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에서의 '반미' 현상에 관한 브루스 커밍스 교수(미 시카고대)의 글, <한국에서의 '반미주의'의 구조적 기반(The Structural Basis of 'Anti-Americanism in the Republic of Korea)>을 싣는다.
미국내 진보진영의 학자로서는 거의 유일한 한반도 전문가로 꼽히고 있는 커밍스 교수는 이 글에서 해방 이후 한미관계의 변천이라는 역사적 관점에서 최근의 '반미' 현상을 분석하고 있다
그는 우선 한국의 '반미'는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 또는 미 국민 전체를 향한 것이 아니라 부시행정부의 일방적 대외정책에 대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부시행정부 출범 이후 미 국내는 물론 유럽 등 전세계에서 끓어오르고 있는 '반부시' 정서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커밍스 교수는 특히 현재의 한미관계는 광주항쟁의 여파로 잇단 미 문화원 방화사건과 분신자살 등 등 극단적 반미운동이 진행됐던 1980년대에 비하면 "몇 광년(光年)이나 좋아졌다"고 지적하면서 최근 들어 '반미'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하는 데 과거보다 훨씬 자유스러워졌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부시대통령의 연설에서 드러나는 미국내 보수강경파의 이분법적 흑백논리,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한 미국적 가치가 지구상에서 최고.유일의 가치이며 미국은 이같은 미국적 가치를 다른 나라에 강요할 수 있다는, 또는 강요해야 한다는 이들의 오만함을 비판하고 있다.
이들의 오만함은 특히 북한과의 관계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건국 이후 일관되게 미국적 가치를 거부하고 '반외세' 등 자신만의 독특한 가치를 추구해 온 북한은 이들에게 그저 '악(evil)'으로 비칠 뿐이며 '악'과는 교섭이나 협상 따위를 할 수 없으며 그저 박멸시켜야 한다는 게 이들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커밍스 교수는 또 대부분의 미국인이 한국의 역사나 문화를 배우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고 질타하면서 오히려 한국을 안다고 자부하는 미국인일수록-한국에 주둔 경험이 있는 미군이든, 또는 한반도와 관련이 있는 고위 관리이든-한국에 대해 인종주의적 태도를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 글에서 커밍스 교수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은 이른바 '억눌린 역사의 복원'이다. 커밍스 교수는 해방 이후 남한의 정치지형은 1945-48년 미 군정에 의해 사실상 결정됐다면서 "이후 50년간 남한에서 용인되는 정치적 스펙트럼은 지배세력과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이 이끄는 정당들, 그리고 1945년 9월에 창립돼 김성수, 조병옥, 장면 등이 이끌어 온 한국민주당을 이어받는 야당세력이 고작이었다."고 지적했다.
"이 초기의 결정적 순간 이후 남한의 정치는 남서부 지역에 강력한 뿌리를 두고 있으나 전국에 걸쳐 존재하고 있는 "제3의 세력"을 억압해 왔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 "대한민국은 1998년 김대중이 당선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권력교체를 처음으로 경험했으며, 2003년 2월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으로 미 군정 이후의 정치적 분할(그리고 정치시스템)에 소속되지 않은 최초의 대통령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미국이 그어놓은 정치적 한계선을 뛰어넘어 새로운 자주적 모색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커밍스 교수는 90년대 중반 전두환.노태우에 대한 유죄 선고를 예로 들면서 "한국인들은 지난 10년 동안 일종의 배설의 정치를 경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이제 불행하고 억압적이었던 과거에 뿌려졌던 온갖 씨앗들이 인과응보의 칼날을 내밀고 있다. 따라서 우리 미국인들도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과 재벌 총수들, 대학의 행정책임자들, 그리고 독재적 장군들이 지난 90년대에 겪었던 일들을 이제서야 겪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최근의 '반미' 움직임은 미국이 일방적으로 주도해 왔던 이제까지의 한미관계를 벗어나 새롭고 자주적이며 평등한 양국관계를 지향하려는 몸짓이라는 것이다.
