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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 그때 참여정부를 설득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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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한미FTA, 그때 참여정부를 설득했더라면…"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14> 임종인 변호사

임종인 전 국회의원을 만났다. 그는 지난 17대 국회의원 재임 시절 비정규직 법안을 여당 내에서 유일하게 반대했던, 한미FTA 반대 항의 단식을 하다 쓰러졌던,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전무하던 상황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대체복무제 법안 마련을 위해 분주히 뛰어다녔던, 법조계뿐 아니라 한국사회의 또 다른 성역인 김앤장을 너덜너덜 파헤쳤던, '해외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등을 통해 해외민주인사 명예회복을 위해 애를 썼던, 그러다 참여정부와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비판하며 탈당하기까지 했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마치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 같던 열혈 국회의원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트위터 프로필 소개말처럼 경기도 안산시 일동, 이동, 성포동, 월피동, 부곡동, 안산동을 기반으로 하는 끈 떨어진 민주당 정치인이다.

"한미FTA 경우를 보면, 이는 한국 경제를 미국 경제에 귀속시키는 것이고, 대기업은 이익을 보고, 근로자 농민, 자영업, 중소기업은 피해를 보는 것이라고 생각해 반대했다. 왜 서민과 중산층의 폭발적인 지지로 탄생한 참여정부가 한미FTA 같은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는가. 그때 보수언론이나 한나라당이 한미FTA를 찬성하고, 참여정부 지지층이 반대했다. 정말 괴로웠다. 항의 단식을 하다가 10일 만에 쓰러지기도 했다."

"많은 공격을 받았다. '여호와의 증인 신자다. 그 종교로부터 정치 자금을 받았다. 군대도 안 갔다' 등이다. 나는 여호와 증인 신자도 아니고, 여호와 증인 교리를 잘 알지도 못한다. 군대는 군법무관으로 10년 6개월 근무했고, 마지막 보직은 특전사 법무참모였다. 그리고 육군 중령으로 제대했다. 내가 고민했던 것은 우리 사회에서 60여 년간 매년 500명이 집단적으로 징역을 간다는 것을 변호사로서, 또 지식인으로서 눈을 감고 있을 수 없었던 것뿐이었다."

"한나라당의 기능이 조금 약화되더라도 그 역할을 대신하는 세력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재벌, 언론, 대학, 또는 검찰 등이 그 기능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산층과 서민을 대변하는 정당이 약화되면, 중산층과 서민이 정치적으로 기댈 곳이 없어진다. 그래서 민주당과 진보정당의 위기는 한나라당의 위기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국 정당정치의 문제로 중산층, 서민이나 노동자, 농민들을 대변하는 정당이 그 구성원 수만큼 의석을 차지하여 의회에서 대변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본다. 또 근래 내가 주장하는 것 중 하나가 19세 피선거권 확보 운동이다. 단지 투표하는 것만이 아니고, 19살이 되면 시의원, 도의원으로, 또 국회의원으로 출마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 문제의 주체인 학생들이 정당한 제도적 틀 안에서 바꿔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드는 생각은 정치는 혼자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올바른 것을 주장만 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다. 그 '올바른 주장을 현실화시키는 것'이 정치라는 생각을 경험을 통해 느끼고 있다."

돈키호테 같은 열정에 정치에 대한 성찰까지 얻었으니 끈 떨어진 시간이 그에겐 어쩌면 축복의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부디 이번엔 공주님을 구하시길. 그의 충직한 산초와 함께! 유휴~

얼마 전 서울시장 선거가 박원순의 승리로 끝났다. 민주당을 포함한 야권통합후보이긴 했지만 어쨌든 무소속 후보가 당선된 것인데,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에 대한 의미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변화다. 새로운 변화에 대한 서울시민, 국민의 뜻이 박원순 시장의 당선을 만들어 냈다고 본다.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 결과에 대하여 정당기능의 약화라는 분석이 많았는데, 정당이 불필요하다기보다는 기성정당, 특히 민주당이 한국의 중산층과 저소득층을 충분히 대변하지 못해 나타난 결과라고 본다.

▲ 임종인 전 의원 ⓒ양태성

한나라당은 보수정당으로써 부자들의 이익을 잘 대변했는데, 제1야당인 민주당이 중산층 내지 서민층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했기 때문에 무소속 후보가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범야권 단일 후보가 되었고, 결국 당선이 되었다고 본다.

박원순 시장의 등장은 새로운 정당이 필요하다고 국민들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20~40대가 투표를 많이 하고, 박원순 시장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는데, 이는 그들이 원하는 새로운 변화에 대한 갈망이 반영된 것이라 본다.

