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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상은 관계론의 寶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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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상은 관계론의 寶庫

신영복 고전강독<147> 제13강 강의를 마치며-1

법가를 끝으로 고전 강독을 마칩니다. 강의 첫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중국고전은 5천년 동안 쌓여 온 것으로 엄청나기가 태산준령입니다. 우리의 강좌는 호미 한 자루로 그 앞에 서 있는 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범위를 좁히고 우리의 주제와 관계 있는 예제에 한정하여 읽었습니다. 그나마 내가 섭렵한 고전의 범위를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고전강독을 끝내자니 당연히 미진한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관계론(關係論)이라는 주제에서 본다면 당연히 불교를 다루어야 마땅합니다. 불교사상은 관계론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습니다. 연기론(緣起論)은 그 자체가 관계론입니다. 불교사상에 대해서는 다행히 여러 분야의 많은 연구자들이 계속해서 좋은 연구성과를 내놓고 있습니다. 근대에 대한 성찰적 접근에 있어서도 월등한 진경(進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관심만 있다면 이 부분의 연구성과에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에 관한 논의 이외에 또 한가지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송대(宋代)의 신유학(新儒學)에 관한 것입니다. 더구나 송대의 신유학(新儒學)은 1천여 년에 걸쳐서 동양적 정서와 사유구조를 지배한 소위 주자학(朱子學)입니다. 그리고 이 송대 신유학의 성립은 그 자체가 당면한 사회문제에 대한 절박한 논구(論究)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수(隋) 당(唐)이후 광범하게 퍼진 불교문화와 특히 선종불교로 말미암아 야기된 사회적 이완(弛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중국고전 강독에서는 이 두 주제에 대한 논의가 빠질 수 없습니다. 불교사상의 관계론 부분과 신유학의 사회적 관점을 다루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범위가 엄청난 것일 뿐 아니라 나의 역량을 넘는 것입니다. 부득이 우리의 주제와 관련되는 부분에 대해서만 그 의미를 지적함으로써 이론적 소재(素材)로서 언급하는 것으로 끝마치려고 합니다.

***1.불교사상의 관계론**

첫째 불교사상의 핵심은 연기론(緣起論)과 깨달음(覺)입니다. 불교의 사상영역을 연기론과 깨달음으로 한정하는 것 자체가 불교에 대한 무지라 할 수도 있습니다만 우리는 일단 이 부분에 한정하기로 합니다.

불교철학의 최고봉은 화엄(華嚴)사상입니다. 그런데 ‘화엄경’의 본래 이름이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입니다. 범어로는 Mahavaiplya-buddha-ganda-vyuha-sutra입니다. ‘대방광불화엄경’의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미는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대(大)는 극대의 개념입니다. 절대적 대(大)의 개념입니다. 소(小)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대가 끊어진 극대를 의미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개념입니다. 그리고 방광(方廣)의 의미는 글자 그대로 넓다는 뜻입니다. 공간적 의미로 풀이됩니다. 따라서 ‘대방광(大方廣)’은 크고 넓다는 뜻으로 불(佛)을 수식하는 형용사구가 됩니다.

그리고 불(佛)은 붓다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대방광불이란 한량없이 크고 넓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적인 붓다를 의미합니다.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불이 붓다입니다. 화엄(華嚴)이란 잡화엄식(雜華嚴飾)에서 나온 말로서 갖가지의 꽃으로 차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大方廣佛華嚴經’의 의미는 정리한다면 “광대무변한 우주에 편만해 계시는 붓다의 만덕(萬德)과 갖가지 꽃으로 장엄된 진리의 세계를 설하고 있는 경”이라고 풀이됩니다.

물론 ‘大方廣佛華嚴經’의 문자적 의미가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붓다를 높임으로써 붓다의 진리를 더욱 장엄하게 선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화엄(華嚴)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화엄이라는 의미에서 불교철학의 핵심을 읽을 수 있으며 또 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화엄(華嚴)이란 꽃(華)이 엄숙하다(嚴)는 뜻입니다. 잡화엄식이라고 하여도 상관없습니다. 여러 가지 꽃으로 장식된 세계를 화엄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왜 이 세계가 고해(苦海)가 아니고 꽃으로 장식된 세계인가에 대하여 당연히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승이 고해가 아니라 꽃으로 장식된 화엄의 세계인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그 비밀이 바로 ‘大方廣佛’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大方’은 최고(最高)의 법칙(法則)이란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광(廣)의 의미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광(廣)의 최대개념이 무한한 우주와 같은 단순한 넓이의 개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단순한 사고입니다. 마땅히 우리의 사고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달리게 해야 합니다.

만약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것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충분히 큰 것이고, 충분히 넓은 것입니다. 한 포기 작은 민들레도 그것이 땅과 물과 바람과 햇빛 그리고 갈 봄 여름과 연기되어 있다면 그것은 지극히 크고 넓은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공간적으로 무한히 넓고,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佛)은 붓다를 의미한다기보다는 ‘깨닫다’는 의미로 읽습니다. 바로 그 광대함을 깨닫는다는 뜻입니다. 바로 연기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다는 것으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하지요. 작은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 돌 한 개라도 그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면 무한히 크고 넓은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의 의미는 바로 이 연기의 구조를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붓다가 설하는 법(法)이 바로 이 연기의 세계입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한(無限)시간과 무변(無邊)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드넓은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그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찬란한 꽃이 됩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고 작은 미물(微物)이라도 찬란한 꽃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온 천지가 찬란한 꽃으로 가득찬 세계를 상상해봅시다. 한 마디로 장엄한 세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읽어야 하는 대방광불화엄경의 의미가 이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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