이 글은 당초 역사전문 계간지 <역사비평>의 요청에 의해 씌어진 것으로(<역사비평> 2003년 봄호에 게재), 역사비평사 측과 필자의 양해를 얻어 7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한국에서의 '반미주의'의 구조적 기반**
얼어붙은 겨울 밑
시냇물 흐름처럼 갔고
시냇물 흐름처럼 지금도 살아 돌아와
이렇게 나를 못살게 두드리는 소리여
-김지하, 「지리산」(『타는 못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에서1)
도대체 무엇이 "구조"냐고 학생들이 때때로 물어온다. 그것은 한 나라의 분단일 수도 있다. 분단은 60년 가까운 지난 세월동안 한 편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다른 편에는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흑백논리를 확립했다. 그것은 서울 한복판의 거대한 용산 기지를 비롯해서 남한 전체에 퍼져 있는 외국군 군사기지들의 열도(列島)일 수도 있다. 그것은 외국인 사령관이 당신네 나라 군대의 작전통제권을 갖는 기묘한 형태의 국제관계일 수도 있다. 그것은 한미관계의 표면에 떠돌아다니고 있는, 수많은, 검증되지 않은 가정들일 수도 있다. 이 가정들은 진실-통용되는 지혜-임을 가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보다 깊이 진실을 탐구하려는 사람들을 겁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것은 물 속 깊숙이 가라앉아 있는 역사일 수도 있다. 스쳐 지나가고 사라져 이제는 그 자신의 때를 잃어버린, 그러나 언젠가는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고 스스로 발언할 때를 기다리며 대답할 수 없었던 힘과 진실을 간직하고 있는... 그것은 또한, 지난 수십년간 "인종주의자"라는 말이 상대방에 대한 최악의 모멸적 호칭으로 사용돼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여전한 백인 미국인의 비백인에 대한 인종주의를 드러나지 않게 하는 방법일 수도 있다. 이 예비적 논문에서(이 논문의 내용은 필자의 동의 없이는 인용될 수 없다) 나는 이 모든 의미들을 지칭하는 데 "구조"라는 말을 사용하고자 한다.
***한국의 '반미'는 특수한 현상인가**
언론매체들이 "반미주의(anti-Americanism)"라고 부르고 있는 한국에서의 현상과 관련해 몇 가지 구별을 하는 것이 유용할 것 같다. 첫째는 2003년의 대한민국이 여타의 나라들과 다른 점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9.11 이후의 수주일간을 제외하고 부시행정부 내내 각국들은 잇따라 미국의 힘과 정책에 대해 지속적 혐오를 드러내 왔다. 교토협약, 국제사법재판소, 1972년의 요격미사일금지협정(ABM)에 대한 비난, 고압적이고 노골적인 협박의 경향, 고질적인 일방주의, 그리고 물론 수개월간 계속돼 온 이라크전을 위한 군비증강 등이 그 최소한의 요인들이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미국과 유럽 동맹국들 간의 긴장은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고조됐다. 최근 <뉴욕타임스> 기사는 미-유럽 관계에 대해 "가장 중요한 두 동맹국-독일과 프랑스-과의 관계가 냉전 종식 이후 최악의 상태"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관측통들은 2차대전 이후 최악의 상태라고 말하고 있다. 미국이 이라크문제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1945년 이후 미국 자신이 그토록 공들여 구축해 온 세계체제의 유용성에 대해서도 전통적 동맹국들과 갈등을 빚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럽의 한 고위 외교관은 미국의 정책과 관련해 현재 떠오르고 있는 갈등이 치유될 것인지 여부는 "(앞으로) 미국이 현존 국제체제 내에 머물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는 결정적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2)
두 번째 구분은 "반미주의"라는 용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것이다. "반미주의"란 말은 미국의 정책들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미국 전체에 대한 획일적인 반대를 의미한다. 이 말은 또한 미국 내부도 획일적이라고 상정한다. 다시 말해 모든 미국 시민들이 외국의 비판에 대해 똑같이, 그리고 애국적으로 분개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오늘날의 미국도 지난 1960년대에 그러했던 것처럼 내부적 갈등을 겪고 있다. 아니 어쩌면 미국 유권자들의 당파적 선호도가 거의 정확하게 반반으로 갈려 있다는 점에서 그때보다도 더할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득표 수에서 50만표나 뒤진 부시가 백악관에 입성하게 된 것은 연방대법원의 간발의 결정(5대4) 덕택이었다. 필자는 50만표가 더 많았던 다수파의 일원이었다. 또한 이 다수파가 대변하고 있는 가치와 이익들이 어떤 형태로든 현 정부의 정책들에 반영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필자와 같은 사람들도 "반미주의자"로 분류해야 할 것인가?
