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반의 서울은 완벽한 병영(兵營)이었다. 전두환은 폭동진압을 위한 전투경찰을 엄청나게 늘려 1980년대 중반에는 그 숫자가 15만명이나 됐다. 검은 헬멧, 그 밑에 촘촘 한 철사로 만들어진 얼굴가리개, 목 뒷부분을 보호하기 위한 가죽띠, 솜을 누벼 만든 전투복, 팔꿈치와 무릎과 정강이에 둘러진 두꺼운 보호대, 묵직한 군화, 그리고 왼손에는 길쭉한 금속방패, 오른손에는 길다란 곤봉 등 기묘한 차림을 한 이들의 주임무는 시위를 저지하는 것이었다. 언제든, 서울 시내 어디에서든, 철창으로 가려진 버스 안에서 다음의 대결을 기다리는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의 기괴한 모습을 찍은 사진은 <뉴욕타임스>에 자주 실렸는데 관련 기사가 없을 때도 많았다(기사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이 기간동안 삼양화학의 소유주였던 한영자라는 여성은 정부에 대한 최루탄 독점공급권을 따냈는데 당시 그녀는 한국의 어떤 사업가보다도 많은 세금을 납부했다(1년에 대략 7백30만 달러의 소득을 올려 3백40만 달러를 세금으로 냈다).18)
김대중이 귀국한 것은 1985년 2월이었다. 미국 망명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오는 그를 수행하는 미국인대표단에 나도 운좋게 끼었다. 미국인들이 그를 수행한 것은 그보다 2년전 마닐라공항 활주로에서 베니그노 아키노의 목숨을 앗아간 것과 같은, 또다른 공항살인극을 막기 위해서였다. 전두환 정권은 살인을 저지를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김포공항에서 커다란 소동을 일으켰다. 갈색 방풍복을 입은 일단의 중앙정보부(KCIA) 깡패들이 미국의 유력인사들을 두드려패고 내팽개쳤다(대표단에는 미 연방의원 2명이 포함돼 있었다). 그동안 또다른 무리들은 김대중과 그 부인을 거칠게 잡아채 대기해 놓은 차에 태워 사라졌고 이후 수년간 이들을 “가택연금”에 처했다(전경들이 김대중 자택의 주변을 에워쌌고 그의 이웃집들을 점거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으며 그의 공개 발언을 금지시켰다). 우리를 시내로 태워갈 버스에 올라탔을 때, 꾀죄죄한 겨울옷을 입은 수백명의 전라도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몰려들어 김대중은 자신들의 “위대한 지도자”라고 외쳤다. 시내로 향하는 길의 왼편에는 수천명의 전경들이 서있었다. 오른편에는 엄청난 숫자의 일반시민들이-청바지를 입은 노동자들, 검은 교복의 학생들, 긴 치마의 어머니들, 바람을 막기 위해 겹겹이 옷을 껴입은 어린이들, 한복을 차려입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들-플래카드를 치켜들고 김대중의 귀국을 환영했다. 마치 도시의 모든 인구들이 전경과 시위대, 둘로 갈린 것 같았다.
물론 1980년대 (반미)시위의 시금석은 광주항쟁이었다. 1960년대 (미국) 학생들이 베트남과 민권운동과 함께 성장했듯이 (한국의) 젊은 세대 모두가 광주의 그늘 속에서 자라났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미국 관리들은 학생시위를 좁은 경험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학생들은 미국이 전두환의 2번에 걸친 쿠데타(1979년 12월과 1980년 5월)에 개입했으며, 특히 광주의 무자비한 진압을 지원했다고 주장했다. 미 대사관은 미국은 그러한 개입을 한 적이 없다고 항변했다. 이는 워싱턴의 고위정책 차원에서는 맞는 말일 수도 있으나 한미관계의 일상성에서 본다면 진실일 수가 없다. 미국은 대한민국 육군의 작전통수권을 갖고 있다. 전두환은 막강한 보안사 사령관이었으며 1979년 12월과 1980년 5월, 두 차례에 걸쳐 한미연합사의 명령체계를 명백히 위반했다. 어째서 미국은 이같은 항명행위에 대한 진압에 나서지 않았는가? 베트남전 복무 경험과 군 정보계통에서의 그의 지위 덕택에 전두환은 미국측 상대역들과 두터운 인맥을 갖고 있었다. 이들 미군 장성들은 전두환을 저지했는가, 아니 저지하기 위한 시도라도 해보았는가? 무엇보다도 왜 레이건 대통령은 이 인물을 백악관으로 초청했고, 1980년대 초반 그에게 그토록 많은, 명백한 지원의 신호들을 보냈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적절한 대답은 없었다. 특히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했다. 수많은 반미행동 가운데 첫 번째는 1980년 12월의 광주 미 문화원 방화사건이었다. 1980년대 중반 이러한 행동들은 일상사가 되었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신념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길고도 불행한 얘기를 간단히 줄여서 얘기한다면, 현재의 한미관계는 20년 전에 비해 몇 광년(光年) 만큼이나 좋아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1980년대 한국에서는 엄청나게 다양한 저항그룹, 노동조합, 시민단체들이 탄생했으며, 이들 조직들이 한국의 민주화에 거대한 기여를 하고 오늘날 한국의 강력한 시민사회를 형성케 했다는 사실을 아는 미국인은 거의 없다.19)