20대의 경우, 등록금, 실업, 취업해도 좋지 않은 직장(비정규직) 문제, 30대의 경우, 결혼, 출산, 보육 문제, 40대의 경우, 주거 및 자식들의 교육문제 등으로 많은 고통을 겪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를 기존 정당에서 제대로 대변조차 못 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안으로 무소속 후보인 박원순 후보가 단일화 과정을 통해 당선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무소속 후보가 제1야당인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범야권 단일 후보가 되었고, 그 무소속 후보가 서울시장으로 당선되었다. 그런데, 이번 서울시장 후보 경선 과정에서 민주당 내의 변화 또한 감지할 수 있었다. 민주당 내 경선에서 3선, 4선을 한 국회의원들과 박영선 재선 국회의원이 후보 경선을 했다. '박영선'이란 재선 국회의원이 경선에서 승리를 한 것도 큰 변화라 생각한다. 그리고 민주당 후보가 야권 단일 후보가 되지 못하고, 박원순 후보가 된 것은 더 큰 변화라고 본다. 이전에는 무소속 후보가 경선을 통해 민주당 후보를 이기고, 야권 단일 후보가 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무소속 후보가 단일화 과정을 거쳐 범야권단일 후보가 되고, 서울시장에 당선되는 일련의 과정을 볼 때 기존 정당들의 변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로 보인다.

박원순 시장이 범야권 후보가 되어서 한나라당 후보를 이긴 것은 당연한 결과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현 정부의 실정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기 때문에 박원순 시장의 승리는 예측 가능한 결과였다. 본 선거 과정에서 표면적으로는 박빙의 승부가 날지 모를 일이라 했지만, 일단 범야권 단일후보가 된 이상 박원순 후보의 승리는 필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7대 국회의원 재임 시절 비정규직 법안을 여당 내에서 유일하게 반대하고, 그 후 열린우리당을 탈당했다. 당시 그런 행동을 보인 유일한 의원으로 알고 있는데, 근래에도 한진중공업을 비롯하여 노동문제와 비정규직 문제는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현재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라고 생각한다. 1997년 금융위기 이후에 해고가 자유로워지고, 비정규직이 증가해서 60%에 이르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고용이 불안해지고, 저임금 노동을 양산했다. 한국 사회를 병들게 만들었고,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해고의 자유와 비정규직의 만연은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비정규직이라는 노동형태를 유지하려면 비정규직에게 임금을 더 많이 주어야 한다. 비정규직이라는 노동형태 자체가 사용자 입장에서 해고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만큼 그에 따른 위험부담을 임금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2006년 11월에 정부 여당이 통과시킨 비정규 법안이 내가 볼 때는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법안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의를 제기했었다. 2007년 1월에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것은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너무 많이 쓴 것에 대한 문제 제기 차원에서였다.

국회의원 시절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대체복무제 법안 마련을 위해 정말 열심히 활동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비록 좌초되긴 했지만 대체복무제입법안이 거의 통과될 뻔하기도 했었고,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전무하거나 매우 비판적인 상황에서 이 문제에 뛰어들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

한국사회에서 일부의 사람이 부당하게, 지속적으로 권리를 침해받고 탄압, 구속되는 상황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눈 감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해방 후 60년 동안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이유로 계속해서 수만 명이 감옥 생활을 해야 했다. 청년들을 매년 약 500명씩 감옥으로 보내는 이 부분에 대해서 답을 내놓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정치권에 들어오기 전 변호사로서 학생, 노동자, 민주인사들을 변호했었는데, 양심범에 대한 범위를 넓혀서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2001년도부터 후배 변호사들과 함께 변호인단을 만들어 변호하기 시작했다.

ⓒ양태성

양심적 병역거부자 문제는 우리가 변호를 시작한 2001년도에는 국민 여론 1%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그 후 여론이 계속 바뀌어서 2004년에는 국민 여론의 40% 정도 지지를 받게 되었다. 2007년이 되어 참여정부 시기, 국방부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이제 더 이상 징역 보내지 않고, 대체복무제를 추진하겠다는 획기적인 발표를 했다. 그런데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아무 이유도 없이 이를 보류, 백지화를 시켰다. 이 사안을 보더라도 현 정부는 한국사회 인권 전체를 후퇴시켰다고 본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징역 보내지 않고, 대체복무제를 시키는 것은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로써 당연한 것이라 본다. 이는 우리 사회 양심의 영역이 넓혀지는 것이고, 넓게 보아 군인들에 대한 인권을 개선하는 길이기도 하다. 참여정부의 큰 업적인 대체복무제 도입이 현 정부 들어서면서 아무런 이유 없이 미루어졌다. 계속해서 해마다 500여 명의 꽃다운 젊은이가 교도소 행진을 하고 있다. 한국이 경제순위는 11등, 12등을 한다고 하는데 인권 부분에 있어서는 양심적 병역거부 하나의 사안으로 150등 밖에 머물러 있다. 세계 1100여 명 양심적 병역거부자 수형자 중 우리나라가 1000여 명으로 압도적이다. 국제사회에 우리나라도 대체복무제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한 것이 여러 번이고, 더욱이 세계인권위원회에도 보고했다. 대 국민, 대 국제사회 약속을 이렇게 어겼으니 이명박 대통령 말을 빌리면 "대한민국의 국격"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라 하면 현실적으로 특정 종교와도 관련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관련하여 어려움은 없었나?