***억압적 한미관계의 청산**
세 번째 구분은 현재의 한국인들이 1980년대보다도 미국인들에 대해 더 비판적인가를 가려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 자신의 지도자들마저 혹독한 비판으로 몰아붙이는 민주주의의 소란스럽고도 자기 주장이 강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하는 데 과거보다 훨씬 자유스러워진 때문은 아닌지를 점검해 보자는 것이다(김대중은 언제나 국내에서보다는 해외에서 더 대접을 잘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노벨평화상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인기도는 집권 5년 동안 최저점으로 떨어졌다). 수십년에 걸친 군사독재가 종식되기 전, 한국에서는 주한미군 철수를 공개적으로 주장했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감옥에 직행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 불행하고 억압적이었던 과거에 뿌려졌던 온갖 씨앗들이 인과응보의 칼날을 내밀고 있다. 따라서 우리 미국인들도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과 재벌 총수들, 대학의 행정책임자들, 그리고 독재적 장군들이 지난 90년대에 겪었던 일들을 이제서야 겪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는 분명하다. 한국인들은 유럽인들과는 달리 미국인들에 대해 미국인 스스로 만든 국제체제로 돌아오라고 요구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유럽에서의 국제체제는 전후 4대 강국의 독일 점령을 비롯해 언제나 다자주의적이었다. 반면 동아시아에서는 1945년 9월 더글라스 맥아더의 도쿄 도착 이후 줄곧 일방주의가 지배했다. 맥아더는 일본 점령,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남한 점령과 관련해 동맹국들의 의견에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공화당 내의 팽창주의자, 아시아 제1주의 분파의 영웅이었다(이들이야말로 부시 일방주의의 원조이자 원천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냉전이 심화되면서 미국은 일본을 세계경제의 지역적 엔진으로 부활시켜 그 자신의 정치적.군사적 영향력을 분담토록 했으며 나아가 이전 (일본의) 식민지 경제들을 재포섭하도록 했다.
1947년 초 조지 마샬 국무장관과 딘 애치슨 국무차관이 한반도 남쪽에 단독정부를 세우고 이 정부에 대해 미국의 안전보장을 약속하기로 결정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였다.3) 이제 많은 한국인들은 미국의 정책에서 한반도의 분단이나 연이은 권위주의적 정부에 대한 미국의 지원에 관한 우려보다는 일본이-이제 막 미국에게 패배한 적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훨씬 더 중요하게 취급됐다고 믿고 있다.
부시행정부는 출범 이래 동아시아에서 3번의 위기를 맞았다. 일본 및 중국과의 위기가 각 1번이었고 북한과의 위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이것들 중 어느 하나도 효율적으로 처리됐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부시행정부 출범 수주일 후 미 전함 그린빌(USS Greenville)의 선장은 잠수함 그린빌호를 이끌고 와이키키 해변을 벗어나 먼 바다로 나갔다. 왜 그랬냐고? 미 해군에 기여한 몇몇 돈 많은 민간인들이 미국 납세자들의 돈으로 움직이고 있는 이 잠수함에 시승해 보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4) 이들 민간인 손님들이 잠수함 내를 돌아다니고 관제장치를 가지고 장난치는 동안 선장은 이 원자력추진 공격용 잠수함을 물 위로 떠오르게 하라고 명령했으며 때마침 그 해역을 지나던 일본 배 에히메 마루를 전복시켜 일본인 관광객 9명을 숨지게 했다. 그중 4명은 고등학생이었다. 이 무책임한 사고에 대해 부시행정부가 마침내 적절한 사과를 하기까지에는 수주일이 걸렸다.
만우절인 4월 1일, EC-3 첩보비행기가 중국 남쪽 해안 부근에서 정보수집 활동을 하다가 중국 전투기에 발각돼 하이난섬(海南島)에 강제 착륙당했다. 중국인 조종사 1명이 사망했으며 중국지도부는 첩보비행기와 승무원을 당분간 억류, 승무원을 심문하고 선체를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부시행정부 최초의 중국위기를 초래했다. 소속 기지를 7천마일이나 벗어나 비행하고 있는 첩보비행기를 강제 착륙시킨 중국 측의 처사는 끔찍한 것이라는 (미국) 언론의 야단법석과 함께(냉전 기간동안 미국은 소련 해안을 따라 첩보비행기를 보냈으며 소련 또한 미국 연안에 첩보비행기를 파견했다. 물론 양측의 첩보행위는 쌍방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한 게임의 규칙에 의해 진행됐다. 하지만 중국은 아직 그럴 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위기가 진행되는 동안 중국은 승무원들을 잘 대접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으며 승무원들의 설명을 통해 그들이 원하는 것을 만족할 만큼 얻었다고 판단되자 승무원을 미국에 돌려보냈다.5) 그 후 EC-3도 미국에 송환됐다. 이 비행기가 먼저 해체돼야 한다는 중국 측의 요구에 따라 상자에 담긴 부품 형태로 오긴 했지만 말이다. 위기 초기 약간의 실수를 한 끝에 부시행정부는 참을성 있는 협상을 진행했으며 이에 의해 위기를 잠재울 수 있었다. 여기에는 부시 대통령과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간의 상담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위기의 성공적인 해결과정에서 간과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냉전이 끝나고 소련이 사라진 후, 그리고 중국은 아직 (소련에) 비견될 만한 항공첩보능력을 갖고 있지 못한 마당에 엄청나게 광범위한 첩보능력을 보유하고 이를 사용하고 있는 미국의 오만함이었다.6)
