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글에서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기본적인 방식은 이분법(二分法)이라 말했다. 바로 dichotomy 인데, 어떤 물체에 한 번 칼을 대어 자르면 두 개로 나눠지는 것과 같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개가 된다는 점이 아니라, 대상을 구분하는 방식이다. 구분하고 크게 나누는(大別)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 바로 사물을 장단(長短)과 경중(輕重), 대소(大小), 고저(高低), 명암(明暗), 후박(厚薄), 한온(寒溫) 등등 두 가지 측면에서 인식하는 것이다. 어휘들도 이처럼 대립되는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주목하시기 바란다.
그렇기에 음양이 있고, 이원론이 있을 뿐이지 삼원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 개부터는 이미 다원(多元)이며 다자(多者)에 속하는 것이다. 다원 또는 다자는 그 전에 두 개로 대별하는 과정을 이미 여러 번 반복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우리가 도형을 인지할 때, 우선은 원형(circle)이냐 각형(角形)이냐를 먼저 구분한다. 그 결과 그것이 각이 진 형태인 것을 인식한 연후에야, 그것이 삼각형이냐 사각형이냐 또는 오각형이냐를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사물을 받아들이는 기본 방법이 바로 사물을 두 가지 측면에서 구분하는 것이라는 얘기가 이제 충분히 납득이 가셨을 줄로 믿는다. 그럼, 지금부터 음양과 서구적 이원론이 어떤 의미와 색채를 가지면서 동서양이 차이를 나타내는지를 얘기해 보기로 하자.
결론부터 말하면 음양은 상대적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양은 음이란 것이 느껴질 때, 양이 성립하는 것이고, 음은 양이란 것이 인지될 때 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음이 없이 양은 없는 것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음양은 상대성(相對性)을 전제로 한다.
반면 서구의 이원론은 대표적인 두 요소가 고정불변임을 전제로 한다. 이는 서구 철학의 시원이 되는 그리스 철학이 근본적으로 ‘thing'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물에 대한 명증성(明證性)을 중시했는데, 이는 지중해의 저 풍부한 태양광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사상이 기후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에 놀라신다면 독자는 아직도 인간의 정신과 오성이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도그마에 빠져 계신 것이다).
눈부신 태양 아래에서 사물은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대비가 강조되면서 명확하게 스스로를 나타내 보인다. 거기에 사물이 명확하게 존재하는 것이다!(Thing is clear there!). 따라서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야말로 서구 사상에 있어 가장 서구적인 색채를 덧입혀준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에 기반을 제공한다.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그리스 철학의 양대 갈래인 엘레아 학파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이 사내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주요 인물일 뿐 아니라, 사실은 서양 철학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흔히들 소크라테스가 동양의 공자처럼 대우받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그 자리는 이 사람이 차지해야 옳다.
그는 두 가지 주장을 했다. 하나는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지,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이 생겨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무에서 유가 생겨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인간의 인식이나 감각 작용은 헛된 것이어서, 마치 무에서 유가 생길 수 있다는 잘못과 오류를 범하며, 그 오류에서 벗어나려면 사변적 이성(reason), 즉 논리에 의지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이는 바로 논리의 명증성과 정합성을 강조하는 서구 철학과 논리학의 출발점이다.
이에 더하여 또 하나의 고대 그리스 철학인 자연철학, 즉 자연과 우주에 대한 생각과 주장으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한 밀레토스 학파는 여러분도 제법 들어본 적이 있는 탈레스라는 사람이 창시자이다. 그가 소아시아(오늘날의 터키 일대)의 그리스 식민지 밀레토스 출생이기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그는 이집트에 유학하여 바빌로니아의 수학과 천문학을 배웠다. 일식(日蝕)을 예측하기도 했었으며, 이집트의 경험적ㆍ실용적 지식을 바탕으로 논리에 바탕한 기하학을 확립한 인물이기도 하다. 원은 지름에 의해서 2등분된다, 2등변삼각형의 두 밑각의 크기는 같다, 두 직선이 교차할 때 그 맞꼭지각의 크기는 같다는 등의 정리(定理)는 그의 창안이다.
동시에 그는 우주와 만물의 구성에 대한 탐구를 고대 그리스에 전파한 사람이었다. 만물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하는 생각과 탐구는 원래 인도와 바빌로니아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 학파의 주요 인물들은 각기 다른 주장을 펼쳤지만, 중요한 점은 그것을 설명하는 방식이 바빌로니아나 인도의 그것에 비해 좀 더 합리적이었다는 점이다.
즉, 그들은 그전에 존재하던 우주에 대한 신화적인 설명에서 탈피하여 만물을 자연 그대로 관찰하고, 그것이 움직이고 변하는 이치의 보편적 원리를 인간의 이성에 부합되는 방향, 즉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했었던 사람들이다.
이 같은 고대 그리스 철학의 양대 갈래는 플라톤에 와서 이원론으로 집대성되는데, 이는 필연적인 흐름이다.
