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군정이나 국무부의 문서철들을 며칠간만 뒤져보면 미국이 한반도 분단에 책임이 있고, 미 군정이 대안적 정치세력을 탄압했으며, 미국이 연이은 (남한의) 독재정권을 지원했고, 미국이 정치적 학살행위들에(1948년의 여수, 1948-49년의 제주도, 지리산 게릴라, 전쟁 도중 노근리 사건과 유사한 수많은 사건들, 1980년 광주) 개입됐다는 한국인들의 비판이 두고 두고 지속적으로 기밀문서들에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1949년 국무부 관리였던 데이비드 마크(David Mark)는 미국의 한반도정책에 관한 총체적인 점검을 했는데 그의 발견은 이후 학자들의 연구에 상당 부분 반영돼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여운형이 세운 "인민공화국"과, 인공의 모태가 됐던 지방의 위원회 조직들은 미국에 의해 활용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지방조직은 모든 군마다 있었으며 특히 좌익분자와 공산주의자들이 이 조직을 지배하게 된 것은 미군이 이들에 대해 적대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1945년 12월 ***이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이제 역사가 됐다. 마크씨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남한에서의 정치권력발전의 패턴을 결정했다."49) 1940년대 후반이야말로 이후 한국정치의 틀을 결정하는 도가니였던 것이다.
외국지도자에 대한 CIA의 전기 연구(biographical study)가 처음 적용된 것은 이승만에 대해서였으며 외국정부에 대한 최초의 정치분석이 적용된 것도 한국이었다. 1947년의 보고서는 남한의 정치는 "우익측과 좌익 인민위원회의 잔존분자들간의 대결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면서 인민위원회에 대해서는 "1945년 한반도 전역에 걸쳐 인민위원회를 결성함으로써 그 자신을 드러낸 민초들의 독립운동"이라고 묘사했다. 지배 정치그룹들에 대해서는,
우익의 지도부는...이 나라의 부와 교육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소수의 작은 계급 출신들이다. 이들은 일본인들 재산(즉 적산)의 균등 분배를 두려워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들에게 집중된 한국인 소유 재산을 몰수하는 데 전례로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때문에 좌익에 근본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이들 계급이 일제 치하에서 일정한 정도의 '부역'을 하지 않고서는 유력한 지위를 차지하고 유지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이들은 정치적 직위에 걸맞는 후보들을 찾아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에 따라 이승만이나 김구와 같은 망명 정치인들을 지원할 수밖에 없다. 이들 망명 정치인들은 친일의 행적은 없지만 본질적으로는 독재적 성향이 있는 선동가들이다.
그 결과 "극우세력이 미국지역의 표면적 정치조직을 장악했는데" 이는 주로 일본이 만들어 놓은 국립경찰 조직을 통해, "무질서를 매우 야만적으로 탄압한" 덕택이었다. 남한의 관료조직은 "사실상 옛 일본 식민지 체제"였는데 예를 들어 내무부는 "사실상 주민 생활의 모든 단계에 매우 높은 정도의 통제를 가했다."50)
이후 50년간 남한에서 용인되는 정치적 스펙트럼은 지배세력과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이 이끄는 정당들, 그리고 1945년 9월에 창립돼 김성수, 조병옥, 장면 등이 이끌어 온 한국민주당을 이어받는 야당세력이 고작이었다. 대한민국은 1998년 김대중이 당선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권력교체를 처음으로 경험했으며, 2003년 2월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으로 미 군정 이후의 정치적 분할(그리고 정치시스템)에 소속되지 않은 최초의 대통령을 갖게 된다. (김대중은 목포 인근에서 생겨났던 자치위원회에서 그의 정치생활을 시작했다. 우익은 언제나 이 사실을 근거로 그가 공산주의자, 아니면 친북적이라고 공격해 왔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과격분자로부터 추궁을 받는다 해도 사실 그는 1940년대 후반 기존 정치시스템과 화해했으며 그 이후 그는 제도권 정치인, 그리고 "3김"의 한 사람으로서 1960년대 이후 한국정치를 지배해 왔다.)
