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중생 사망사건이 촉발시킨 촛불시위 이후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하나의 커다란 화두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과연 미국은 우리의 생명과 안전과 번영을 의탁해도 될 만큼 믿을 수 있는 우방국인가“라는 의문이 점점 더 커가고 있다.
<사진> 김민웅의 <밀실의 제국> 프레시안
예컨대 북한핵 문제 해결을 위한 북미중 3자회담 결정에 앞서 북한의 체제 붕괴를 주장하는 정책제안문서가 미 행정부에서 회람된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또 부시 행정부 내 강경우파와는 대척점에 서 있는 한 진보적 학자(찰머스 존슨)가 부시 행정부의 궁극적 목표는 김정일 체제의 붕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을(프레시안 4월 18일자 보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나아가 미국 정치ㆍ군사 지도자들의 말을 더 이상 믿지 말 것이며, 한국이 살 길은 미국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라는 이 학자의 충고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9.11테러 이후 아프간, 이라크 등에서 이른바 예방전쟁을 벌이며 무력에 의한 세계지배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미국의 행태는 냉전시대의 그것과는 분명 다르다. 그에 따라 냉전시절 공산주의의 위협에 맞서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했던 한국과 미국간의 관계도 앞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고, 또 달라져야 한다.
한미관계의 재설정이라는 막중한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우선 시급한 것은 미국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아는 것이다. 본질은 무엇인가, 달라진 것은 무엇이며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김민웅의 새 책 <밀실의 제국>은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한 한 지식인의 20여년에 걸친 탐구를 담은 결과물이다. 특징은 대단히 래디칼(radical)하다는 점이다. 다소 거칠게 요약한다면 저자는 미국의 세계전략을 ‘군사력과 전쟁에 의한 세계지배’라고 파악하면서, 이는 평화와 안정을 바라는 한반도 주민들의 염원과 결코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루빨리 미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것이 한반도 주민들의 이익과 합치된다는 것이다.
“부시정권의 기본 방향은 결국 ‘전쟁기구의 강화와 전쟁경제의 부양’이며, 이에 기초한 세계재패라고 할 수 있다.”(<밀실의 제국> 42쪽)
‘전쟁국가 미국의 제국 수호 메카니즘’이라는 이 책의 부제는 이같은 저자의 대미 인식을 압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미국의 전쟁국가적 특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현 부시 행정부 때부터이다.
“부시 정권 등장 이후 미국은 왜 이러한 방향(군사력에 의한 세계지배)으로 진로를 잡았을까? 클린턴 정부 당시 미국이 추구한 세계 경영전략의 중심은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초국적자본의 직접 지배 방식인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였다. 그러나 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비판론자들의 예상대로 결국 투지자본의 전횡으로 인해 세계적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게다가 내부적으로는 불안정한 투기시장의 교란으로 인해 경기침체 국면에서 빠져 나오기 어려운 상항에 처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미국의 패권체제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다급해진 미국 내 지배계급이 더 노골적인 패권체제 유지 방식을 요구하게 되었고, 그것이 군사주의 노선의 강화로 이어진 것이다. 또 전쟁경제의 부양으로 경기침체를 극복하겠다는 구상도 크게 작용했다. 미국의 보수적 기득권층이 투표 결과까지도 왜곡하는 등 적지 않은 무리를 해가며 부시를 대통령으로 들여앉힌 것도 다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미국은 매우 공격적인 방식의 세계정책으로 전환한다.” (40쪽)
하지만 미국의 전쟁국가적 특성이 평지돌출 식으로 부시 행정부 때 갑자기 드러난 것은 아니다.
