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대한민국간의 최근의 문제들은 한국에 경험이 많은, 그리고 이미 오래전에 제임스 웨이드나 다른 많은 사람들이 간파했던 것과 동일한 문제들을 알아챘을 만한 미국인들에게-그래서 사실 놀랍기도 한데- 일종의 초조함을 야기시킨 것 같다. 독재정권 기간동안 대한민국의 유급 로비스트였으며 때때로 미 법무부에 대한민국 에이전트로 등록하기도 했던23) 리처드 알렌(Richard Allen)은 최근 (뉴욕타임스에) 노무현의 당선은 한미관계에 "골치아픈 전환(a troubling shift)"을 초래했다고 썼다. 사실 이번 한국 대선은 지난 1971년 박정희가 김대중(46% 득표)을 상대로 간발의 승리를 거둔 이후, 양대 후보가 대결해 승자가 과반 가까운 득표를 기록한 최초의 민주적 선거였다. 하지만 알렌이 보기에 한국의 지도자들은 이제 "중립지대에 들어섰으며" 심지어 현재의 북한 핵개발을 둘러싼 대치상황에서 워싱턴과 평양 양측에 대해 양보를 요구할 만큼 대담해졌다. "이러한 행동의 냉소주의는 심각한 배신에 해당된다." 알렌은 나아가 "이제 위험이 두 방향, 즉 북한, 그리고 남한의 과격한 시위대들로부터 오고 있으므로" 주한미군을 철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24)
알렌씨의 의견에 따르면 미국은 "현재 한국의 안보 및 번영의 대부분을 가져온 장본인이다." 다시 말해 한국인들은 자신들에게 먹이를 주는 주인을 물었다는 의미다. 다른 미국인들은 "북한이 핵이라는 검(劒)을 휘두르고 있는" 마당에 어떻게 남한 사람들이 미국을 비판할 수 있는가 라며 놀라워하고 있다. 국방부의 한 관리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한미관계)은 마치 어린이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 지난 50년간 우리는 남한의 자전거 핸들을 잡고 그 옆을 따라 뛰어 왔다. 언젠가 우리는 남한 혼자 자전거를 타도록 해야 할 것이다."25)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한 미군 장교는 노무현의 당선에 대해 "이곳에는 진정한 애도의 분위기가 있다."고 말했다.26) 한편 미국 기업인들은 주한미군 철수는 투자자들로 하여금 "한국에서의 계획을 심각하게 재고하도록" 만들고 있다고 밝혔다.27) 이처럼 성마른 초조함과 짜증스런 정중함이 분명히 결합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나 그 말들을 전하는 기자들 모두 별로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는 것 같다.
알렌씨는 또한 일부 한국인들이 "한반도의 분단은 미국의 책임이라고 아직도 탓하고 있는"데 대해 불평했다. '기록할 가치가 있는 모든 뉴스를 보도한다'는 모토를 갖고 있는 뉴욕타임스에 실린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면 이 문제에 관한 미국인과 한국인의 지식의 차이가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다.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은 북한이 지난 수십년간 가르쳐온 것들을 진심으로 믿고 있다. 1950년 미군이 한반도에 와서 나라를 두 동강으로 갈라놓았다는 것이다. 사실은 공산 북한이 먼저 공격했다."28) 아마도 이 기사를 쓴 기자는 미국의 전투사단이 1945년 9월초 한반도에 상륙했다는 것, 그 수주일 전에 존 J. 매클로이(John J. McCloy)가 딘 러스크(Dean Rusk)와 그 동료에게 옆방에 가서 서울이 미국지역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한반도를 분할하는 선을 그으라는 지시를 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하다.29) 이 운명적인(그리고 일방적인) 결정을 하면서 미국은 한국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떤 동맹국들과도 협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 미 군사정부가 3년간 남한을 통치했으며 그 결과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지난해 현대재벌의 상속자이며 대선 후보를 노무현에게 양보했던 정몽준은 "2차대전의 결과 미국의 적이었던 일본이 분할되지 않고 한반도가 분할됐다는 것은 한국인으로서 매우 아이러니칼한 일"이라고 말했다.30) 1천년 이상이나 모두가 인정하는 국경선 내에서 동질성을 유지해 온 한 나라를 잘못되고 부당하게 분단한 처사에 대해 이는 전적으로 합리적이며 이해할 만한 판단이다. 그러나 미국인 중에는 이러한 처사에 대해 책임감이나 유감을 느끼기는커녕 이같은 (역사적) 사실을 그나마 제대로 아는 사람조차 매우 드물다. 또한 대부분의 미국인은 현재 미군이 60년 가까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그렇다면 일부 한국인이 미군철수 계획이 있느냐고 묻는 것이 그토록 불합리-또는 "반미적"-하다는 말인가? 그 반대의 상황이라면, 즉 외국 군대가 미국땅에 반세기 이상 주둔하고 있다면 미국인은 어떻게 느낄 것인가?