이 초기의 결정적 순간 이후 남한의 정치는 남서부 지역에 강력한 뿌리를 두고 있으나 전국에 걸쳐 존재하고 있는 "제3의 세력"을 억압해 왔다. 우리가 이들 세력들을 "좌익"으로 규정한다면 이는 이들을 냉전시대의 양극화되고 희화화된 틀 안에 이들을 가두어 두는 꼴이 된다. 냉전시대에는 우익들이 이들에게 어떠한 해악을 저질렀다 해도 우익이 확고한 반공주의자로 남아 있는 한, 우익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단절시키기에는 진정 불충분했던 것이다. 수십년동안 이들 정치.사회세력들은 필연적으로 지방위원회나 노동조합, 농민조직, 그리고 1940년대 후반의 반란들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오랜 기억 속에만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으며, 그들의 기억 속에 숨어 있는 수많은 개인적.지역적 진실들은 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역사는 억압된 기억이란 방식을 통해 현재를 위한 내면적 에너지를 간직하고 있는 과거를 보존하고 감춰준다. 즉 아주 조그만 조건의 변화에도 억압된 역사는 전면적으로 분출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난 15년간 한국인들은 해방 직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수백건의 조사, 역사, 회고, 구술, 그리고 다큐멘타리와 소설 등을 생산해냈다.
우리는 이제 지방 인민위원회, 여순반란사건, 제주도반란과 혹독했던 진압에 관해 놀라울 만큼 다양한 개인적 기억들과 함께 한국전쟁 이전과 전쟁기간동안 이승만 정권, 때로는 미국에 의해 저질러진 광범위한 학살의 기록을 갖게 됐다.51) 이 기록들 가운데 영어로 번역된 것은 극히 적으며, 미국에서는 1950년 7월의 노근리 학살 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마치 어느 누구도 한국전쟁 동안 그러한 일이 일어났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는 듯이 노근리 학살은 1999년 9월말 미국 신문들의 1면을 장식했다.52) 미국인들의 희한한 의식구조 속에서 한국전쟁의 본질에 관한 잘못된 신화들에 의해 민간인 학살은-1950년 여름의 <라이프 매거진(Life Magazine)>이나 <콜리어(Collier's)> 등에 한국인 민간인 학살에 관한 기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망각 속으로 사라졌으며 이후 다시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 기억들은 너무도 오랫동안 사라져 있었기 때문에 기억들이 다시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이 "잊혀진 전쟁"에 관한 통념들을 가리키며 반박한다.
한국인들은 지난 10년동안 일종의 배설의 정치를 경험하고 있다. 억압되고 불쾌한, 수많은 기억들이 엄청난 정치적 힘을 가지고 튀어나오고 있다. 새 대통령 노무현은 1940년대와의 식별할 만한 연계를 갖고 있지 않은 최초의 한국 지도자이다. 그의 (정치적) 혈통은 보다 가까운, 즉 노동지도자와 인권운동가들을 지키기 위해 그 자신의 경력과 목숨까지도 위험을 무릅썼던 80년대의 비상한 격변과 연계돼 있다. 또한 결혼을 통해 그는 수십년 전 정치적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가문과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에서 그의 승리는 1995-96년의 놀라운 정치적 카타르시스 및 전환점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 당시 한국인들은 "권위주의 청산 캠페인"을 통해 전두환과 노태우를 법정에 세워 이들에게 내란 및 부패혐의에 유죄를 선고했던 것이다. 광주항쟁에 대한 존경스러울 정도의 철저하고 진솔한 조사가 시작됐으며, 전두환의 독재체제는 철저하게 부정됐고,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관대한 사면조치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신도 교수의 정교한 사화과학 분석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전두환 및 노태우 장군 처벌에 대해 깊고 폭넓은 지지를 보냈다. 광주항쟁 진압과 쿠데타에서의 그들의 역할, 그리고 정치헌금 명목으로 10억 달러 이상의 뇌물을 받은 것과 관련, 이들을 체포하고 기소해야 한다는 데 대해 조사 대상자의 65%가 "강력한 지지"를 표명했으며 15%는 "어느 정도 지지"한다고 밝혔다. 반면 이들에게 비자금을 공여한 재벌 총수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지지의 강도가 훨씬 약했다.53)
미국이 거의 주목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한국인들은 남아공의 진실.화해위원회에 비견될 만큼 존경스러운 과거 청산의 과정을 밟아오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진실"이라는 이 골치 아픈 낱말을 4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사실적 또는 법적 진실, 개인적 또는 서술적 진실, 사회적 또는 "대화"의 진실, 그리고 치유적 또는 회복적 진실. 한국에서의 억압된 기억의 쇄도와 과거 청산은 독재 종식 후 지난 세월의 역경을 무릅쓰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했던 용기 있는 사람들에게 이 모든 진실의 의미들을 확립시켰다.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한국의 진실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온갖 층위에서 계속돼 온 공식적 거짓말들을 드러나게 했으며 또한(위원회의 표현을 빌자면) "공공의 담론에서 도전받지 않고 통용될 수 있는 거짓말의 숫자를 감소시켰다."