많은 공격을 받았다. "여호와의 증인 신자다. 그 종교로부터 정치 자금을 받았다. 군대도 안 갔다" 등이다. 나는 여호와 증인 신자도 아니고, 여호와 증인 교리를 잘 알지도 못한다. 군대는 군법무관으로 10년 6개월 근무했고, 마지막 보직은 특전사 법무참모였다. 그리고 육군 중령으로 제대했다. 내가 고민했던 것은 우리 사회에서 60여 년간 매년 500명이 집단적으로 징역을 간다는 것을 변호사로서, 또 지식인으로서 눈을 감고 있을 수 없었던 것뿐이었다. 해결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징역을 가는 것이다. 할아버지도 징역을 살고, 아버지도 징역을 살고, 자기 자신도 징역을 산 사람도 있었다. 삼대에 걸쳐 징역을 사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내가 알고 있는 이상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우리 사회가 이러한 현실에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 전체의 불행이다.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다루면서 많은 공격을 받았지만 내가 고통을 받더라도 우리 사회에 양산되는 고통을 줄이거나 없앨 수 있다면 마땅히 해야 할 몫이었다고 생각한다.

김앤장에 대한 책을 쓴 것으로 알고 있다. 책을 쓴 계기는?

2008년에 '법률사무소 김앤장'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김앤장은 법조계의 큰 권력이기도 하지만 한국사회의 가장 큰 권력이기도 하다. 나도 변호사이기 때문에 동료 변호사들이 모인 회사를 분석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김앤장의 문제를 이야기한 것은 내가 법사위에 있을 때였다. 론스타라는 외국 투기자본이 외환은행을 인수했는데 론스타는 은행을 인수할 자격이 없는 자본이었다. 그런데 인수하게 되는 과정을 법사위에서 계속 파헤치다 보니 그 인수를 연출하고, 기획한 곳이 김앤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부를 계속해보니, 이전에 변호사 시절 막연하게 알고 있던 김앤장이 우리 사회의 엄청난 권력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김앤장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객관적으로 분석해서 국민에게 알려 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책을 냈던 것이다.

책을 낸 후 반응은 어떠했나?
ⓒ양태성
책이 의외로 많이 팔렸다. 3만 부 가까이 나갔다고 들었다. 좋은 책을 냈다는 과분한 칭찬을 많이 받았다. '국회의원으로서 해야 할 일을 잘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국회의원은 일반 국민을 대신에 많은 정보를 요구할 수 있고, 또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를 성공사업으로 만든 김앤장을 어느 누구도 분석을 안 했기 때문에 호평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김앤장도 견제 내지는 객관적 분석을 통한 비판을 받는다면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한다.

'해외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위원회'등을 통해 해외 민주인사 명예회복과 이분들의 자유로운 고국 방문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특별히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

1993~94년도에 일본과 미국에서 1년씩 유학을 했었다. 일본, 미국의 사상의 자유와 사상 탄압의 역사, 각 현대사를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의 국가보안법은 국민의 사상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 학문의 자유, 그리고 우리 사회의 질적인 발전을 막는 악법이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사회의 발전을 옥죄고 있는 국가보안법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보았더니 일본이 만든 것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1925년도에 만들어진 일본의 사상범 탄압법인 치안유지법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1945년 일본은 패전하면서 이 치안유지법을 없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해방 후 1948년에 일제의 치안유지법이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하여 수많은 사람을 죽이거나 구속했다. 한국 사회를 하나의 큰 감옥으로 만든 법이었고, 헌법보다 사실상 더 위에 있는 법이었다. 이 국가보안법 폐지의 이론적 근거를 만들기 위해 일본에 가서는 치안유지법과 그 적용사(史)를 공부했고, 미국에서는 1950년대 미국인들을 분열과 공포로 몰아넣은 매카시즘을 공부했다. 2004년 열린우리당에게 국민이 과반수의석을 만들어줘 4대 개혁입법의 하나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시도했다. 그러나 한나라당과 보수세력의 완강한 반대를 이기지 못하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못한 것은 국회의원인 나로서도,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으로서도 너무 아쉽고 죄송한 일이다.

일본에 있을 때, '한통련(재일 한국민주통일운동연합)'이라는 단체를 알게 되었다. 한통련은 1973년 재일동포 단체인 민단의 민주화를 주장하면서 생긴 단체로서, 한국 정부의 독재를 비판하며 한국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주장한 단체였다. 전혀 친북단체도 아닌데도 한국에서 반(反)국가 단체로 규정되었다. 더욱이 그 회원인 재일동포들은 한국인이면서도 여권을 발급받지 못해 한국에 오고 가지도 못한다는 상황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한통련은 기피 단어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통련 초대의장을 하였는데, 반국가단체 수괴를 했다는 이유로 1980년에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사형 판결을 받았다.

