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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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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태규 명리학 <81>

잘 살고 잘 죽자!

누구나 잘 살고 싶어한다. 그런데 잘 죽는 것도 잘 사는 것 속에 포함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으니 안타까운 마음이다. 그래서 오늘은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죽음은 언제나 남의 일이다. 신문지상에서 차 사고로 사람이 죽었다는 기사를 대하면 그런가 보다 하며, 가까운 부모 형제나 친지가 세상을 떠나면 비통하지만 그 역시 그들의 일이지 나의 일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변의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만을 알지, 나 역시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잊은 채 산다.

우리가 불멸(immortal)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것은 머리 속에서 그럴 뿐, 현존하는 진실은 아니다. 살아있는 자에게 있어 죽음은 관념으로 존재할 뿐, 현실은 아닌 것이다. 그 바람에 우리는 죽음에 대해 무지하다.

그러나 죽음을 외면하고 죽음에 대해 무지한 탓에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는 끔찍할 정도로 크다.

사람이 얼마 살지 못한다는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되면, 누구나 거치게 되는 심리적 과정이 있다고 한다. 그 첫 번째 단계는 분노라고 한다. '왜 하필 내가?' 라는 생각, 자기만 이 세상에서 소외된다는 생각이 분노를 자아내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가 협상(deal)이라고 한다. 즉, '알았어, 죽는단 말이지. 하지만, 언제까지만 살게 해다오' 하고 죽음과 협상을 시도하는 것이다. 가령 내년 춘삼월 벚꽃이 필 때까지만 이라든가, 우리 손주가 결혼하는 모습만 보게 해준다면, 또는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을 마무리할 수만 있다면, 이런 식으로 협상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 또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심한 좌절과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식사도 대폭 줄어들고, 체력도 약해지면서 본격적인 죽음의 과정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단계가 지나면 체념의 단계로서,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변하게 된다고 한다.

이런 심리 변화는 결국 남의 일이던 죽음이 자기의 일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잘 죽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죽음에 대한 정확한 인식의 부족에서 온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죽음에 대해 알아야 할 가장 우선적인 것은, 죽음이란 어느 날 갑자기 다가서는 현실이 아니라, 성장이 끝난 시점,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노화가 시작되는 시점이 바로 죽음이 시작하는 지점이라는 사실이다. 노화의 마무리가 바로 죽음인 것이다.

그렇다면 잘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간단히 정리하면, 죽음에 수반되는 심리적 정서적 육체적 고통을 가급적 적게 겪는 것이 잘 죽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해 알아야 하는 것이다.

가령, 어떤 종류의 불치병에 걸리면 죽기까지 어느 정도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불안해도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아울러 죽는다는 것에 따른 정신적 충격이 어느 정도인지, 사전 준비를 통해 완화할 수 있는지의 여부도 거의 모른다. 보험에 들어놓으면, 비용이야 나오겠지만, 인기척 없는 싸늘한 중환자실에 방치된 채 죽음을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기막힌 상황인가를 생각하면 보험가입이 죽음에 대한 준비로는 태부족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책방에 들러 보라, 주식 두 배로 튀기는 법, 기타 돈버는 기술, 즐거운 섹스, 좋은 식당, 가볼 만한 여행지, 경쟁에서 승리하는 법에 관한 책, 즉 잘 사는 법에 관한 책들로 가득할 뿐, 잘 죽는 방법에 관한 책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이에 대해 가르쳐주는 교육 기관이나 연수 코스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필자 기억으로는 없다, 아마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처럼 죽음, 다시 말해서 삶을 잘 마치는 것에 대한 준비는 모든 이들이 너무도 부족하고 소홀한 채 무턱대고 살다가 어느 날 죽음을 불청객-사실은 예정된 손님이지만-으로 맞이하게 되다 보니 당황되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퇴계 이황 선생은 임종 직전까지도 바르고 곧은 자세를 풀지 않으셨으며,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기실 말씀 다 하신 연후에야 세상을 뜨셨다고 한다. 한 제자가 주역의 괘를 뽑았더니 '군자유종(君子有終)'의 효사를 얻으셨다고 한다. 실로 성인군자라 부르기에 조금의 부끄럼도 없이 당당한 삶의 마감이었다 할 것이다.

이황 선생만이 아니라, 정신 세계와 수양의 경지가 높은 사람들은 이처럼 품위와 여유가 있는 죽음을 맞이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이는 우리가 죽음에 대해 너무도 무지하고 준비가 부족한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운명을 연구해 온 필자는 사람의 사주를 보면 그 사람이 결국 무슨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될는지, 그 시기는 대략 언제인지를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다. 죽음을 예측하는 것은 사고사가 아닌 한, 사실은 노화의 흐름과 정도를 살펴보는 것과 동일하다. 옛날 명리학 서적을 보면서 느끼는 분명한 점은 오늘날 섭생과 의술의 발달로 생사의 고비를 지난 세월에 비해 수 차례 넘기고 있다는 점이다.

아래 사주를 하나 예로 든다. 이 분은 1923년 생이다.

년 癸亥
월 丙辰
일 辛酉
시 丁酉

사주에 수기가 강한 반면 화기가 약하니 이 분의 사망원인은 심장마비 또는 노인성 치매로 세상을 떠나실 분이며, 대장의 노화로 인해 고통을 겪으실 분이다.

