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신유학(新儒學)
사상(思想)은 역사적으로 변화 발전합니다. 유학(儒學)도 그 시대적 과제에 대하여 무심할 수 없으며 부단히 새로워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일반적 설명 이외에 신유학이 등장하게 되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송대에 이르러 신유학이 등장하게 되는 까닭은 훈고학(訓詁學) 일변도의 한(漢)나라 유학이 침체를 거듭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대의 유학은 경서(經書)의 자구(字句)해석에 매몰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실천적 측면에서도 형식적인 예론(禮論)의 논의에 치중하였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결과적으로 위진(魏晋) 남북조와 수당시대를 거치면서 불교(佛敎)와 도가(道家)가 유가를 압도하게 됩니다. 유학이 당시의 지적 관심과 요구에 응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유학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개별적 대응을 꾸준히 계속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말(唐末)의 한유(韓愈)가 그렇습니다. 그는 불교를 비판하는 것과 아울러 도가(道家)도 비판합니다. 인의(仁義)는 구체적이고 실체가 있는 것이지만 도덕(道德)은 추상적인 이름이라는 것이지요. 도덕은 내용이 없는 것이며 결국 인의를 내다버린다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도교는 불교와 마찬가지였습니다.
군신(君臣) 부자(父子)라는 사회적 관계를 부정하고 오로지 마음의 평안을 구하고자 한다는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유교는 천하를 구하려는 것이지요. 궁극적으로는 평천하(平天下)가 유가의 목표입니다. 이것이 한유의 이른바 노불(老佛)비판입니다.
한유와 마찬가지로 이고(李翶) 역시 불교와 도가를 비판하고 ‘대학’과 ‘중용’이라는 새로운 문헌적 근거에 주목하였다는 점에서 송대 신유학의 선구로 평가받습니다. 송대(宋代)에 접어들면서 경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광범하게 진행됩니다. 그것이 남송의 주희(朱憙)에 의하여 집대성하게 되는 것은 여러분이 잘 아는 바입니다.
물론 주희 역시 선대의 많은 학자들의 연구업적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자는 우주론(宇宙論) 인성론(人性論) 공부론(工夫論) 등 광범한 체계를 완성하고 사서(四書)를 확정하고 유교의 도통(道統)을 확립합니다.
우리는 송대에 들어와서 나타나는 신유학의 배경에 대하여 생각을 정리하여야 합니다. 물론 한대(漢代)의 형식적 문풍(文風)에 대한 반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도 있으며, 그리고 위진남북조 이후 지배적인 조류가 된 불교와 도교에 대한 비판이 그 발단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하여야 하는 것은 또 다른 통일 국가의 출현과 함께 사회질서를 재건하려는 정치적 성격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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