1997년 국민의 정부가 탄생한 후에도 한통련 재일동포들이 한국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한국에서 여권도 내주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한국에서 70~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들은 보상도 받고, 국내에서 출세도 하는데 일본이나 해외에서 민주화 운동을 한 분들은 여권도 발급 안 해주고, 그리운 조국에도 못 오는 상황이었다. 그분들이 원하는 것이 훈장이나 보상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고, 단지 고국에 들어올 수 있게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민의 정부 때 '한통련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위원회'를 여러 사람과 함께 만들어 한통련 분들의 명예로운 고국방문을 추진했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 때는 성과가 없었다.

2003년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진전이 있었다.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천주교 인권위원회, 참여연대 등과 같은 단체와 개인이 힘을 모아 '해외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위원회'를 만들었다. 당시 민변 부회장었던 내가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추진 결과 2003년 9월 19일 한통련 인사와 독일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던 선배들이 40여 년 만에 고국를 명예롭게 방문했다. 감격스러운 날이었다. 그 후 참여정부 시기 한통련 등 해외 민주화 인사들이 자유롭게 한국을 오고 갈 수 있었다. 그런데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통련 분들의 입국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현 정부에서의 우리나라 상황을 말하는 또 다른 측면이기도 하다. 참여정부가 한국의 전체적 민주화를 확대한 것에 이바지한 바가 크다고 생각하는데, 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그 점은 더 크게 느껴진다.

이제 현 한국 정치에 대한 질문들을 던져보려고 한다. 지난 서울 시장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인 박원순 변호사가 당선되고, 안철수 원장이 대권 후보로 떠오르는 일련의 상황들을 보며 한국 정당에 위기가 찾아왔다고 이야기들 한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또 정당이 나아가야 할 바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부자들을 위한 정당인 한나라당은 특별한 위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늘 부자들을 잘 대변해 왔기 때문이다. 나는 민주당과 진보정당의 위기가 한국 정당의 위기라 생각한다. 한나라당의 기능이 조금 약화하더라도 그 역할을 대신하는 세력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재벌, 언론, 대학, 또는 검찰 등이 그 기능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산층과 서민을 대변하는 정당이 약화하면, 중산층과 서민이 정치적으로 기댈 곳이 없어진다. 그래서 민주당과 진보정당의 위기는 한나라당의 위기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양태성
정당이 강화되어야 하는데, 그동안 원내 정당화, 지구당 폐지, 중앙선관위 권한 강화 등 정당을 약화시키는 일을 정치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정치인 스스로들 많이 했다. 정당과 일반 국민들 사이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서민이나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세력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국민의 이익을 계층별로 대변할 수 있는 정당이 있어야 하고, 이러한 정당들이 강화되어야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라 생각한다.

예컨대 스웨덴의 경우, 보통 7개의 정당이 의회의 의석을 차지한다. 7개 정당은 왼쪽 좌파에서부터 오른쪽 우파까지 모든 국민을 각각 대변한다. 3~4개 정당이 좌파연합 또는 우파연합을 결성하여 국민에게 선택지를 주는 것이다. 다수를 형성한 연합이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다양한 계층을 대변하는 기능을 정당들이 한 것이다.

나는 한국 정당정치의 문제로 중산층, 서민이나 노동자, 농민들을 대변하는 정당이 그 구성원 수만큼 의석을 차지하여 의회에서 대변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본다.

그렇다면 한국 정당정치 발전을 위해 민주당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현재 한국 정치에서 민주당은 범야권의 맏형 역할을 해야 한다. 한국 정치가 민주당 없이도 안 되고, 민주당만으로도 안 된다. 민주당은 과감한 양보와 혁신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2009년 경기도 안산·상록을 보궐선거에서도 내 모든 것을 걸고, 같은 주장을 했었다. 또 범야권의 다른 정당이나 시민사회도 야권통합이나 연대과정에서 민주당의 역할과 권위를 충분히 인정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민주당이 먼저 혁신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민주당이 자기혁신을 추동해 낼 힘이 있다고 보는지?