얼마 전, 가수 조용필 씨의 부인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수긍이 갔다(이 지면을 빌어 삼가 애도를 표한다). 2003년 1월은 壬午년 壬子월이니 수기가 강한 달이고, 午火를 子水가 충하여 심장에 지병이 있던 분이라면 충분히 그럴만한 계절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지난 12 월과 1 월에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대단히 많았을 것이며, 특히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기록적인 수치를 보였을 것이다.

또 지나간 여름에는 이주일 씨가 폐암으로 세상을 등졌다. 작년 초, 담배는 독약이라는 이주일 씨의 메시지에 필자는 아, 저분은 태어난 날이 금(金)이구나 싶었고, 아마도 8-9월이 고비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결국 이주일 씨는 8월 27일 오후 3 시쯤 별세했다.

그 분이 사망한 시각을 음양오행으로 표시해보면 다음과 같다.

년 壬午
월 戊申
일 丁卯
시 丁未

폐암이라고 하니, 폐는 금기이고 그렇다면 폐를 보호하는 수기(水氣)가 중요해진다. 사망일자와 시각을 보면 壬午년이라 물이 들어왔지만, 8월 戊申월이 되자 폐 기능은 대단히 무력해진다. 무토가 임수를 누르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丁卯일이 되자 불의 기운이 강해지고 시 또한 丁未시라 화의 기운이 가장 강할 때, 화기가 토기를 도와 임수를 누르니 그만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주일 씨의 투병 일기에 보면 2001년 7월, 辛巳년 乙未월에 몸이 좀 이상해서 병원에 가서 종합검진을 받았더니 아무 이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0월경이 다시 이상해서 병원에 갔더니 말기 폐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으니 얼마나 황당했었겠는가?

3개월 사이에 급속도로 암이 진전된 셈인데, 이는 8월과 9월 丙申, 丁酉월이라 화기가 금기를 눌러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얼마나 당황하고 곤혹스러웠을까.

앞서의 이황 선생이나 정신 수양이 높은 분들인들 왜 감정의 동요가 없었으랴 만은 일생의 수양과 마음 공부를 통해 스스로를 잘 다스리고 죽음에 대해 미리 준비하고 있었기에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죽음은 우리의 삶을 나태하지 않고 완성하도록 묵묵히 강제하는 궁극의 힘이다. 그러니 죽음을 금기시하거나 남의 일로 여기지 말고, 삶의 한 과정으로 인정하고, 삶의 테두리 내로 끌어들일 때 우리의 삶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을 불청객으로 여기지 말고, 언젠가 찾아올 손님으로 맞이할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죽음은 두려운 것이지만, 그 두려움 중에는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두려운 바가 있다. 공포란 원래 미지(未知)의 아들이다. 어두운 밤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두려운 것도 역시 미지이기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높은 정신 공부가 없는 평범한 우리들도 적절한 사전 교육을 받고 준비만 한다면 성현들처럼 우아하고 품위가 있게 삶을 마감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특히 잘 죽기 위해서는 조기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조기 교육이란 어릴 적부터의 교육이 아니라, 중년부터의 교육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중년의 나이가 되면, 몸이 예전만 못하니 보약을 찾고 더러는 기공 체조도 하며, 조깅이나 걷기 운동을 하거나 최소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물론 좋은 일이지만, 사실은 이 때부터가 죽음에 대한 무지(無知)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시기인 것이다.

죽음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서 나이가 들어 정신이 흐려지고, 자기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지경이 되면, 육체의 고통과 함께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만이 우리의 정신을 지배할 것이니 준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나이 먹으면 어서 죽어야지.'하는 마음에 없는 말을 하곤 한다. 하지만, 현혹되지 말라. 이는 죽음의 공포를 스스로 달래기 위해 하는 말일뿐, 정녕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이런 얘기를 마치 대단한 발견이나 되는 양, 꼬집는 유머도 있지만 그래선 안 되는 것이다. 그들 역시 우리처럼 죽음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배울 기회가 없었기에 불안한 것이다.

더하여서, 병원이나 의료 역시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고, 의사들은 삶과 죽음에 관한 지식을 독점한 채 정보를 주지 않고 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돈은 또 얼마나 드는지, 치료하면 소생의 가능성은 있는지, 정말 물어볼 말이 한 두 가지가 아니건만, 그저 가타부타 아무 말 없이 그저 돈을 들고 병원으로 오라고 할뿐이다. 입원해 봐야 자상한 말 한마디 듣기 어려운 현실이다.

죽음이란 어차피 혼자 가는 여행이지만, 미리 죽음에 대해 알고 준비한다면 공포나 두려움이 그만큼 덜할 것이다. 그리고 최소한 그 문 앞까지는 같이 동행해 줄 가이드도 필요하다.

앞서간 모든 사람들이 간 길을 이제 당신도 가는 것이니, 너무 부담스러워 말라고 미소로 건네는 한 마디 위로와 안내의 말도 없이 지금 이 시각에도 많은 사람들이 방치된 채, 낯선 길을 홀로 더듬어 가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인가.

오늘날 죽음은 인권의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있으니 우리 모두의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이제부터라도 죽음에 대해 알고 준비하며, 계획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서 이 글을 올린다.

<앞으로 '김태규명리학'은 주 1회 화요일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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