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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新儒學은 도전과 응전의 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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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新儒學은 도전과 응전의 전형

신영복 고전강독<152> 제13강 강의를 마치며-6

불교는 한말(漢末)의 혼란기에 중국에 유입됩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오두미교(五斗米敎) 등 30여년 동안 계속된 농민반란과 삼국쟁패의 혼란기에 유입됩니다.

사회적 혼란기에는 일반적으로 종교(宗敎)와 이성(理性)이 갈등을 빚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기에는 대체로 종교가 지반을 확대합니다. 중국불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닙니다. 중국불교가 이러한 혼란기를 경과하면서 열반(涅槃) 불성(佛性) 등의 사유를 내부로 이입하여 대승불교(大乘佛敎)로 성립된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이러한 중국불교의 성립과정은 수(隋) 당(唐)의 통일과정과 일치합니다. 그리고 수천태(隋天台) 당화엄(唐華嚴)이라는 중국불교의 전형을 완성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중국불교의 성립과정이 바로 중국의 통일과정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종교가 갖는 어쩔 수 없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정치적 성격입니다.

이 시기에 성립된 중국불교는 타민족에 대한 중국민족의 결속과 통일의 구심으로서 정치적 역할을 충실히 해냅니다. 소위 승원철학(僧園哲學)이 그것입니다. 승원(僧園)이라는 종교적 집단에 대하여 막대한 정치적 특권을 부여하여 그곳을 이데올로기의 생산기관으로 삼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화엄철학(華嚴哲學)은 번쇄(煩瑣)한 귀족철학으로서 중앙집권적 지배구조에 적합한 것입니다. 객관적 실재(現實)를 도외시한 정신의 변혁을 강조하며, 객관의 물질성을 제거함으로써 동시에 현실의 계급적 모순구조를 부정하는 이데올로기적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화엄불교는 통일국가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 적합하다는 것이지요.

안록산(安錄山)과 사사명(史思明) 등 군벌의 난, 그리고 왕선지(王仙芝)와 황소(黃巢)의 농민반란 이후에 나타난 현상입니다만 난을 진압한 진압군이 군벌(軍閥)로서 각 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할거(割據)하게 됩니다. 중앙집권적 구조가 지방호족(地方豪族)중심의 봉건적(封建的) 체제로 이행하는 것이지요.

중국불교의 성격변화도 이러한 변화와 그 맥락을 같이 합니다. 수천태 당화엄이라는 승원철학은 기본적으로 중앙집권적 이데올로기이며 지방 봉건정권의 이데올로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지방의 봉건정권으로서는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생산이 불가능하고 불필요하게 됩니다.

봉건정권에게는 오히려 실천선(實踐禪)이 지지를 받게 됩니다. 선종(禪宗)은 역사적으로 지방분권적 봉건적 구조와 결합됩니다. 중앙의 지시와 간섭을 배제하는 해체적 본성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근본에 있어서 무정부주의(fundamental anarchism)입니다. 일체의 제도적(制度的) 규제를 거부하는 성격을 갖습니다.

선(禪)은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와 상통하는 무조직(無組織), 무경전(無經典)에 기반을 둔 각(覺)이요 불심(佛心)입니다. 선종의 이러한 성격과 구조가 그 후 사원(寺院)경제의 몰락과 보시체계(報施體系)의 와해 그리고 만당(晩唐)의 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존속하게 되는 저력이 됩니다.

이 과정에서 한편으로 선종(禪宗)은 민초의 철학인 도가의 전통과도 더욱 밀접하게 상호 결합하게 됩니다. 유(有). 무(無). 유위(有爲). 무위(無爲) 등의 도가(道家) 개념과 습합하게 되고 위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위진 남북조 이래의 탈유가적 사회상황을 심화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로 화엄학(華嚴學)은 그 고도의 정치(精緻)한 이론이 더 이상 발전을 이루지 못합니다. 이 지점에서 선(禪)이 되고, 이 선(禪)에 의하여 불교는 대중(大衆)종교가 됩니다. 선종불교는 대중이 접근하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여러 층위의 내용을 벌여놓음으로써 결과적으로 대중에 대한 영향력에 있어서 막강한 권력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영향력이 직접적으로 행사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전의 화엄학이 중앙정부의 권력을 합법화하는 이데올로기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선종불교 역시 지방의 봉건정부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송대의 신유학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통일국가를 재건하고 사회질서를 확립하여야 하는 시대적 대응과제의 일환으로서 형성된 것이라 해야 합니다. 종교와 이성의 갈등기에 비종교적 엘리트들이 직면했던 고뇌의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당대 사회의 엘리트 계층에게 있어서 시급히 개변되지 않을 수 없는 매우 불안정하고 위험한 현실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야기가 매우 장황해졌습니다만 어쨌든 불교와 신유학은 도전(挑戰)과 응전(應戰)이라는 역사의 어떤 전형을 엿보게 합니다. 역사의 매 단계에는 이러한 구도가 중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이러한 중층적 구도를 명쾌하게 드러내는 것이 역사이해의 본령이라고 생각하지요.

이 시기에 보여준 중국불교와 신유학의 관계는 역사발전의 어떤 전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유학의 성격에 대하여 간략하게 언급한다는 것이 다소 길어졌습니다. 지금부터는 ‘대학’과 ‘중용’에 관한 이론적 소재(素材)만을 간단하게 지적하고 끝마치겠습니다. 이론적 소재라는 것은 물론 관계론적 관점과 연관되는 부분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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