1980년대의 격변 이전에 미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감정은 복합적이었다. (한미)동맹의 지지자들은 자신들의 친미적 입장을 소리높여 외친 반면, 반대자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현조차 할 수 없었다. 서울 거리를 다녀본 미국사람이라면 누구나 상당수 한국인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된다. 1960년대 후반 내가 한국인의 집에 머물고 있을 때, 동네 꼬마들은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몽키(monkey)"를 노래 불렀고, 온갖 한국말 욕설을 해댔다. 어느 날 한국인 친구와 함께 뒷골목을 거닐고 있을 때, 한 사나이가 내 뒤를 따라오더니 내 얼굴에 정면으로 침을 뱉었다. 한국인 친구는 엄청나게 당황했으며 뒤에 내게 모든 한국인이 미국인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고 고통스럽게 설명했다(어쩌면 내 동료 하나가 말했듯이 한국인들이 싫어한 것은 바로 나였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 수십년간을 살았던 제임스 웨이드(James Wade)라는 귀화 미국인이 1960년대에 펴낸 책은 1945-1980년 시기 한미관계의 분위기를 아주 완벽하게 보여준다. 그는 짧은 글들을 통해 거리에서의 만남, 미군기지나 미 대사관 또는 (용산기지 내) 서울민간인클럽(Seoul Civilian Club) 방문, 그리고 기타 여러 장소에서의 한국인과 미국인간 접촉의 장면을 정확하게 그리고 감정이입을 통해 아주 적절하게 그려내고 있다. 물론 한국전쟁 기간 및 그 직후의 한미관계는 최악이었다. 당시는 미국의 세기(20세기) 중에서도 절정의 시기였던 반면 한국은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의 깊은 나락에 빠져 있던을 때였기 때문이다. 웨이드는 1950년대 중반 미군의 “예절(sensitivity)" 교본 중 한국인은 ”자존심이 강하고 기품이 있는“ 민족이라는 구절에 대한 미군 병사들의 불평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제까지 우리가 보아 온 모든 사람들이 더러운 거지들, 아니면 짐승의 굴보다도 못한 오두막에 살고 있는 농부들뿐이다. 기품이나 자존심은커녕 한국인은 문명화조차 되지 않은 민족이다.”
또한 웨이드는 1966년 한국인들을 마치 쿨리라도 되는 듯이 마구 부려먹는 한 미국인 장교의 은어들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한국인 중 한 사람이 성조기를 깃대에 잘못 매달자,
“‘염병할’ 하고 그는 소리쳤다. ‘저 X같은 깃발 좀 봐. 이 치들 일 정말 엉망으로 해 놨네.’ 사납게 사방을 노려보며 그는 계속 외친다. ‘헤이! XX 어디 갔어? OO는 또 어디 있는 거야? 사람들 2배로 더 불러와서 빨리 빨리 일하라구.”20)
평화봉사단(Peace Corps) 자원봉사자 시절, 맛있는 치즈버거를 먹기 위해 대사관 식당이나 용산기지의 스낵바, 또는 민간인클럽 등에 몰래 들어갔을 때 나도 비슷한 경험을 여러 번 했다. 대사관이나 미군기지에서 모든 궂은 일은 한국인 몫이었다. 미군 병사 한 명이 기다리고 있는 동안 한국인 하나가 바삐 돌아다니고 있었다. “빨리 빨리, 박씨, 서둘러.” 그때가 1968년이었다. 최근 한 미국인 기자가 이렇게 말했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새로운” 인천공항에 내리면서 여행객들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은 전투복 차림의 미군 상사가 이제 막 도착한 미군 병사들에게 명령을 외치는 것이다.”21)
서울에 있는 미국 관리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들 미국인은 우락부락한 군 장교에서 신경질적인 대사관 관리들과 미 국제개발처(AID) 직원들, 그리고 입만 열면 북한의 남침을 우려하는 콧대 높은 반공주의자에서 박정희 정권의 권위주의 체제를 혐오하는 리버럴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용산이나 부근 이태원의 미국인 전용숙소(compound)에서 살았다. 이들이-리버럴까지를 포함하여-한국인들을 대하는 태도는 까탈스러운 정중함, 아니면 노골적인 인종주의였으며 나 같은 사람이 한국인 집에서 살며 그들의 음식을 먹는 데 대해서 충격을 감추지 않았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감히 “대중교통수단(the economy)"을 이용하려 하지 않았다. 이들은 외출을 할 때면 관용 차를 타거나 “김치 캡(한국 택시)”을 이용했다. 한국의 택시 운전사가 미국인 손님을 태우러 미국인 숙소 안으로 들어가려면 정문에서 신분증을 제시해야 한다.