***여중생 사망사건, 미국언론의 무관심**
이 두 사건이 벌어진 중간에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이 외국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백악관 집무실에서 부시를 만났다. 그의 방문에 앞선 배경설명에서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기자들에게 북한을 포용하고 북한의 미사일프로그램을 폐기시키기 위한 (전임) 클린턴행정부의 노력을 이어받아 그들이 이루어놓은 지점에서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노벨평화상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김대중은 그 해 봄 서울에서 북한지도자(김정일)를 영접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그 만남은 한반도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한 지도자가 (화해의) 악수를 했던 2000년 6월 평양 정상회담의 후속 정상회담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곧 파월과 김대중은 부시 대통령 자신의 강경노선에 부딪혀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한미정상회담은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외교적 재앙이었다. 김 대통령은 귀국했으나 그의 보좌관들이 공개적으로는 양국 정상회담이 당혹스러웠다고 말했고 사적으로는 부시 대통령을 저주했다.7) 파월은 궁지에 몰렸고 공화당 우파는 그의 "달래기(appeasement)"정책을 맹공했으며, 김 대통령의 예정됐던 남북정상회담과 "햇볕정책"은 갑자기 깊은 곤경에 빠져들었다. 평양측이 서울에서 예정됐던 장관급회담을 돌연 취소했고 김정일은 서울 답방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2002년 6월 10대 소녀 2명이 서울 남쪽의 좁은 시골길에서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실제로는 서울 북쪽 양주에서 선거일인 6월 13일, 생일을 맞은 친구 집을 가는 도중이었음: 역자) 미군 장갑차에 깔려 사망했다. 두 미군 병사는 미 군사법정에서 과실치사를 비롯한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은 부시 대통령의 직접 사과 요구와 함께 미국의 대한 정책에 대한 시위를 촉발시킨 가장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사건이 일어난 지 6개월 후, 2002년 12월 14일 토요일에 벌어진 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와 임박한 대통령선거를 고려해 부시 대통령은 마침내 김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사과했다. 6월에 벌어진 이 여중생 사망사건은 미국의 유력 일간지들이 탐사보도기사를 낼 만한 사건이었다. 실제로 그런 기사를 낸 신문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아직 그런 기사를 본 적이 없다. 한국인들은 때때로 이 사건이 한국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라는 점, 반면 미국에서는 이 사건을 거의 다루지 않고-외견상의 우려조차 보이지 않고-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촉구하고 있다. 이 사건이 새로운 종류의 사건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살인과 강간을 비롯해 미군 병사들에 의해 저질러진 이같은 종류의 사고와 범죄 등은 이미 수십년 전부터 있어 왔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경우 유럽이나 일본에서 미군에 의해 벌어진 유사한 사건들에 비해 (미국) 언론들은 훨씬 더 적은 관심을 보였다.
***각주**
1) Kim Chi Ha, Chiri Mountain, trans. David R. McCann, in The Middle Hour: Selected Poems of Kim Chi Ha (Stanfordville, New York: Human Rights Publishing Group, 1980), p. 51.
2) David Sanger, To Some in Europe, The Major Problem is Bush the Cowboy, New York Times (January 24, 2003, pp. A1, A10.
3) 이는 외교 역사학자들 사이에는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한반도정책에 관한 일반의 논평에서는 거의 제기되지 않고 있다. 관련 문서로는 마샬이 애치슨에게 보낸 메모를 보라. 여기에는 "남한에 단독정부를 세우고 남한 경제를 일본 경제와 연결시키는 정책 초안을 만들어주게"라고 씌어 있다.(740.0019/Control[Korea] file, box 3827, Marshall to Acheson, 1947. 1. 29) 또한 1947년 3월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서 애치슨은 한국은 "러시아와 우리 사이의 경계선이 명백히 그어지는" 곳이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U.S. Senate, Committee on Foreign Relations, Historical Series, Legislative Origins of the Truman Doctrine [Washington: 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73], p. 22.)
4) 사건이 일어난 후 후속보도에 따르면 이 잠수함이 출항한 것은 일상적 임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미 해군이 이들 민간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5) 나의 동료인 기 알리토(Guy Alitto) 교수는 미 승무원을 위한 통역을 맡았는데 그는 2001년 10월 시카고대에서 승무원들의 하이난 체험에 관해 강연했다.
6) EC-3 정찰기들은 휘드베이(Whidbey) 해군비행장에 본부를 두고 있다. 시애틀 인근 푸젯 사운드(Puget Sound)의 휘드베이 섬에 있는 이 해군비행장 덕택으로 6만명의 시민들이 일자리를 비롯한 직접적 혜택과 기타 간접적 혜택을 입고 있다.
7) 한 익명의 보좌관은 "당혹스럽다(embarrassing)"고 말했다. The Korea Herald 2001. 3. 13; 나는 3월 13일에 열린 한반도문제에 관한 한 세미나에서 한국 국회의원과 얘기를 나눴는데, 그는 김대중의 보좌관들이 부시의 어설픈 전술을 저주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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