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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고전읽기의 시작이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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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고전읽기의 시작이며 끝

신영복 고전강독<148> 제13강 강의를 마치며-2

흔히 수천태(隋天台) 당화엄(唐華嚴)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러한 화엄사상이 당나라 전시기에 난숙하게 꽃피었기 때문입니다. 이 화엄학의 핵심이 바로 연기론입니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고전을 읽어온 기본적 관점이 바로 관계론입니다. 그런 점에서 불교사상은 관계론의 보고입니다.

불교에서 깨닫는다는 것 즉 각(覺)이란 이 연기의 망(網)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갇혀 있는 좁은 사고의 함정을 깨닫는 것입니다. 개인이 갇혀 있는 분별지(分別智)를 깨달아야 함은 물론이며 한 시대가 갇혀 있는 집합표상(集合表象) 즉 업(業)을 깨닫는 일입니다.

이 깨달음의 문제는 우리가 이번 강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강조해온 주제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과 그 현실을 뒷받침하고 있는 구조를 깨달아야 하고, 우리를 포섭하고 있는 문화적 기제를 깨달아야 하고, 우리시대의 지배담론이 다름 아닌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깨달음을 다짐해오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깨닫는 것 즉 각(覺)에 있어서 최고형태는 바로 '세계(世界)는 관계(關係)'라는 사실입니다. 세계의 구조에 대한 깨달음이 가장 중요한 깨달음입니다.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마저 찬란한 꽃으로 바라보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바로 이 현실을 수많은 꽃으로 가득찬 화엄의 세계로 바라볼 수 있는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관계론에 의하면 삼라만상(森羅萬象)은 존재(存在)가 아니라 생성(生成 a Becoming)입니다. 칸트의 "물(物)-자체"(ding an sich)란 설자리가 없습니다. 배타적이고 독립적인 물 자체라는 생각은 순전히 관념의 산물일 뿐입니다. 그러한 물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사물은 어쩌면 그것이 물려받고 있는 그리고 그것이 미치고 있는 영향의 합(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사물이 맺고 있는 전후방 연쇄(linkage)의 총화라 할 수 있습니다. 사물의 실재성은 내재적인 것이 아니고, 밖으로부터 수입된다는 니체의 주장이 오히려 관계론적 사고입니다. 우리의 인식이란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의 극히 일부분에 갇혀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매순간 발생하는 수많은 사건들의 극소수만이, 그리고 그 극소수의 극히 작은 부분들만이 우리의 의식 속에 들어온다. 우리의 의식 속에 들어오는 것들은 우리가 그 전체를 볼 수 없는 긴 일직선 위에 찍힌 작은 점들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작은 점들이 그 자체로서 하나의 독립적인 대상이라고 가정하고, 이들이 의식된 또는 의식되지 않은 다른 사건들과 독립해서 개별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떤 것은 원인이고 어떤 것은 결과라고 판단한다"는 해체(解體)철학이 바로 인식의 원천적 협소함을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물의 정체성(正體性)은 애초부터 의문시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우리의 인식이 분별지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 작은 우물을 벗어나기 위한 깨달음의 긴 도정에 나서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벽암록(碧巖錄)'의 제2칙에서 조주(趙州)스님은 사람들(衆)에게 이야기합니다.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 참다운 도는 어렵지 않다. 오로지 간택을 경계할 따름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 간택(揀擇)이란 것이 바로 분별지(分別智)입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장자가 이야기한 '우물'입니다. 우리들이 개인적으로 갇혀 있는 우물에서 벗어나야 함은 물론이며, 나아가서 우리 시대가 집단적으로 갇혀 있는 거대한 이데올로기 체계를 깨트려야 하는 것입니다. 체제가 쌓아놓은 거대한 성벽을 허물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 시대의 집합표상인 카르마(Karma)를 깨트려야 하는 것이지요.

자본주의 체제의 변혁은 자본주의에 대한 의식의 변혁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투쟁은 사상투쟁에서 시작한다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깨달음(覺)의 의미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깨달음의 의미를 지극히 명상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은 고전읽기의 시작이며 그 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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