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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T 탈퇴, ‘죽을 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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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T 탈퇴, ‘죽을 죄’인가?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22>

한 나라의 첩보기관이 다른 나라에서 사람을 납치한다는 것은 거의 전쟁에 준하는 국권 유린행위로서 엄청난 외교적 부담이 따르는 일이다.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20여년 전 김대중 대통령을 일본에서 납치했다가 곤욕을 치른 일이 있다. 북한은 일본인 납치사실을 자인함으로써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감추고 있어 봤자 영원한 걸림돌이 될 것을 알기 때문에 맞을 매 빨리 맞자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1986년 이스라엘 첩보기관 모사드가 한 이스라엘인을 영국에서 납치해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은 일이 있다. 피납자는 바누누라는 이름의 기술자. 바누누는 이스라엘이 ‘디모나’라는 암호명으로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한 사실을 국제 반전단체에 제보해 이스라엘을 반핵운동의 표적으로 만든 인물이었다. 본국에 송환된 바누누는 반역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면회도 없는 독방 감금으로 12년을 지내다가 몇 년 전부터 교도소 마당이라도 산책할 ‘죄수로서의 권리’를 겨우 허용받고 있다.

이스라엘의 핵무기 보유는 ‘눈 가리고 아웅’ 식의 비밀이다. 긍정도 부정도 않고 버틴다. 핵확산금지조약(NPT) 같은 것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미국이나 국제원자력기구나 건드릴 생각도 않는다.

조약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쌍무적인 것이다. 1970년 성립된 NPT는 핵무기 보유국이 당시까지의 5개국에서 더 늘어나지 않도록 하는 데 목적을 둔 조약이다. 미보유국이 미보유 상태에 묶여 있도록 하는 불이익을 보상하기 위해 보유국이 미보유국에 핵무기를 함부로 쓰지 못하도록 보장하는 것이 미흡하나마 미보유국에 대한 보상이다. 이 보장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미보유국은 NPT 체제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핵무기를 실제 함부로 쓰지 않는 것은 물론, 제멋대로 쓰겠다는 위협부터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핵무기 보유국의 의무다. 핵무기의 특성 때문이다. 보유국이 미보유국을 상대로 핵무기를 써 버리고 난 뒤에 조약에 어긋난 짓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파괴수단만이 아니라 위협수단으로서도 핵무기의 의미를 억누를 수 있어야 NPT는 실효성 있는 조약으로 성립된다.

핵무기는 묘한 특성을 가진 무기다. 잘났거나 못났거나, 힘이 있거나 없거나, 돈이 많든 적든 모든 사람이 죽음 앞에서 평등하듯, 핵무기 앞에서는 모든 국가가 비슷한 수준의 위협을 느낀다. 미국이 고성능 핵무기 수천, 수만 기를 가지고 있어도 이것으로 이스라엘을 위협할 수 있는 힘과 작은 핵무기 수십 기를 가진 것으로 알려진 이스라엘이 마음먹는 데 따라 미국을 위협할 수 있는 힘 사이에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NPT는 근본적으로 불평등조약이다. 기존 보유국의 핵무기 독점은 아무리 그 사용을, 그리고 그 사용 위협까지 엄격하게 규제한다 하더라도 엄청난 전략적 이득이다. ‘평등의 무기’라 할 수 있는 핵무기만 배제한다면 군사력은 군사비에 비례해서 결정되고 만다. 미국은 미보유국을 상대로는 아무 걱정 없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 NPT는 미국을 위한 조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자기네에게 유리한 조약에 더 많은 나라들이 묶여 있게 하려면 이 조약을 미국이 앞장서서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개방의 길을 겨우 내다보기 시작하는 북한을 부시는 ‘악의 축’이라고 불렀다. 아프가니스탄을 작살낸 직후다. 선제 핵공격 가능성까지 정권 주변에서 마구 풍긴다. NPT를 지켜도 그 대가로 보호받을 수 있다는 보장을 부시 정권은 지켜주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꼴 당하는 것을 면하기 위해 북한이 미국과의 불가침조약을 요구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북한이 호전적 정책을 버리고 있다는 것은 제네바 기본합의가 성립된 이래 여러 해 동안 꾸준히 확인되어 온 사실이다. 개방과 평화의 길을 열어주기만 한다면 북한이 국제사회를 등지려 들지 않으리라는 것이 남한을 비롯한 주변국들의 기대다.

그런데 미국은 켈리 한 사람의 증언을 근거로 북한의 불가침조약 요구를 묵살하고 NPT 기준과도 상관없는 무리한 핵사업 포기를 요구하는가 하면 중유 공급을 중단해 제네바 기본합의의 기본 틀까지 뒤집어놓았다. 그러니 의심이 드는 것이다. 과연 미국, 아니, 부시 정권이 바라는 것이 평화인가, 아니면 전쟁인가?

대립의 격화를 좋아하는 부시 정권의 속성은 미사일 방어망(MD) 추진과 요격미사일 금지협정(ABM) 폐기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MD는 천문학적 비용을 들여 타국의 핵공격으로부터 미국의 안전을 확보하겠다는 사업이다. 이것이 완성된다면 미국은 NPT에 의지하지 않고 마음대로 핵전략을 구사할 수 있게 된다. 소련과의 ABM 협정은 미국의 군비억제를 보장해 온 유일한 실질적 장치였다.

북한의 NPT 탈퇴는 미국의 일방적이고 무리한 적대정책 앞에서 존중할 만한 합리적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유감스러운 사태다. 우리 정부와 주변국들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유감과 우려의 뜻을 표명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일부 언론이 ‘유감과 우려’의 뜻을 ‘비난’으로 포장해 국민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은 더욱더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 유감스럽고 우려스러운 사태가 북한만의 잘못으로 빚어진 것으로 온 세계가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부시 정권의 기관지 노릇을 자청하는 까닭을 이해할 수 없다. 무식도 이 정도면 죄악이다.

거듭 말하지만 NPT는 불평등조약이다. 그러나 이만한 수준의 핵무기 억제체제라도 주어진 현실 앞에서는 잘 지켜지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미국은 핵무기 미보유국이 무분별한 선제 핵공격만은 당하지 않게 한다는 NPT의 기본정신을 짓밟음으로써 NPT의 성립근거를 허물고 있다. 그 결과는 NPT의 최대수혜국인 미국으로 결국 돌아올 것이다.

미국은 NPT가 제 구실을 하도록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에 핵무기 보유국의 위상을 양성화 해줘서라도 NPT의 통제에서 벗어난 핵무기가 방치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북한 들볶는 일보다 더 긴요하다. 북한이나 이라크보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더 큰 위협을 세계평화에 끼치고 있는지 미국인들은 정말로 알아보지 못한단 말인가. 무신경도 이 정도면 죄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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