한국문제에 경험이 많은 상당수 미국인들은 한국이야말로 “양키 고 홈(Yankee go home)"을 외치지 않는 몇 안 되는 나라 중의 하나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1945년 이후 한국에서 복무했거나 일한 수백만의 양키 중 시간을 들여 한국의 오랜 역사나 유구한 전통의 문화, 또는 한국말을 배운 사람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부산의 빈민촌에서 수십년간 봉사해온 훌륭한 매리놀 성직자 알로이시우스 슈와츠(Aloysius Schwartz)는 지난 1966년에 펴낸 자신의 저서에서 대부분의 미국인은 거대한 담장 안의 전용 숙소에서 수영장과 수많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살고 있다고 지적했다. 많은 미국인 선교사들도 마찬가지인데 이들은 서울에 서구식 저택을, 해변에는 모터보트 등을 갖춘 별장을 갖고 있다. 또한 수만명에 이르는 ”양공주“들을 어찌 빼놓을 수 있겠는가? 한 목사는 자신의 교구에만 6천명 이상의 창녀가 살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22)
컬럼비아대 대학원에 다니기 위해 서울에서 돌아온 후 첫 번째 만난 교수는 마이클 옥센버그(Michael Oksenberg) 교수였는데 그는 나중에 내 지도교수 중 한명이 되었다. “그래, 서울은 어떻던가.” 그가 물었다. “글쎄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점령당한 도시 같습니다. 그리고 병영국가죠. 미군기지들이 도처에 깔려 있고, 그 주변에는 창녀와 가난의 고약한 냄새가 나는 풍경이 펼쳐져 있습니다.”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의 눈이 차갑게 변하더니 화제를 바꿨다. 몇 년전, 옥센버그 교수가 암으로 때이른, 비극적 죽음을 맞기 직전에 그는 자신의 아들이 미군 장교로 서울에 근무하고 있으며 그를 만나고 돌아왔노라고 말했다. “그 도시, 정말 군대캠프 같더구만!” 그가 소리쳤다. “정말로 아직도 미군 점령이 계속되고 있는 것 같았어.” 그리고 나서 그는 아들이 겪은 일을 이렇게 전했다.
교수의 아들은 신참 미군 병사들을 대상으로 수주 과정의 오리엔테이션을 맡고 있는 장교 중의 하나였는데 한국의 역사와 문화, 언어에 대한 교육시간이 24시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는 기가 막힐 정도였다. 그는 교육시간을 48시간으로 2배 늘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의 요청은 기각됐다.
1894년 일본군은 당시 한양의 외곽에 있었던 용산에 자신들의 주요 군 기지를 세웠다. 이제 그 군 기지는 거대하고, 뻗어나가고 있으며, 사람들로 북적대는 이 도시의 한복판을 자그마치 6백30에이커(약 76만평)나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단지(complex)가 되었다.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미군 사령관들은, 과거 일본군 사령관들이 그랬듯이, 오래된 성채와도 같은 지하벙커로 피신한다. 나는 세계 어떤 나라의 수도에서도 길모퉁이를 돌아서면 거대한 땅을 차지하고 있는 외국군 기지나 갑자기 나타나는 광경을 본 적이 없다. 미군이 처음 용산을 점령한 것은 1945년이었으며 당시 점령군 사령관은 전 조선총독의 관저를 자신의 관저로 삼았다. 이 관저가 바로 훗날의 “청와대”이다. 미 군정은 1915년에 지어진 조선총독부 건물을 사용했다. 이 건물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일본의 첫 글자, 즉 ‘日’ 자 모양을 하고 있으며 건물 위치는 조선조의 (정전인 경복궁의 광화문과 근정전 사이를 가로막아) 풍수를 방해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고위관리들은 반도호텔에 묵었다. 이 호텔은 일본인 관리와 부유한 외국인 관광객들이 주로 머물던 곳이었다. 1960년대에 반도호텔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미 대사관과 마주 보고 있었으나 후에 호텔은 철거됐고 미 대사관은 옛 총독부 건물 부근으로 옮겨왔다. 1990년대 김영삼 대통령은 마침내 옛 청와대와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말았다. 한국인들은 이러한 사연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대체로 이러한 (식민지 지배 등에 얽힌) 역사적 사실들을 모르고 있으며 따라서 1392년 이후 한반도의 수도였던 이 유서깊은 도시에 미군 주둔이 갖는 상징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각주**
18) George E. Ogle, South Korea: Dissent within the Economic Miracle (Atlantic Highlands, N.J.: Zed Books, 1990), p. 99.
19) Bruce Cumings, “시민사회와 민주주의: 비교적 연구”, 창작과 비평, (서울 1996년 5월)을 보라
20)James Wade, One Man's Korea (Seoul: Hollym Publishers, 1967)pp. 105-107.
21) Howard W. French, with Don Kirk, American Policies and Presence are Under Fire in South Korea, Straining an Alliance, New York Times (December 8, 2002), p. A10.
22) Aloysius Schwartz, The Starved and the Silent (New York: Doubleday & Co., 1966), pp. 63-64,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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