플라톤의 이원론은 이 세계를 가상의 세계인 현상계와 참된 실제의 세계인 이데아라는 두 개의 카테고리로 나눈다. 변화하는 현상계는 경험적 현실세계이자 감각세계이지만, 이데아의 세계는 영원불변의 세계이며 초월적 실제계, 초감각의 세계이다. 현상계는 존재의 개별성이 강조되고, 이데아는 보편성을 가진다. .
사실 엘레아 학파나 밀레토스 학파의 주장은 모두 고대 바빌로니아 문명에 대한 그들 나름의 재해석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진짜’가 아니라 감각기관에 의한 허상(illusion)이라는 생각이나 만물을 이루는 ‘요소(element)'에 대한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고대 바빌로니아 문명의 핵심은 이원론이다. 다만, 무에서 유가 나올 수 없다는 파르메니데스의 날카로운 논리야말로 진정한 서구인들의 특질을 보여주고 있다.
이리하여 그 후의 서구 철학은 눈앞에 보이는 헛것이 아니라, ‘진짜(real thing)’는 존재하며, 그 진짜를 탐구하는 방법은 어디까지나 가장 믿을만한 ‘이성(reason)', 즉 논리를 통하는 방법만이 ’길‘이라는 서구인 고유의 방식에 의해 전개되어졌다. 그에 따라 진짜를 찾으려는 노력은 실로 다양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진짜는 물질밖에 없다는 유물론이 그것이며, 이데아와 감각세계를 구분하여 신의 존재를 이데아의 견지에서 설명하는 주장하는 신학(神學)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중 가장 강력한 경쟁력-이성에 호소하는 힘에 있어-을 가진 주장은 바로 오늘날 원소의 결합으로 물질을 설명하는 화학과 원소의 에너지로 운동을 설명하는 물리학이었다. 바로 현대 과학이 그것이다.
그런 면에서 서구의 과학은 대단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임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초월적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는 면에서 중세 신학에 대한 대체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과학은 가장 강력하고 업그레이드된 신학인 것이다.
반면 동아시아 세계의 음양관은 요소 내지는 원소(element)의 철학이 아니며, 존재하는 세계의 상대적인 측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음양 오행에서 오행 역시 처음에는 목화토금수 라는 소박한 물질관에서 출발하긴 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서 구체적 물질관을 버리고 음양관의 상대성적인 측면에서 오행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동아시아 문화권은 그 지향하는 바가 궁극적인 ‘진짜’를 추구하는 서구의 방향과는 달랐던 것이다. 동시에 이데아의 세계를 동경하지 않았으며, 세상은 그저 눈앞에 존재하는 세상이 전부였고 거기에 충실했던 것이다.
따라서 동아시아에 있어 서구적인 신(god)의 개념은 한번도 있어본 적이 없다. 이른바 천(天)의 개념도 서구의 신과는 전혀 색깔을 달리한다. 이에 따라 음양관도 만물의 요소가 무엇인지를 묻지 않고, 만물의 상대적인 두 측면만을 중시했던 것이다.
동아시아 세계에 있어서 초월적 존재에 대한 생각을 대변하는 것은 음양오행이 아니라 신선 사상이다. 그러나 신선 역시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인간에 비해 무척이나 오래 살긴 하지만 그 역시 사멸하는 존재였다. 불로장생의 생각은 있었으나, 영생불멸이라는 터무니없는 욕심(?)은 아예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불교가 전파되면서, 존재의 덧없음과 영생불멸을 동시에 알게 되었으니 이 또한 묘한 역설(irony)이라 할 것이다.
음양은 동아시아의 산물이지만, 플라톤의 이원론을 비롯한 모든 이원론과 불변의 요소(element)에 대한 생각은 그 뿌리가 인도와 서남 아시아 문화-흔히들 고대 바빌로니아 문화라 부르는-로부터 비롯되었다. 여기에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논리적 이성을 들고 나오면서 또 다른 문화의 줄기가 가지쳐 나온 것이고 그 정점에 오늘날의 물리학과 과학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음양과 오행을 통해 세상의 변화를 읽고 해석했던 동아시아 문화는 오늘날 자기 정체성의 혼돈에 빠져서 서구적 진보주의만이 판을 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새로운 부활의 싹이 움터 나오고 있으니, 음양 오행에 대한 현대적 재조명과 적용이라 할 것이다. 그러니 너무 멀지 않은 장래에 그 본연의 꽃을 다시 한번 화려하게 피워낼 것이다.
이상으로서 음양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 얘기했다. 다소 사변적인 내용들이고, 짧은 지면에 동서양의 철학 전체를 다루다보니 설명도 다소 부족하고 비약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새해 벽두부터 너무 독자들의 머리를 무겁게 한 것이 아닌가 싶어 약간 미안한 마음이다.
그래서 오행에 대한 설명은 약간 미루기로 하고, 다음 번에는 다시 흥미로운 주제를 선보일 생각이다.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에게 정말 고마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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