학자들에게 있어서 한국의 강력한 민주주의와 시민사회가 그 지독한 억압 속에서, 그리고 미 정부기구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도 밑바닥에서부터 형성됐다고 하는 사실은 첫 시작에서부터 출발하며 통용되는 지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학문적) 방법이 정당한 것임을 입증해 준다. 미 문서보관소에서 연구하던 젊은 시절, 1946년 가을 전라남도 농민봉기 진압을 비롯해 미국 주도에 의한 제주.여순 반란 진압, 그리고 1948-55년 동안 지리산에서 진행됐던 수많은 공비토벌작전(이들은 "쥐소탕작전"으로 알려진 한미합동작전에 의해 마침내 전멸당한다)에 관한 방대한 내부기록들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일들이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해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어느 날 김지하의 시 '지리산'을54) 읽으면서 나는 이제까지 반밖에 몰랐구나 라고 믿게 되었다.
울부짖는 것이여
깃발이여
타는 눈동자 떠나던 흰옷들의 그 눈부심
한 자루의 녹슨 낫과 울며 껴안던 그 오랜 가난과
돌아오마던 덧없는 약속 남기고
가버린 것들이여
지금도 내 가슴에 울부짖는 것들이여
***각주**
49) 해방 이후 한반도에 관한 David E. Mark'의 연구는 Muccio to State, 740.0019/Control (Korea)에 포함돼 있다; 이 연구는 날짜가 기록돼 있지 않으나 표지에 1949년 5월 23일의 소인이 찍혀 있다.
50) Central Intelligence Agency, "Korea," SR-2, summer 1947, and "The Current Situation in Korea," ORE 15-48, March 18, 1948.
51) 제주사건에 관한 여러 다른 새 자료들 중에 역사문제연구소편, '제주 4.3 연구'(서울, 역사비평사, 1999)를 보라. 여수에 관해서는 '여순사건'(2권,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여수, 1998)을 보라; 여순반란에 관한 국제 심포지움이 한국과 일본, 대만, 오끼나와등에서 약 2백명이 참석한 가운데(그중 일부는 반란사건 때 해외로 망명했던 사람들이다) 2002년 10월 여수대학에 열렸다. "한국전쟁 중 민간인 학살에 관한 진상규명위원회"가 2000년 9월 창립됐는데 여기에는 전국에 퍼져 있는 15개 이상의 "피해자 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제주지역의 역사가 수 명이 최근 수개월 동안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연구를 하고 있으며 이들은 제주항쟁에 관한 여러 권짜리 역사책을 준비하고 있다. [제주 문서]는 제주도 학살이 수십년 동안 생존자들의 고통스런 기억 속에 어떻게 살아남아 있는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52) 뉴욕타임스 1999년 9월 30일자 1면에는 전춘자라는 이름의 여성이 나와 한 언덕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다. "미군 병사들이 철로 밑의 힘없는 민간인 수 백명을 향해 기관총을 쏘아댔다." 당시 12살이었던 그녀는 시체더미 밑에서 살아났는데 후에 "남자 애들이 파리를 갖고 놀듯이 (미군 병사들은) 우리의 생명을 갖고 놀았다."고 회상했다. 노근리 사건에 관한 가장 좋은 영문 자료는 Charles Hanley, Sang-hun Choe and Martha Mendoza, The Bridge at No gun Ri(New York: Henry & Co, 2001); 이 학살사건에 관해서는 한국어로 된 수많은 기사와 증언들이 있다.
53) Doh C. Shin, Mass Politics and Culture in Democratizing Korea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pp. 203-08.
54) David R. McCann's translation, in The Middle Hour: Selected Poems of Kim Chi Ha (Stanfordville, New York: Human Rights Publishing Group, 1980), p.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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