 있었다. 이러한 견해는 “과학적 지식에 대해서는 좋다거나 나쁘다는 판단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입장과도 연결된다. 이런 생각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과학기술을 너무 협소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만약 과학기술활동을 실험실 수준의 지식생산활동 정도로 생각한다면 ‘과학은 양날의 칼’이라는 견해가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과학활동은 대개 특정한 목표의 프로그램 하에서 진행되고 있어서 연구활동의 명시적 의도를 알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연구를 통해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얻어질 수도 있지만 이런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현실과 다르며, 과학기술의 부정적 결과에 대해 과학기술자에게는 전혀 책임이 없다는 논리로 이어가기 위한 중간매개 정도로 활용하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이렇게 “과학기술자는 지식과 인공물을 만들어낼 뿐”이라는 주장을 유지하다 보면 과학기술이 사회에 긍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누구의 공로인지도 애매해진다.
이런 견해의 변주이지만 궤를 달리하는 견해도 있다. 이들은 군사연구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현실적으로 불가피하니 그것을 상업적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듀얼유스(dual use)전략을 채택해야 한다거나, 장기간 많은 자원이 필요한 연구에 투자를 하기 위해서는 군사연구가 유익하다는 식의 주장을 한다. 이런 사람들은 적어도 군사적 “목표의” 연구가 있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보다 진지한 고민은 하지 않는다. 어떤 영역에 대해 지원을 한다는 것은 그 분야를 성장시킨다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다른 분야에 대한 지원의 축소를 의미한다면 이런 측면까지 고려한 논변이 필요하다. 이런 설명없이 앞서와 같은 실용적인 이유로 군사연구를 옹호하게 되면 결과적으로는 소모적인 군비경쟁과 그로 인한 파괴에 대해서는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셈이다.
셋째로는 “무기를 개발하는 과학기술자는 극소수이며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첨단무기를 개발하는 과학기술자는 거의 없다”는 견해가 있었다. 많은 과학기술자들이 매우 다양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화학무기나 생물학무기에 대해서 천문학자들이 어떤 입장을 말한다면 조금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을 보자. 많은 과학기술자들이 자신들의 전문적인 세부전공을 넘어 과학기술정책,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발전방향, 거기에 필요한 제반 요소들에 대해 자신들의 소신을 갖고 있고 실제로도 발언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게 되면 세부전공을 따지고 연구에 참여한 당사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태도는 일관성이 결여된 것으로 보인다. 개별 과학기술자들 또는 집단으로서 과학기술자들이 과학기술에 대해 발언하는 게 당연하다면 부정적인 영향에 대한 책임도 감당하려고 해야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앞의 ‘양날의 칼’론이 진리추구 또는 지식생산의 측면을 과학기술연구의 중심으로 보고 있다면 과학기술자들의 상당수가 피고용인이라는 점을 들어 “의사결정의 권한이 없는 과학기술자에게 책임을 말할 수 있는가”라는 견해도 있었다. “전쟁은 문과출신들이 일으키는 건데 왜 과학기술자가 책임을 지냐”는 논외로 하더라도 ‘어떤 권리도 권력도 없는 우리 과학기술자들에게 책임을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닌가’라는 불평은 우리나라 과학기술자들의 현실의 일면을 반영하는 듯해서 뼈아프게 들렸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과학기술자들이 정치적으로 과소대표되고 있는 상황이 단지 문과계열들의 음모 때문인가? 그리고 과학기술자들이 변호사같은 다른 전문직에 비해서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이유가 “의사”나 “변호사”의 전략 때문일까? 오히려 정치ㆍ경제적인 영역에서 활동하는 과학기술자들을 찾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아쉬운 얘기지만 과학기술계가 사회적으로 책임있는 위치로 자리매김하는 데에 실패했던 경험들이 누적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힘없는 과학기술자’라는 담론은 현실의 일면을 묘사하고 있지만 자칫하면 과학기술자의 적극적ㆍ능동적 역할을 미리 포기하게 만드는 효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 표현이다.
지금 우리나라 과학기술자들은 다양한 생각들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자신의 이름을 걸고 공개적으로 진지하게 발언하는 데에 대해서는 꺼려한다. 개혁적인 젊은 연구자들은 그들의 주장을 경청해주거나 수용해줄 수 있는 중견 연구자들을 찾지 못해 현실을 인정하고 마는 경우가 많다. 대덕연구단지의 인터넷언론인 대덕넷(http://www.hellodd.com)의 기사에서도 세대교체를 역설한 것도 유사한 맥락이다.
게다가 이들을 품어줄 제도적인 기반도 없다. 예를 들어 미국 전기전자공학회(IEEE)는 1972년 샌프란시스코만 지역의 교통시스템의 위험요소에 대해 내부고발을 했던 3명의 과학기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회적 책임을 생각하는 컴퓨터전문가들>(CPSR, Computer Professionals for Social Responsibility)들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단체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나라는 개혁적인 과학기술자들이 의견을 교류할 수 있는 단체도 거의 없으며 과학기술자들의 공식적인 단체인 학회에서도 사회적인 책임에 대해서는 활동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얼마 전 인터넷 상에서 민간기업 연구원, 교수, 정출연 연구원, 대학원생 등이 참여했던 <과학기술인 반전평화선언>은 또하나의 매우 의미있는 사례였다. 비록 전체 과학기술자들의 수에 비해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것도 아니었고 언론의 주목도 받지 못했지만 이번 <반전평화선언>을 통해 우리나라에도 과학기술자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연구자들이 상당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지난 칼럼에서 제기했던 “반전평화를 외치는 한국의 과학기술자는 없는가”라는 질문은 어느 정도 답변이 되었지만 처음에 던졌던 문제제기는 여전히 의미가 있다. 모든 교사들이, 또는 모든 의사들이 단일한 정치적 입장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며 이는 바람직하지도 않다. 과학기술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칼럼에서 던진 질문은 모든 과학기술자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자들 중에는 “반전평화”라는 가치를 옹호하는 그룹 또는 정치적으로 활성화된 그룹은 없는가라는 것이었다.
지난 이십여년 동안 우리 사회가 다양화되면서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갖는 단체들이 생겨났지만 왜 유독 과학기술계에는 “반전평화블록”에 동참할 수 있는 그룹은 부재했을까. 이제 질문을 조금 확대해서 던져보자. “왜 사회적 책임을 생각하는 한국과학기술자 그룹은 없는가”.ⓒ Carl Mitcham and R. Shannon Duval (2000), Engineering Ethics, (New Jersey, Prentice-Hall)
※ ‘Citisci Group’은 모두 5인(강양구, 김명진, 김병수, 김병윤, 안성우)으로, 자연과학ㆍ공학과 인문ㆍ사회과학, 학계ㆍ연구소와 시민운동, 제도권과 비제도권, 학생ㆍ직장인과 룸펜ㆍ백수 사이의 경계를 어지럽게 넘나들고 있는 인간들의 종잡을 수 없는 집단이다. 이들은 과학기술을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주류적 관점에 피곤함을 느끼고 이를 갈아치울 수 있는 이론과 실천을 모색중이라는 점에서(만)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들에게 연락하기 위해서는 citisci@jinbo.net이라는 경로를 통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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