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99%다.
우리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상징 월스트리트가 점령되었다.
2011년 '아랍의 봄'에 이은 '미국의 가을'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멋진 선언처럼 들린다. 과연 월가의 시위는 그후 수십 개 도시로 확산되어 석달 넘게 지속되고 있다. 저명한 지식인들도 현장에 나와 구호를 외치거나 지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미국 공권력의 대응도 한국 경찰의 형님 소리를 들을 만하게 완강하다. 시위의 중심지인 뉴욕 주코티 공원에서는 지난 11월 15일 새벽 시위대가 경찰의 기습적인 철거작전으로 쫓겨났고, 사흘 뒤에는 대학 안에서 연좌농성을 벌이던 대학생들의 얼굴에 경찰이 최루액을 뿌려대는 화면이 전 세계에 방송되어 미국에 대해 환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베풀었다. 그러니 튀니지에 이어 이집트, 리비아, 예멘의 정권교체를 이끈 아랍권의 민중항쟁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은 월가 시위자들의 미국인다운 자만이다.
결코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닌··· 주코티 공원의 함성
하지만 젖은 장작처럼 지지부진한 이 불길이 장차 어떻게 타오를지는 예단을 불허한다. 월가 시위의 근본원인은 단순히 금융의 탐욕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사회의 뿌리깊은 구조적 모순에 있기 때문이다. 즉, 단순한 외과적 수술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나라의 기본을 개혁해야 미래가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다들 지적하는 것처럼 1980년대 레이건 정부의 신자유주의 이후 미국사회의 모순은 극도로 심화되었다. 그러나 이전에도 미국이 공정사회·평등사회였던 것은 아니다. 1960, 70년대의 거대한 사회운동(반전운동, 흑인인권운동, 히피운동 등)을 통해 전면적으로 자기쇄신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놓침으로써 미국은 돌이키기 어려운 쇠퇴의 길로 들어선 것이 아닐까. 아무튼 오늘의 월가시위가 40여년 전과 같은 변혁적 동력을 획득할 수 있을지 두고볼 일이다.
의미심장한 것은 바로 이런 와중에 10월 13일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이행법안이 미국 의회를 통과했고, 이어서 한달 뒤 FTA 비준안이 한국 국회에서 날치기로 처리됐다는 사실이다. 엊그제 29일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한미 FTA 이행을 위한 14개 부수법안에 서명함으로써 비준절차가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당연히 이에 대한 반대운동이 줄기차게 전개되어 왔고 앞으로도 전개될 것이다. 한미 FTA가 국회에서 날치기 처리된 주말인 26일 오후에는 전국 각지에서 규탄집회가 열렸고 서울의 광화문광장에서는 추운 날씨 속에서도 1만여 명의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명박 퇴진, 비준 무효"를 외쳤다.
그런데 문제는 나라의 운명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한미 FTA의 내용이 국민들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참여정부 시절 통상교섭본부장으로 2006년 2월 협상개시를 선언했던 김현종은 "일본식 경제성장 모델에서 벗어나 (…) 미국과의 FTA를 통해 (…) 한층 업그레이드된 한국경제를 달성하자는 것"이 협정의 목적이라고 천명했다. 그로부터 5년 9개월이 지나 비준안에 서명한 엠비는 "한미 FTA는 세계 최대시장인 미국 시장을 여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이런 언명들은 포장지 위에 적힌 선전문구이지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이 아니다.
광화문의 촛불, 촛농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져···
따라서 우리는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위치에 있다고 여겨지는 전문가의 해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가령 송기호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협정 24장은 한국과 미국이 (발효를 위한) 각자의 법적 절차를 완료하였음을 증명하는 서면통보를 교환할 것을 발효조건으로 규정했다. 이를 위해 한국은 그 절차로서 국회로부터 1800쪽의 한미협정문 자체를 조약으로 인정하는 절차를 선택했다. 그러나 미국은 미국 헌법상의 '조약'으로 인정하지 않고 80쪽의 한미협정 이행법이라는 법률을 따로 제정했다."(한겨레 2011.11.28)
날치기에 참가한 한나라당 국회의원 가운데 협정문 1800쪽에서 10분의 1이라도 읽은 사람이 몇이나 될지 의문인데, 정말 무서운 것은 송 변호사의 지적에 함축된 실체적 내용이다. 한국에서는 FTA 협정문이 조약으로 인정받아 법률의 자격을 갖는 반면에 미국의 이행법은 자기들 법률에 어긋나는 협정문 조항을 무효라고 규정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불평등조약이 어디 있는가. 이렇게 되면 한국은 사실상 독립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미국의 이익과 미국의 법률체계에 따라 움직이는 한낱 좀비국가로 전락하고 만다.
물론 한미 FTA가 일방적인 손실만 초래할 리는 없을 것이다. 한국에도 미국에도 손익이 교차하는 복합적 지점들이 다양하게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것이 한국의 1%에게는 유리할지 몰라도 99%에게는 치명적 타격을 가하리라는 점이다. 어쩌면 한미 FTA는 장기적으로는 미국의 1%만 살찌우고 나머지 99%에게도 유해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미 FTA 철폐운동은 결코 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한국의 다수 민중과 미국의 다수 민중이 연대하는 운동, 즉 전지구적 범위에서 실질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운동이다. 월가에서도 그것을 깨달았기에 이렇게 외치는 것 아닌가.
세계의 꼭대기부터 밑바닥까지
각자가 처한 현실은 다 다르지만
그 고통의 뿌리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 다산연구소가 발행하는 <다산 포럼>(www.edasan.org) 12월 2일자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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