“미국이 제국주의적 지배와 침략, 학살 정책을 펴기 시작한 것은 이미 19세기 말부터였지만, 최근 미국이 위기에 빠지게 된 배경과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식을 찬찬히 살펴보려면 특히 냉전시대를 이해해야 한다. 미국은 2차대전이 끝난 후 전후 질서의 주도권을 잡고자 했다. 그러나 또다른 승전국 러시아가 미국의 욕심에 걸림돌이 됐다. 소련에게 주도권의 일부를 양도하는 대신 그 나머지를 미국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냉전구도였다. 그러나 미국은 늘 그것이 불만이었고 전세계를 미국의 이익대로 통제하고 빨아들이려 갖은 애를 썼다. 그리고 그 방법은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거인 소련이 무너지면서 더 이상 미국은 군사적 방법으로 세계를 통제할 명분을 잃게 되었다. 그러면서 등장한 방식이 바로 ‘신자유주의’다.
신자유주의란 자본이 직접 나서서 세계를 통제하고 간섭하는 시스템으로, 군대를 끌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돈을 가지고 들어와 상대의 목을 조르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도 한계에 이르렀다. 세계 도처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하고 라틴아메리카와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신자유주의가 어떤 모순을 낳았는지를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받아들인 나라마다 골병이 들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미국 자신도 골병이 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소련만 없어지면 미국의 전성시대가 올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클린턴 말기에 이르러 경제가 하향곡선을 그리게 되자 미국 내 지배 엘리트 서클에서는 향후 대선에서 민주당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고 고어를 밀어주느냐 부시 쪽을 택해야 하느냐로 논란이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보수우익 중에서도 강력한 우익인 대법원이 부시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부시가 당선되었다.”(343-344쪽)
이러한 미국의 세계전략이 한반도에 대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필자는 “부시 정권이 남북간 자주적 협력과 결속의 진전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231쪽)면서 이는 “(남북간 자주적 협력과 결속에) 진전이 이루어질 경우 동북아시아 평화체제가 확고해져 군사주의 노선에 기반을 둔 미국의 제국주의적 패권질서를 더는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231쪽)이라고 지적한다.
결국 “‘우리의 민족적 이해관계와 미국의 세계전략적 목표가 본질적으로 충돌’하고 있”으며 “충돌의 책임은 어디까지나 우리 민족의 정상적 진로에 부당하게 개입해 들어오고 있는 미국에게 있다.”(224쪽)는 것이다.
나아가 필자는 “결론적으로, 미국은 제국주의 국가이며 우리는 이 제국주의 지배 아래 놓인 식민지라는 사실, 이러한 식민지적 주종관계를 청산하기 전까지는 우리 민족의 장래는 언제나 제국의 신민 또는 노예의 신세를 벗어날 수 없다.”(270쪽)고 주장한다.
이 책 <밀실의 제국>을 다 읽고 나서도 서평을 쓸 엄두를 내기까지에는 2주일가량의 시간이 걸렸다. 미국에 대한 필자의 분석과 주장에 동의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의 글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사업 규모의 웅대함 때문이었다. 미국 영향권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엄청난 과제는 사실 수십년이 걸릴지 모르는 엄청난 프로젝트다.
게다가 필자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극복까지도 얘기하고 있다. 예컨대 필자는 “세계 자본주의의 성장사는 바로 그 폭력의 역사를 고스란히 증명해준다.”(204쪽)면서 “냉전체제의 사상적 문제는 자본주의 이외의 대안을 사고하지 못하도록 차단한 데 있었다. 따라서 냉전체제의 극복과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동시에 해결하는 고리는 이제 초국적자본이 요구하고 관철하려는 사회경제적 질서의 정체를 폭로하고, 이에 대한 대안제시를 좌파적으로 전개해 나가려는 노력을 인정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191쪽)고 말한다.