민주당은 작년 10월 3일 전당대회 때 놀라운 변화를 보였다. 모든 최고위원 후보가 진보와 야권연대 또는 통합을 내걸었다. 많은 분이 민주당이 대대적으로 혁신해야 하고, 새로운 리더십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비정규직 문제 해결의 중요성, 시장만능주의 정책의 지양, 경제적 민주화, 보편적 복지국가 주장 등 서민들에게 다가가는 정책변화를 추구하는 전·현직 의원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나 스스로도 많이 기대되고, 함께 할 수 있는 부분들도 많다는 생각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한국 사람들이 '잘 살고, 자유롭고 평등한 것', 이게 내가 바라는 정치 목표이다. 자유롭지 못한 것, 억압에 대해서 이제는 국민들이 용납하지 않는다. 이메일이 검열되고, 휴대폰이 감청되고, 사람의 인신이 쉽사리 구속되는 것, 이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 국민이 고르고 풍요롭게 잘 살아야 한다. 상위 10%만 잘 살고 나머지 90%는 못 사는 사회를 바라지 않는다. 전에는 20 : 80이었는데, 지금은 심지어 1 : 99라고까지 한다. 남미와 같은 사회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잘 사는 소수 사람은 담을 높이 쌓고, 철조망을 치고, 기관총으로 무장한 경비들이 있는 집에서 살고, 나머지 못사는 사람들은 최소한의 조건도 갖추지 못한 환경에서 사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답게 사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삼포시대(세 가지를 포기해야 하는 사회)'라고 해서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못하는 사회라고들 한다. 이러한 현실이 심히 우려된다. 모든 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데 더 힘들어지고 있는 것 같다. 모든 사람이 잘살고,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는 것을 실현하는데 정치의 역할이 있고,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정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어떠한 정치세력이 정권을 창출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민족 문제로는 남북문제, 내부문제로는 계층문제

민족 문제로는 남북문제, 내부문제로는 계층문제가 있다고 본다. 남북 간 평화 공존, 평화 교류를 통해 평화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10여 년간 평화공존은 이루어진 것 같았다. 최소한 남북 간 전쟁은 일어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 간 긴장은 고조되고,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자주 야기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도 같은 동족끼리 전쟁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세계적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남북 간의 평화 구축은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내부문제로는 갈수록 심화하는 양극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본다. 격차사회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 내 보통 사람의 삶의 질을 개선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내선 대선을 맞아 민주당 손학규 대표를 비롯하여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최근에는 안철수 원장까지 대선 후보자들이 출현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그러한 시대적 요구를 잘 담아낼 수 있는 리더는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내년 대선에서 누가 대통령이 될지는 모르겠다. 대통령뿐 아니라 정치적 리더는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대안 정책을 가지고 있고, 이를 현실화 할 수 있는 정치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본다.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마련해주는 것이 지도자라고 생각한다.

이제 임종인 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어린 시절 임종인은 어땠나?

일종의 정의감이 있었던 것 같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이유 없이 때리신 적이 있었다. 그럴 때 내가 항의를 한 적이 여러 번 있었고, 항의하다가 내가 맞거나 징벌을 받은 적이 있었다. 부당한 모욕과 억압에 대해서는 본능적 저항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남의 고통에 눈 감는 것은 스스로의 양심을 닫는 것이라 생각을 한다.

청년 임종인은 어떤 꿈을 꾸었나?

나는 유신체제하에서 청년 시기를 보냈다. 한국사회 전반에 억압이 매우 강할 때였다. 국민이 대통령을 비판하면 감옥에 가는 시기였는데, 교과서에서 배운 것들과는 매우 다른 현실이었다. 교과서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있었지만, 국민이 헌법을 고치자고 하면 징역 3년을 보내는 사회였다. 헌법에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한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되어 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참 암울한 시대를 살아서 요즘 이야기할 수 있는 개인의 큰 꿈이라는 것을 갖기 어려웠다. 대통령 선거가 자유롭지 않은 데, 대통령 되겠다는 꿈을 가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가슴에 품었던 꿈은 한국 사회가 최소한의 자유라도 가질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말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책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사회. 책을 숨어서 봐야 하고, 말도 자유롭게 못 하는 사회에서 무슨 국가의 발전과 국민의 발전을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생각을 했다. 내가 청년일 때는 젊은이들이 투사가 되어야만 하는 시기였다. 비록 내가 투사는 아니었지만, 젊은이들에게 투사가 되기를 요구하는 사회는 제대로 된 사회가 아니다. 당시 사회의 기본적인 문제들을 젊은 대학생들이 나서서 비장하게 해결을 해야 했다. 분신하고, 데모하다 죽기도 하고, 매우 암울한 시대였다.

군부독재 시절 청년들이 시대적 문제 앞에 분신자살을 했다면, 현재 청년들은 여러 이유로 자살하고 있다. 사실 청년뿐 아니라 한국 사회 자살률 자체가 매우 높다. 자살이 시대적 문제 앞에 청년들의 절망이 표출되는 결과라 본다면, 과거 군부독재 시대나 지금이나 어떤 면에서 청년들이 살아가는 사회는 비슷하게 절망적이지 않은가 싶다.

나의 청년 시기 한국 사회는 정치적 자유가 문제였다면, 현재 한국 사회의 큰 문제는 경제적 여건 상실에 있다고 본다. 자살을 많이 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살기가 그만큼 괴롭다는 것이다. 괴로움이라는 것이 여러 모양을 하고 있겠지만, 무엇보다 인간다운 삶을 이룰 수 있는 기본적인 삶의 여건이 상실되고 있다는 것이 크다고 본다. 현재 대학생들이 등록금에 시달리고, 치열한 경쟁에 시달린다. 졸업해도 좋은 일자리가 아닌 비정규직으로 취업하는 경우가 많다. 소수 사람들만 정규직으로 취업하고, 대다수 젊은이들은 비정규직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에서의 비정규직 일자리로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고, 또 유지해 나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구조적으로 발생되고, 양산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양태성

존경하는 분이 있다면?

