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의 김대중 납치사건에서 김대중을 구출한 것은 미국 정부가 아니라, 당시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대한(對韓)정책을 거스른 2명의 현장 외교관이라는 증언이 제기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사건 당시 미 국무부 한국과장이었던 도널드 L. 레나드(Donald L. Ranard)의 아들 도날드 A. 레나드(Donald A. Ranard)는 23일자 워싱턴포스트 기고문 '김대중의 위기일발: 세 반체제인사들의 이야기(Kim Dae Jung's Close Call: A Tale of Three Dissidents)'에서 이같이 밝혔다.
필자 레나드는 부친의 국무부 동료들의 증언을 인용해 김대중 구출은 당시 주한 미 대사였던 필립 하비브와 자신의 부친 도날드 레나드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레나드는 특히 키신저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이 김대중 구출에 역할을 했다는 항간의 설을 일축했다.
당시 닉슨 대통령과 키신저 보좌관은 "핵심적 동맹국인 한국의 인권 침해에 대해 논평하지 않는다는 것을 정책으로 삼고 있었"으며 "개인적으로 박정희 정부에 우려를 표명한 관리들조차 한국의 내정에 개입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 하비브 대사가 통상적 외교절차에 따라 본국의 훈령을 기다렸다면 김대중은 살해됐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본국 고위관리의 입장을 잘 알고 있었던 하비브는 따라서 독자적으로 행동을 벌여 그 자신이 당시 한국 총리를 만나는 등 대사관 관계자들을 모두 동원, 한국의 유력인사들에게 만일 김대중이 살해당한다면 한미관계에 중대한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는 것이다.
또 필자의 부친 레나드 한국과장은 박정권의 김대중 납치를 비판하고 즉각 석방을 요구하는 강경한 내용의 성명을, 아마도 상급자의 결제 없이 발표했다고 필자는 전했다. 이 글의 부제에서 '세 반체제인사'란 김대중 대통령과 하비브 대사, 그리고 레나드 한국과장을 지칭한 것이다. 필자는 미 워싱턴주 타코마에 거주하는 작가로 자신의 부친과 한국에 관한 저서를 집필중이다. 다음은 이 칼럼의 주요 내용.
***'김대중의 위기일발: 세 반체제인사들의 이야기'/ Washington Post, 23일자**
최근 서울에서의 반미 데모는 미국에서 경악과 분노를 자아냈다. 우리가 한국인들에게 그토록 많은 것을 해주었는데 어떻게 그들이 감히 우리를 비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한국의 반미감정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 감정은 2차 대전 후 거의 60년 동안 양국을 결속시켜온 복잡한 관계의 수면 밑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미국은 공산주의 북한으로부터 한국을 구했고 대규모의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제공했지만 여러 독재자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번 주 5년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다. 그의 퇴임은 그동안 비밀에 가려져 있던 미국 외교사의 한 비화를 떠올리게 한다. 한국에서의 미국의 상충된 외교사에 관한 극적인 비화 말이다. 1973년 한국 정보 기관은 DJ를 납치, 그를 살해하기 직전까지 갔었다. DJ는 당시 미국이 지원하는 독재자 박정희에 맞서 싸우던 반체제 민주 투사였다. DJ를 구출한 것은 미국의 개입과 일본 내에서의 여론의 분노였다는 게 정설로 되어 있다. 그러나 미국이 DJ 구출을 돕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서울 주재 미국 대사관이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미국의 “마지막 순간의 개입”이 DJ를 구했다고 말함으로써 미국 정부의 최고위층 관리들이 관여했음을 암시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DJ는 정부의 승인 없이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행동한 2명의 미국 관리에 의해 구출되었다. 그 중 한 사람은 당시 주한 미 대사였던 필립 하비브(Philip Habib)다. 또 한 사람은 필자의 부친 도널드 레나드(Donald L. Ranard)다. 그는 1990년 사망하기 전 국무부에서 한국 문제 책임자로 일했다. 부친은 필자에게 사건에 관해 몇 차례 얘기했으나 필자가 부친과 하비브의 옛 동료들을 인터뷰할 때까지는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없었다.
1973년 8월 8일 DJ는 도쿄의 한 호텔에서 백주에 5명의 한국 중앙정보부(KCIA) 요원들에게 납치되었다. 몇 시간만에 일본 언론들은 사건 배후에 KCIA가 있다는 추측보도를 하기 시작했다. 한국 정부는 이를 즉각 부인했다.
서울의 하비브는 행동을 개시했다. 정상적으로 그리고 일을 안전하게 처리하는 길은 워싱턴의 지시를 요청해 이를 따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비브는 평범한 외교관이 아니었다.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레바논계 1세대였던 그는 거침 없으면서도 기민했다. 그는 언제 독자적으로 행동해야 하는가를 아는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설사 상부의 지시를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 있다 해도 그의 상관들이 DJ 구출에 필요한 개입을 승인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닉슨 대통령과 그의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의 미 행정부는 핵심적 동맹국인 한국의 인권 침해에 대해 논평하지 않는다는 것을 정책으로 삼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박정희 정부에 우려를 표명한 관리들조차 한국의 내정에 개입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
하비브는 대사관의 고위 외교관과 군인들을 모아 놓고 “나는 한국의 일 처리 방식을 알고 있다. 그들은 24시간을 기다리다가 우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DJ를 죽일 것이다”고 말했다. 미 중앙정보국(CIA) 서울 지부가 사건 배후에 KCIA가 있음을 확인한 후 그는 직원들에게 그들이 아는 한국의 모든 주요 인사들과 접촉할 것을 지시했다. 그들이 사무실에 없으면 집으로 찾아가라고 명령했다. 한밤중이라도 좋다고 말했다. 오히려 그 편이 낫다고 말했다. 미국이 이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 있음을 알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비브는 직원들에게 KCIA가 납치를 했느니, 안 했느니 하는 논쟁을 벌이지 말고 단지 미국이 DJ의 생존을 원한다는 것만 말하라고 지시했다고 당시 대사관 정치 참사관 다니엘 오도나휴(Daniel O'Donohue)는 회상했다. 하비브 자신도 박 대통령의 2인자인 총리를 만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만약 DJ가 살아서 돌아오지 않으면 당신도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일 것이다”.