물론 서구의 시민사회 운동에서는 벌써부터 ‘자본주의 이후(After Capitalism)'를 모색하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동구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사회주의 실험은 끝장났다는 생각이 보편화돼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그러한 기운은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이 책을 읽으며 필자의 분석과 주장에 공감하면서도 과연 이러한 주장이 ’어떻게‘ 현실화될 것인지에 대해 답답함과 막막함을 느꼈다는 것이 평자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북핵문제라는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 미국의 협조가 절실한 마당에 미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이야기할 형편인가? 취임 전 자주적 발언을 시원스레 내뱉었던 분이 대통령이 된 뒤에는 명분 없는 이라크전쟁에 미국을 돕기 위해 우리 병사를 파병하는 결단을 내리고, 북핵 문제 해결의 당사자는 미국과 북한이며 한국은 한발 뒤로 물러서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자칫 한가로운 이상론에 그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물론 이 책은 코앞에 닥친 문제들의 현실적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한 책은 아니다. 10, 20년 이후를 내다보는, 우리의 바람직한 진로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라는 각도에서 읽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필자의 주장이 지금 이 순간부터 한반도라는 토양에서 하나의 씨앗으로 역할하기 위해서는 미진한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다.
우선 미국에 대한 인식이다. 이 책에서 미국은 압제자, 착취자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 남한 주민들에게 미국은 해방자이자 혈맹으로 각인되어 있다. 일제 식민지 통치에서 한반도를 해방시켰으며,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남한을 구해냈고, 이후의 경제성장 과정에서 막대한 도움을 준 우방국으로 인식되고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우리는 군사 주권 등 자주성의 상당 부분을 포기해야 했고, 그 대가로 오늘의 번영을 얻었다. 자주성과 번영 중 어느 편을 중시하느냐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다. 하지만 번영을 일부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주성을 완전히 회복하겠다는 사람의 비율은 아직까지는 적은 것 같다.
적어도 경제적 차원에서는 남한이 냉전체제의 수혜자라는 사실은 국제 학계에서도 인정하는 바다. 라틴 아메리카나 중동, 아프리카와는 달리 한국과 대만 등은 자본주의 체제 수호를 위한 미국의 전략적 필요에 의해, 이른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반주변부 세력으로서 일정한 경제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필자도 인정한 것처럼 브라질 등 중남미 국가들이 종속이론을 버리고 한때 한국을 경제개발의 모델로 삼은 것은 이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미국의 힘을 간단히 무시하기는 어렵다. “미국이 비켜서면 아무 문제가 없”(224쪽)다는 식의 필자의 논리는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을 받기 십상이다.
우리는 미국과의 동맹관계에서 현실적 이득을 얻은 대가로 일정 부분 자주성의 훼손을 감수해야 했다. 이 둘은 양자택일의 문제인가, 아니면 균형과 조화의 문제인가. 현실적으로 이 둘을 상호배척적인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국가적ㆍ민족적 자존심의 측면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프랑스, 독일 등을 보자. 이들은 한때 이라크전쟁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드높였지만 미국의 조기 승리 이후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있지 않은가.
물론 미국을 정점으로 한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 변혁을 목표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모든 변혁은 지금 이 순간, 이 땅의 현실에서 시작돼야 한다는 점에서 기존 한미관계의 실상을 현실로 인정하고 여기서부터 변화의 단초를 풀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따라서 이제까지의 맹목적 미국 추종을 벗어나는 것만 해도 커다란 과업이 아닐까. 나아가 미국의 현실적 지배력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상대적 자율성의 공간을 넓혀가는 것이 당면 목표가 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물론 이러한 목표도 결코 이루기 쉬운 목표는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로 우리가 미국의 보수우파 지식인들의 논리에 사로잡힌 나머지 국제적인 현실에 대하여 얼마나 무지한 상태에 있었는지”(210쪽), “미국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결여이자 비판적 정치경제학의 부재”(219쪽)라는 우리의 지적 현실에 대한 뼈아픈 자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김민웅의 <밀실의 제국>은 보다 자주적인 대미관계를 위한 일종의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제기가 현실적 힘으로 커 나가기 위해서는 보다 비판적인 대미 연구가 지금보다 훨씬 폭넓게 확산돼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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