장준하 선생과 리영희 선생을 존경한다. 장준하 선생은 독립운동가였고, <사상계> 창간과 발행을 했다. 반독재 민주화 인사였다. 장준하 선생은 대학 다닐 때 일본군 학병으로 중국에 끌려갔다. 목숨을 걸고 일본군을 탈출하고 광복군에 가담해서 독립운동을 했다. 이후로도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지속하신 분이다.

리영희 선생은 우리 사회 지식인으로서 사회의 근본문제를 분석해서 국민들에게 제공하고, 본인도 실천에 앞장섰던 날카로운 이성을 가진 분이셨다.

장준하 선생은 의지, 리영희 선생은 이성으로 나에게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장준하 선생을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다. 1975년 8월 17일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넉 달 전에 장준하 선생이 쓴 <돌베개>라는 책을 읽었다.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아서 '꼭 만나봬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돌아가셔서 직접 만나 뵙지는 못했다. 장준하 선생과 같이 일본군 학병을 탈출하고 독립군 활동을 같이 한 김준엽 고려대 교수님을 찾아가서 일본 학병을 탈출한 결심 경위와 당시 상황, 장준하 선생에 대해서도 물어봤었다. 장준하 선생이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셨는데 내가 법무관으로 근무하던 철원에서 가까워 사고 현장도 자주 찾아갔었다.
리영희 선생은 처음에는 책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 1990년대 초반부터 20여 년 가까이 직접 만나 뵙고 여러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켜 나갔던 분이었다. 작년 돌아가시기 전까지 자주 찾아뵐 때, 재미있고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국회 방송에 내가 존경하는 분으로 모시고 출연도 했었다.

의지와 이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이 두 분을 기억하고, 존경하고 있다. 김준엽 선생은 당시 20살 대학교 2학년 학생인 내가 불쑥 찾아가서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처음 본 학생인데도 친절하고 자세히 여러 가지를 말씀해주셨다. 내가 특별할 것 없는 사람이지만 나에게도 어린 학생들이 찾아와 여러 가지를 물어보면 성심성의껏 답변을 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부분은 김준엽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영향인 것 같다.

인권 변호사를 하게 된 계기가 있는지, 관련하여 기억에 남는 판결이 있다면?

변호사의 임무 중 중요한 것이 인권옹호이다. 변호사는 배운 법률지식으로 억울한 사람들을 구제해주는 것, 그리고 마땅히 가져야 할 몫을 뺏기지 않게 해주는 것, 또 부당한 권력이나 국가권력으로부터 개인이나 집단을 보호해 줘야 하는 임무가 있다. 인권변호사라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변호사라면 마땅히, 그리고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었다.

기억에 남는 판결은 어머니를 죽였다고 해서, 1심에서 징역 15년 받은 사건을 2심, 3심에서 무죄로 이끈 원죄사건이다. 1992년도 사건으로 피고인은 당시 김 아무개라는 근로자였는데, 경찰에서 고문을 받아서 자신이 어머니를 죽였다고 할 수 없이 허위진술을 한 사건이었다. 어머니가 어떤 강도에게 살해당한 것이 진실인데, 어머니 살해범으로 몰려 중형을 받았으니 얼마나 억울했겠는가.

훌륭한 학생, 근로자, 농민, 민주인사 등과 피고인과 변호인으로서 대화하고, 분해하고, 싸운 중요한 국가보안법, 집시법사건 등이 많이 있었다. 대부분 열심히 변호하고, 피고인이 열심히 주장해도 대부분 유죄가 나왔다. 이른바 '정찰제' 판결이었다. 그러나 가끔 무죄가 나온 경우가 있었다. 그런 경우가 기억에 남는다.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있나?

당연히 있다. 영화 보면서 감동하여 운 적도 많다. 기억에 남는 것은 2004년 12월 말 국회의사당 앞 연설장에서 흘린 눈물이다. 당시 2000여 명의 시민들이 영하 10도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지원 농성을 26일간 했었다. 단식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때 감명받아 연설을 못하고, 눈물 반, 연설 반 한 적이 있다. 또 일시적이긴 했지만, 우리가 월드컵 4강에 진출했을 때 동네 주민분들과 함께 운 적도 있다.(웃음) 집단적 감동이라 생각을 했다. 5.18 때 광주수복 직후와 일제로부터 해방됐을 때도 비슷한 집단적 감동이 아니었을까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힘들고 외로울 때는?