부친은 그 당시 워싱턴에서 국무부 한국과장을 맡고 있었다. 또한 미국의 대한 정책에 대한 주요 비판자이기도 했다. 언론과 대중에게 그는 말을 신중히 했지만 동료들에게는 솔직히 말했다.“우리의 침묵은 박으로 하여금 한국을 반(半)권위주의에서 완전한 독재국가로 바꾸도록 돕고 있다”
납치 소식이 전해졌을 때 부친은 뉴욕에서 유엔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부친은 회의장을 나와 워싱턴에 있는 보좌관 웨스 크리벨(Wes Kriebel)과 서울의 하비브에게 각각 전화를 걸어 자세한 진상을 물었다. 부친은 크리벨을 다시 호출했다. 이들은 언론 성명을 만들어야 했다. 하비브가 한 조치는 결정적인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는 않았다. 박 대통령은 워싱턴이 무슨 말을 하는가를 주시하고 있었으며 만약 워싱턴이 우유부단하다고 판단했다면 DJ는 죽었을 것이다.
부친은 강력한 성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1960년 서울 주재 미 대사관에서 참사관으로 있었던 부친은 이승만 정권에 대한 학생 데모를 강력히 지지하는 결정을 내리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마샬 그린 대사는 성명에서 한국정부에 대해 시위대들의 "정당한 불만"을 해소하라고 요구했다. 워싱턴도 즉각 대사관의 입장을 지지하는 일련의 강력한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은 하야했고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끝에 한국은 사상 최초의 민주주의 실험을 시작했다. 1년여후 박정희 장군이 심야의 쿠데타를 감행했다. 이번에도 대사관은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가장 강력한 단어들을 동원해 쿠데타를 비난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워싱턴이 우물거렸다. 세계에서의 한국의 위치-강력하고 공격적인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있는 약소국이라는-로 인해 한국의 지도자들은 우방국이든 적국이든 외국의 수사 뒤에 감춰져 있는 본심을 파악하는 데 능란했다. 박정희는 워싱턴의 침묵, 그리고 뒤이은, 완곡하게 승인할 수 없다는 뜻을 밝힌 워싱턴의 의례적인 성명에서 워싱턴은 쿠데타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명백한 메시지를 읽어냈다.
부친과 크리벨은 납치사건에 대한 성명을 만들었다. 이례적으로 강력한 어조의 성명이었다. 이 성명은 미국은 납치를 “개탄하며(deplored)” 이를 “테러 행위(an act of terrorism)”로 간주한다고 말했다. 성명은 또한 DJ를 미국으로 초청하면서 그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했다. 그 성명서에는 북한으로부터의 공산주의 위협이라든가, 국가안보 등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당신네들이 한 짓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우리는 어떠한 행동에도 나서지 않을 것이다'라는 메시지로 읽힐 수 있는 말들은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메시지는 명백했고, 하비브가 박정권에 대해 할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김대중으로부터 손을 떼라, 그렇지 않으면 (다친다)'라는...
크리벨은 그 성명이 어떻게 발표됐는지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했다. 통상 중요한 성명들은 국무부 고위 관리들이 있는 7층에서 결제된다. 오도나휴는 "7층에 있는 분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 같다"고 내게 말했다. 어쩌면 나의 부친이 독단적으로 발표했을지도 모른다고 크리벨은 시사했다. 그는 낄낄거리면서 "댁의 부친은 때때로 자신이 '7층'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납치 5일 뒤 DJ는 서울의 거리에 나타났다. 그의 자택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DJ는 타박상을 입었고 초췌한 모습이었지만 생존해 있었다. 얼마 뒤 세상은 DJ가 피살 직전 상황에 있었음을 알았다. 납치자들은 DJ를 호텔에서 납치한 뒤 옆방으로 끌고 가 구타하고 약을 먹였다. DJ는 이어 오사카 항구로 옮겨져 심야에 바다에 있는 화물선으로 실려 갔다. 납치자들은 DJ의 몸에 무거운 콘크리트덩이를 매달아 바다에 던지기 직전 계획을 포기했다.
작년 일본 태생의 한국인 영화 제작자가 필자에게 납치에 관한 대본 감수를 요청했다. 대본에는 키신저가 DJ 구출에 중심 역할을 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필자는 키신저가 그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필자는 DJ를 살린 사람은 키신저의 정책에 ***반대한** 하급 관리들이었다고 말했다, 제작자는 그러나 영화의 극적인 효과를 위해 원래의 대본을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제작자가 필자의 설명을 믿지 않은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 관객들은 2명의 관리들-설사 고위 관리라도-이 독자적으로 행동했으리라고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DJ 자신도 그것을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DJ는 부친이 그의 생명을 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DJ는 부친의 사망때 어머니에게 조의를 전하면서 그같이 말했다. 그러나 필자는 DJ가 모든 진상을 알았는지 의심스럽다. 또 그 당시 하비브나 나의 부친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기"를 꺼리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면 그가 과연 오늘날 살아 있었을 것인지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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