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역모를 고변하는 문서에 이름이 한 번 오르면, 그 사람의 인생은 끝장이 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왕위를 노린 것이니, 왕은 아무리 어쭙잖아 보이는 사건도 철저히 조사한다. 역모를 꾸민 자로 지목된 사람은 물론이고, 조금이라도 연루가 되어 있다 싶으면 깡그리 부르고 잡아들여 국청(鞫廳)을 차리고 심문을 한다.
심문 과정은 잔혹하다. 모역인(謀逆人)으로 지목된 사람이 실제 역모를 꾸민 일이 없었다고 하자. 역적질 한 일이 없으니, 자복할 리가 없다. 자복한다면 정말 역적이 되는 것이고, 그 결과는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 본인만 죽는 것이 아니다. 가족과 친구들이 곤장을 맞고, 귀양을 가고, 경우에 따라 함께 죽게 된다. 한사코 부인할 수밖에. 하지만 자복하지 않으면 고문이 따른다. 매를 치는 것은 물론이고, 압슬(壓膝)·낙형(烙刑) 등의 악형(惡刑)이 따른다. 이 과정에서 죽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고통을 견디지 못하면 결국 '지만(遲晩)'을 한다. "너무 오래 속여서 미안하다"는 뜻의 자복하는 말이다. 이런 이유로 조선시대 문헌을 보면, 엉뚱하게 역적이 된, 억울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허다하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적 반대파를 견제하거나 제거하는 논리는 비슷해
드물기는 하지만 역모에 엮였다가 풀려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풀려나도 사람 구실을 온전히 할 수가 없다. 고문으로 몸과 정신이 파괴된 데다가, 자신의 피붙이와 벗들 역시 죽거나 불구가 되거나 귀양을 갔기 때문이었다. 계속 의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역모 사건에 엮이는 순간 그 사람의 삶은 끝장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이치가 이렇기에 엉뚱한 사람에게 역모에 관련되어 있다고 말을 꺼내는 것은 그 사람을 파멸의 길로 몰아넣고자 하는 흉계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런 흉계는 당쟁이 극렬해지면서 더욱 자주 등장했으니, 눈엣가시 같은 정적(政敵)을 소탕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역적이라는 명사를 들먹이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말로 '사문난적(斯文亂賊)'이란 말이 있다. '유교 진리의 정통성을 어지럽히는 이단자'란 뜻으로 사상 검증에 등장하는 말이다. 송시열(宋時烈)은 자신의 정적 윤휴(尹鑴)를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윤휴가 경전 해석에서 주자와 견해를 달리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경전 해석에서 주자와 견해를 달리한 사람은 윤휴만이 아니었다. 경학사에서 주자학파에 속한 학자들 중에도 주자와 경전 해석을 달리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렇다 해서 그들이 유교의 진리성을 신념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윤휴 역시 그렇다. 그는 사문난적이 아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빤한 이치건마는, 송시열의 사문난적이란 한 마디에 윤휴는 정말 이단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제 좀 더 품격 있는 선거풍토를 마련할 때
얼마 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박원순 후보에 대해 '좌파' '종북주의자'라는 말이 쏟아졌다. '종북 세력에게 수도 서울을 빼앗기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런 어휘와 발언이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터일 것이다. 한데, 정말 이상한 일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여당과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김없이 좌파니, 빨갱이니, 좌빨이니, 종북이니 하는 무시무시한 명사를 씌우려 든다. 저 옛날 역모를 꾸미지 않은 사람을 역적으로 몰거나, 멀쩡한 정통 유학자를 사문난적으로 단정하던 꼴을 다시 보는 것 같다.
좌파, 빨갱이, 좌빨, 종북주의 따위 어휘는 정말이지 듣기에도 지긋지긋하다. 그런 말이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은 이번 서울 시장 선거에서 충분히 보았을 것이다. 시장 선거건 국회의원 선거건, 아니면 대통령 선거건 간에, 이제 꼴같지도 않은, 남을 더럽히고자 하는 어휘는 제발 내뱉지 말았으면 한다. 좋은 정책만을 제시하는, 좀 더 품격 있는 정치, 선거를 보고 싶다.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제일 많이 배우신 분들이고, 제일 높은 자리에 계신 분들이 아니신가.
* 다산연구소가 발행하는 '다산포럼'(www.edasan.org) 11일자에 실림 글입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