내 뜻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왜곡되는 경우 힘들었다.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적했었는데 근거도 없이 매도하고 공격받을 때 힘들었다. 한미FTA 반대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문제점, 그리고 금융자본주의에 대해 비판했을 때에도 그런 경험이 있었고, 남북 군사력 비교나, 평화 체제를 주장했을 때에도 뜻이 왜곡되고, 매도되는 것을 보면서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인권 변호사를 하다 정치를 하겠다고 결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양태성
변호사의 일은 법률을 해석하는 일이다. 그리고 정치인의 일은 법을 만드는 것이다. 정치인은 좋은 법을 만들 수 있다. 시국 사건 변호를 하다 보니, 법을 해석만 할 것이 아니라 법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근로자나 노동자들이 구속되었을 때, 내가 변호를 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법을 바꾸고 좋은 사회체제를 형성해 가는 것은 정치의 역할이기 때문에 정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것이 계기라면 계기이다.

변호사와 정치인은 똑같이 법을 다루긴 하지만 매우 다를 것 같다. 특별히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무엇이라 보는가?

정치인은 그 사회의 문제를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드러내야 한다. 변호사는 법정에서 표현하지만, 정치인은 온 국민을 대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정치인은 현재의 문제를 알고, 그것을 잘 알려야 한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또 무엇보다 정치인에게는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통찰력이 중요하다고 본다.

임종인에게 정치, 정치인이란?

정치는 올바름을 현실로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회 흐름을 만들어가는 것도 정치인으로서 해야 할 중요한 책무라 생각한다. 학자는 올바름을 주장하고, 이론으로 주장을 한다. 학자의 영역은 그렇지만 정치인은 그 올바름을 현실로 실현시키고, 그것을 대세로 만들어 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런 면에서 지난 열린우리당 탈당에 대해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앞서 비정규직 법안을 통과시키는 등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너무 많이 쓴 것에 대한 문제 제기 차원에서 탈당했다고 했다. 하지만 책임정치라는 차원에서 볼 때는 무책임한 행동이 아니었나?

탈당 관련해서 비판을 받았다. 당시 당내에서 진보 블록을 형성했어야 한다고 많은 지적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내가 탈당을 해서 18대 국회의원이 안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일방적으로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부분은 결과적으로 이야기될 수밖에 없는데 탈당을 통해 재선하지 못한 것은 결과만 놓고 보면, 내 정치적 미숙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재선이라는 결과가 아닌 정치인 임종인으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에 대해 소신을 밝힌 것도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또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나 스스로 단련과 성장의 계기라고 생각한다. 지역의 어떤 민주당 지지자께서 우리도 민주당 다 좋아서 지지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말을 들었다. 겸허히 받아들이고 있고, 정치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혼자서 주장하는 것이 아닌 나아가야 할 방향을 함께 공유하고, 우리 사회의 대세가 되도록 지지자들과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는 말처럼 '현재 상황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에 따라 과거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것이다. 과거가 잘못 되었다 하더라도 그 과거가 현재를 통해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과거 속에 계속 머문다면 현재와 미래에 대한 발전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당을 나온다는 것은 안전한 울타리를 넘어 허허벌판으로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탈당을 결정하기까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2002년 대선에서의 참여정부의 탄생과 2004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수 의석을 확보한 것은 서민과 중산층의 실제적인 삶을 바꿔줘야 한다는 국민들의 열망 덕분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부분의 인식이 많이 부족했던 것 같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인식 부족, 한미FTA의 무리한 추진 문제, 재산세, 소득세 감세, 금융허브 추진 등 신자유주의 내지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인식 부족이 참여정부나 열린우리당 모두에게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 부분을 고쳐야지만 정권을 재창출할 수 있고, 정권 재창출의 의미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내 나름대로 문제 제기를 많이 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당시 탈당을 한 것이다.

탈당 이후 다시 민주당에 복당하는 과정이 녹록지 않았을 것 같다. 정치인 임종인이 그 시간들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이 있다면?

요즘 드는 생각은 정치는 혼자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올바른 것을 주장만 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다. 그 '올바른 주장을 현실화시키는 것'이 정치라는 생각을 경험을 통해 느끼고 있다.

참여정부에서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으로서 당시 내가 주장했던 사회경제 정책이나 외교 안보 정책이 잘못된 것은 거의 없었다고 생각한다. 한미FTA 경우를 보면, 이는 한국경제를 미국 경제에 귀속시키는 것이고, 대기업은 이익을 보고, 근로자 농민, 자영업, 중소기업은 피해를 보는 것이라고 생각해 반대했다. 왜 서민과 중산층의 폭발적인 지지로 탄생한 참여정부가 한미FTA와 같은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는가. 그때 보수언론이나 한나라당이 한미FTA를 찬성하고, 참여정부 지지층이 반대했다. 정말 괴로웠다. 항의 단식을 하다가 10일 만에 쓰러지기도 했다. 지금 민주당이나 국민이나 시민사회나 한미FTA를 적극 반대하는 것을 보면 결과적으로 내 생각이나 주장이 맞았다고 본다.