약 10년전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주한미군의 철수를 요구했었다. 대통령선거운동 기간동안 상대편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그는 오래전에 그같은 입장을 버렸다고 말했다. 한편 워싱턴의 역대 정권들은 그같은 요구를 이단으로 취급했으며, 미군을 한반도에 계속-어쩌면 영원히?-주둔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 1995년에 발표된 "나이 보고서(Nye Report)"는 냉전 종식 및 소련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향후 최소한 15년간 현 군사기지와 병력 규모를 유지해야 한다고 추정했다. 3년후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은 미군은 "통일 후에도" 한반도에 미군을 주둔시킬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또한 리처드 아미티지(현 국무부 부장관)의 주도 아래 작성된 부시행정부의 동아시아 전략 청사진도 한국 및 일본에의 무기한 미군 주둔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주한)미군 철수는 케네디행정부의 애버렐 해리만(Averell Harriman) 동아시아 담당 차관이 처음으로 미군 철수 계획을 세운 이후 줄곧 워싱턴 내외의 주요 논쟁거리였다.31) 그러나 철수에 성공한 대통령은, 제 7사단의 약 2만 병력을 빼낸 닉슨 대통령이 유일하다. 좌파 및 (자유지상주의적: libertarian) 우파의 무조건적인 전면 철수 주장에서 현상유지, 또는 강화 주장에 이르기까지 워싱턴 정가 내의 주한미군 철수 논쟁이 한창이던 지난 1970년대 중반, 지미 카터는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걸고 선거운동에 임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고 나서 그는 이 문제에 관한 한 안보문제에 책임이 있는 정부조직 내의 관성의 힘은 요지부동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관료들은 북한군 전력이 크게 증강됐다는 증거들을 그에게 내밀었고 곧 철수 문제는 잠잠해지고 말았다. 후에 카터는 이렇게 썼다.
"나는 언제나 국방정보국(DIA)이나 기타 정보기관들이 제시한 사실들을 의심했지만 이 의심을 증명하는 것은 대통령의 능력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32)
해리만이나 닉슨, 카터 등은 모두 북한에 속아넘어간 얼뜨기였단 말인가? 1970년대의 모든 종류의 연구들은 대한민국 방어에 미군은 필요치 않으며,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건 주한미군은 새로운 한국전쟁의 인질이 되거나, 미국의 자동개입을 보장하는 "인계철선(tripwire)"-미 연방헌법상 전쟁선포권은 의회에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이 될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33) 그러나 이러한 논쟁에서는 한반도의 내전에서 자라나온 구조적 조건에 대한 논의가 종종 간과되고 있다. 즉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것은 북한의 남침을 막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동시에 남한을 억제시키기 위해서라는 점이 간과되고 있다. 북한 신정부에서 뿜어나오는 혁명적 열기와 걸핏하면 북진을 부르짖는 이승만정권의 예측불가능성 때문에 1950년초 국무장관 딘 애치슨(Dean Acheson)은 내전 억제라는 정책목표를 마련했다. 즉 미국은 북한을 봉쇄하고(contain)하고 남한을 억제해야(constrain)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1950년 1월의 저 유명한 "프레스클럽" 연설에서 말하고자 했던 바의 핵심이며, 그 내용은 미 정부 내부문서에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34) 미국은 현재까지 내전 억제라는 이 정책 목표에서 한번도 벗어난 적이 없으며 이것이야말로 미군이 한반도에 계속 주둔하고 있는 핵심적 이유 중의 하나이다. 다시 말해 미국은 마음놓고 한국인끼리 따로 내버려둘 수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노무현이 당선된 지금,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은 두 개의 한국이 자기들끼리 무슨 일을 꾸미도록 놔두는 것을 더욱더 혐오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각주**
23) Cumings, The Korea Lobby, Japan Policy Research Institute, 1996.를 보라.
24) Richard V. Allen, Seoul's Choice: The U.S. or the North, New York Times (January 16, 2003), Op-Ed page.(프레시안 1월 17일자에 "한국은 선택하라, 미국인가 북한인가"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있음: 역자)
25) James Dao, Why Keep U.S. Troops? New York Times (January 5, 2003), News of the Week in Review, p. 5.
26) Howard W. French, Bush and New Korean Leader to Take Up Thorny Diplomatic Issues, New York Times (December 21, 2003), p. A5.
27) 주한 미 상공회의소의 직원 Tami Overby의 말. James Brooke, G.I.'s in South Korea Encounter Increased Hostility, New York Times (January 8, 2003), p. A10.에 인용돼 있다.
28) James Brooke, G.I.'s in South Korea Encounter Increased Hostility, New York Times (January 8, 2003), p. A10.
29)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FRUS, 1945), v. 6, p. 1039.
30) Howard W. French, with Don Kirk, American Policies and Presence are Under Fire in South Korea, Straining an Alliance, New York Times (December 8, 2002), p. A10.
31) Max Holland는 내가 Harriman's 1963 memorandum from the Harriman Papers.를 볼 수 있게 해주었다.
32) Don Oberdorfer의 전반적인 논의는 The Two Koreas: A Contemporary History (New York: Addison-Wesley, 1997), pp. 84- 108.를 보라
33) 국방정보센터(The Center for Defense Information)는 1970년대 이같은 입장을 주장하는 몇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문제에 관한 가장 좋은 자료 중 하나는 Doug Bandow, Tripwire: Korea and U.S. Foreign Policy in a Changed World (Washington: The Cato Institute, 1996). 카터 철군 계획의 운명에 관한 내부 인물의 증언에 관해서는 다음을 보라. Robert G. Rich, U.S. Ground Force Withdrawal from Korea: A Case Study in National Security Decision Making, Executive Seminar in National and International Affairs, 24th Session (1981-82), Foreign Service Institute, U.S. Department of State.
34) 1949년 11월 주한 미 대사 존 무초(John Muccio)가 말한 것처럼, 문제는 "한국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그들이 북진의 의욕을 불태우지 않도록 저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군사적 지원을 얻어내는 것이었다. 후에 그는 보다 노골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우리는 매우 어려운, 매우 미묘한 입장에 처해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승만 및 그 추종자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준다면 그들은, 북한이 남침을 시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북진을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짐은 모두 우리가 져야 할 것이다..." 국무부 895.00 file, box 946, Muccio to Butterworth, 1949. 11. 1; Truman Library, Muccio oral history interview no. 177, 1973. 12. 27. 또한 애치슨도 1950년 6월 이전, 몇 차례에 걸쳐 탱크나 공군력 등 공격용 무기들을 남한에 공급할 경우의 문제점을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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