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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소국의 선택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20>

시황제(始皇帝)의 천하통일을 40년 가량 앞둔 시점에서 진(秦)나라는 서쪽의 변방으로부터 동쪽으로 영토확장을 시작하고 있었다. 여기에 앞장서 맞선 것이 북방의 조(趙)나라였다.

용맹하고 전투에 능한 조나라 군대는 염파(廉頗), 인상여(藺相如), 조사(趙奢) 등 명장들의 지휘 아래 여러 해 동안 진나라 군대를 막아냈다. 그러나 워낙 국세(國勢)에 차이가 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전쟁을 계속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조나라 조정에서 강화 논의가 나왔을 때 대신 우경(虞卿)은 강화를 할 경우 먼저 강경한 태도를 보인 다음 유리한 조건에서 강화를 청할 것을 주장했다. 굳건한 항전태세를 보이면서 남쪽의 위(魏)나라와 초(楚)나라에 사신을 보낸 다음 강화회담에 나선다면 진나라에서 빨리 강화를 체결하고 싶어 서두르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나라 왕은 강화 사신을 곧바로 진나라에 보냈다. 진나라에서는 조나라 사신을 다른 나라 사신들에게 보이며 강화가 임박한 것처럼 선전하여 다른 나라들이 조나라를 도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는 한참 있다가 강화를 거부하고 공격에 나섰다. 고립된 조나라는 장평(長平)에서 40만 병력이 몰살당하는 인류역사상 초유의 참패를 당하고 수도 한단(邯鄲)이 포위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초나라와 위나라의 원병 덕분에 한단의 포위가 근 1년만에 겨우 풀렸을 때 진나라와의 강화조건 논의가 조나라 조정에 다시 나왔다. 여섯 개의 성을 자진해서 바치고 납작 엎드려 진나라의 노여움을 풀자는 주화론이 지배적일 때 우경이 다시 반대하고 나섰다.

"진나라가 힘으로 취할 수 없는 것을 공격하다가 지쳐서 물러가는데 대왕께서는 지킬 수 있는 것을 스스로 진나라에게 바치려 하니 이것은 진나라를 도와 스스로를 공격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년에 진나라가 다시 공격해 오면 대왕께서는 대책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주화론자 조학(趙郝)이 반론을 폈다. "지금 진나라가 위나라, 한(韓)나라와 친선을 유지하면서 대왕만을 공격하니, 그 까닭은 대왕께서 진나라 섬김이 위나라, 한나라보다 못하기 때문입니다. ... 진나라에 예물을 바쳐 위나라, 한나라 수준의 친선을 맺도록 해야 합니다. 내년에 진나라가 다시 조나라를 쳐들어온다면 그것은 조나라의 진나라 섬김이 위나라, 한나라보다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경이 반박했다. "내년에 진나라가 다시 땅을 달라고 하면 대왕께서 땅을 더 주시겠습니까? 거절한다면 앞에 쌓은 공을 버리고 진나라의 화를 돋구는 길입니다. 더 준다면 머지않아 줄 땅이 없게 될 것입니다. ... 대왕의 땅은 한계가 있는 것인데 진나라의 요구에는 한계가 없으니 한계 있는 땅으로 한계 없는 요구를 들어주려면 조나라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형세입니다."

진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누완(樓緩)이 돌아와 주화론에 가세했다. "진나라와 조나라가 다투면 천하가 모두 기뻐합니다. 강한 나라의 힘을 빌어 약한 나라를 차지하려는 욕심 때문입니다. ... (진나라와 강화를 맺지 않으면) 천하 나라들이 진나라의 노여움을 틈타 피폐한 조나라를 공격, 수박 잘라먹듯 할 것입니다."

이에 우경이 다시 반박했다. "조나라의 약한 모습을 천하에 보여주는 것은 위험한 길입니다. 진나라에 줄 땅이 있으면 그것을 대신 제나라에 예물로 주고 진나라를 함께 치자고 청하십시오. 진나라를 미워하는 제나라는 이에 응할 것이니 제나라에 잃은 것을 진나라에서 되찾을 것입니다. 제나라와 관계가 좋아지고 천하에 조나라의 유능함을 보일 수 있으니 외국 군대가 조나라 국경을 넘보지 못할 것이며 진나라조차 많은 예물을 가지고 대왕을 찾아와 강화를 간곡히 청할 것입니다."

조왕은 우경의 헌책을 채택했고, 조나라는 진나라의 진격에 대항하는 합종(合從)의 핵(核)이 되었다. 그러나 몇 년 후 위나라 재상 위제(魏齊)가 진나라의 핍박 때문에 조나라로 도망쳐 왔는데 조왕이 이를 보호하지 않으려 하자 재산과 신분을 모두 버리고 함께 망명의 길에 오른다. 얼마 후 위제가 자살하자 은거하여 국가의 득실을 논한 우씨춘추(虞氏春秋)라는 저술을 남겼는데, 지금은 전해지지 않지만 사마천(司馬遷)은 이를 높이 평가한 바 있다.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가 대립할 때 강한 나라에게는 선택의 폭이 넓지만 약한 나라에게는 좁다. 진나라의 힘에 밀리고 있던 조나라가 그런 대로 수십 년간 진나라를 견제할 수 있었던 것은 우경과 같은 식견과 안목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진나라가 강한 힘을 휘두르는 데 원칙을 존중하고 절제하는 자세를 보였다면 우경의 헌책 같은 것은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나왔더라도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진나라가 다년간 힘만 믿고 약자를 사정없이 짓밟는 꼴을 보였기 때문에 조왕도 우경의 헌책을 받아들이고 여러 나라가 조나라 중심의 합종에 응했던 것이다.

미국의 압박에 강경책으로 대응하고 있는 북한 태도를 보며 우경의 강경책이 떠오른다. 지금의 북한은 다른 무엇보다 존립 자체를 걱정하는 상황이다. 세계는커녕 한반도 적화도 꿈꿀 계제가 아니다. 그런데 왜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까지 들먹이는 험한 길을 택하고 있는 것일까.

미국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국, 특히 부시 정권은 전쟁을 찾아서 일으키려는 성향을 보여 왔다. 개혁-개방도 좋다. 세계화 동참도 좋다. 그러나 개방의 길을 가로막으면서 불가침조약 제안도 받아들이지 않고 일방적으로 발가벗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미국이다.

지금 북한이 발가벗는다 해서 미국이 "그래, 너 착하다" 하고 북한을 대하는 데 보편적 원칙을 잘 지키고 북한의 발전을 최선을 다해 도와줄 것으로 믿을 수 있을까? 우경이 진나라를 믿은 것보다 더 믿기 어려울 것이다.

"나쁜 행동을 이득으로 보상해 줄 수 없다"는 원칙으로 북한과의 대화를 미국은 거부하고 있다. 나쁜 행동인지 아닌지 미국만이 재판권을 가진 일인가? 대화가 북한에게만 이득이 되는 일인가? 관계국 모두에게 이득이 될 대화를 미국이 혼자 고집으로 거부한다면, 그 결과 한반도가 전쟁의 위협을 겪게 된다면, 다른 누구라도 대화에 나서야 한다.

미국이 원치 않는 대화라도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한국이 나서야 한다. 김 대통령과 노 당선자의 말대로 미국보다 더 직접 개입되어 있는 당사자가 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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