그런데 내가 반성하는 것은 내 주장을 그 당시 당의 주류로 만들려는 노력이 충분했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할 동료 선배의원들을 좀 더 진지하게 설득했느냐는 것이다. 청와대 참모들이나, 동료, 선배의원들, 행정부 관료들, 많은 좋은 분들과 함께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보니, 그래도 참여정부나 당에서 올바른 문제의식을 가진 분이 많이 있었다는 생각을 한다.

당시 참여정부에 많은 문제를 지적한 것은 참여정부가 성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랐기 때문이고, 나도 책임 있는 여당의 국회의원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달걀로 바위치기였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현재 민주당이 한미FTA를 반대하고 있는 것은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한나라당에서는 민주당이 왜 이제 와서 반대를 하느냐라는 말을 한다. 전에 잘못한 것을 인지하고 새롭게 잘하려고 하는 것이다. 잘못 판단 한 것을 인정하고, 그 부분에 대해 반성하고, 고치려고 하는 것이다. 더욱이 작년 12월 현 정부의 재협상을 통해 그 내용과 효과가 더 악화되었다. 국가 차원의 문제이고, 후손들까지 깊은 영향이 가는 문제이다.

현재 민주당은 당시 열린우리당과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정책에서 진보적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 비정규직 문제와 한미FTA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현재 민주당이 지지층을 대변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정당으로써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고 보고 이 점이 가장 큰 차이로 보인다.

17대에 매우 활동적인 의정활동에서 불구하고 18대 낙선을 했다. 19대 총선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19대 국회의원이 된다면 무엇을 가장 하고 싶은가?

내가 민주당에 복당한 것은 민주당이 작년 전당대회 때 진보와 연합정치를 내걸었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더 진보로 나가야 하고, 다른 정당 내지 시민사회 세력과 연합해야 한다는 것을 걸었기 때문에 복당을 한 것이다. 정당 측면에서 내가 국회 진출을 하게 된다면 당연히 민주당 쇄신과 변화에 대한 일을 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주당을 포함한 범야권의 총선승리이고, 대선 승리이다. 총선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하여 이명박 정부에서 잘못된 제도와 법을 체계적으로 고치고, 사회경제정책의 방향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대선에서 승리하여 우리가 주장한 정책을 전면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이를 이루는데 나름 이바지하고 싶다.

현재의 꿈이 있다면?

내년 총선에 야권이 승리하는 것. 그리고 내년에 정권교체를 이루는 것이다. 사회가 여러 가지로 어려워졌다. 형식적 자유마저도 보장되지 않는 것 같다. 말도 제대로 못 하고, 글도 제대로 못 쓰는 소위 자기검열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 같다. 국민들의 삶도 대체적으로 너무 어려워졌다. 국민들의 표정이 환해지고, 마음이 편안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지금의 꿈이고, 그러한 사회를 만드는데 조금이라도 힘을 보탰으면 한다.

그리고 내 개인적 인생관이 '의미 있고, 재미있게 살자'는 것이다. 우리네 생활이 서로 경쟁하고, 질시하는 구조가 아닌 서로 도와주며 즐거워하는 구조가 되어야 하고, 그렇게 만들고 싶다는 꿈이 있다.

ⓒ양태성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나누고 싶은 말이 있다면?

교육이라는 것이 자유롭고 건강하게 자신의 능력과 실력을 키울 수 있게 해주는 장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교육을 통해 자기만족을 이루고, 전반적인 삶의 만족이 고양되어야 하는 것이다. 당연히 직업의 선택에 있어서도 상황과 돈이 아닌 자기만족과 성취를 이루며 삶을 유지해 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기간은 지나친 경쟁을 조장하여 학교생활이 너무 피곤한 것이 문제다. 내가 40여 년 전 학교 다닐 때도 학교 가기가 싫었는데, 현재는 더한 것 같다. 대학생활도 더 나빠진 것 같다. 나 때는 그래도 여유도 있었고, 어느 정도 놀아도 취직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취업도 어렵고, 좋은 직장도 많지 않다.

청년들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사회 전반의 문제이고, 제도의 문제다. 그러나 청년들 또한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해 나갈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근래 내가 주장하는 것 중 하나가 19세 피선거권 확보 운동이다. 단지 투표하는 것만이 아니고, 19살이 되면 시의원, 도의원으로, 또 국회의원으로 출마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 문제의 주체인 학생들이 정당한 제도적 틀 안에서 바꿔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청년들의 주체적 활동이 우리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는 밑거름이고 희망을 만들어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유인 인터뷰에 빼놓을 수 없는 질문이다. 임종인에게 자유란?

자유라는 것은 국가 권력이나 강자로부터 억압을 당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개인들이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보장받는 생활을 할 수 있는 상황을 자유 내지 자유롭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인터뷰 및 정리: 정치경영연구소 김경미, 양태성 연구원)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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