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좋아하는 사람은 외국여행에서 그 나라 특색이 있는 술집을 찾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마치 골프를 즐기는 사람이 여행지에서 꼭 골프장을 가보고 싶어하는 이치와 같다.
자주 여행했던 일본에서도 그러했다. 우리 대포집에 해당하는 것이「이사까야(居酒屋)」고 좀 고급인 것이「갓뽀우(割烹)」이다. 술집은 주머니 돈에 맞게 층층이 있어 편리한데 「스시(壽司)」집은 대단히 비싼 곳이 많다.
한국사람들은 일본에 가서도 한국인이 경영하는 술집을 주로 애용한다. 동경에서는, 살롱이나 카페에 해당하는 것이 「센(千)」,「지희네 집」같은 곳이고, 밥집으로는 「쿠사노이에(草 家)」, 고급요정으로는「이화원(梨花園)」등이 이름이 나 있었다.
오사까(大阪)에 가서 한국술집 덕수원(德壽園)을 찾으니 노년의 김정구(金貞九)씨가 고정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어 반가웠다.
술에 취해 망신을 당한 적도 있다. 조선일보 시절 동경에서 1차, 2차, 3차를 즐긴 후에 기모노(일본 옷)를 입은 미인이 눈짓을 하기에 친구와 함께 근처 호텔방으로 들어갔는데, 아뿔싸, 그들이 여장남자인 이른바 '오까마'가 아닌가, 처음 당한 일이라 혹시 망신을 할까봐 팁을 두둑이 주고 도망치다시피 나왔다.
동경에서의 압권은 「미카도(Mikado-황궁ㆍ천황의 뜻도 있다.)」란 술집에서 있은 일이다. 미카도는 극장 크기만한 술집으로 음악공연도 있고 춤도 출 수 있으며 주로 맥주를 마시는 곳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호스테스의수가 3, 4백명이 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1970년대의 일인데도 그때 미카도라면 주당 가운데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동경의 명소였다.
여행길 친구 몇 명이 호기심에서 들려서 마음껏 마셨다. 내 옆의 호스테스가 보통명함의 3분의1쯤 될 작은 명함을 주며 다음에 오면 찾아달라고 한다. 주당은 술마실 기회를 여러가지 구실을 대며 만들어 나간다. 당시 조선일보 특파원으로 있던 이종식(李鍾植 -나중에 국회의원)형과 차석특파원인 허문도(許文道-나중에 통일원장관)형 등을 포함한 몇몇이 미카도로 가서 먼저번의 그 호스테스를 찾고 모든 일을 그녀에게 맡겼다. 여자와 술, 안주 같은 것 말이다.
열두시쯤까지 마셨을까, 떠나려고 하니 일행 가운데 일본통이 내 담당 호스테스에게 밖에 나가 한잔 더 하자고 말한다. 영업규칙상 2시까지는 나갈 수 없다는 것. 그러나 바로 앞의 스시집에 가서 스시나 몇 개 들자고 설득, 데리고 나오는 데 성공했다.
일행은 한국대사관이 있는 지역의 단골술집으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유쾌하게 떠들며 술을 마셨는데 한패의 일본인손님들이 노래를 부르자 우리도 한국노래로 화답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새벽 3시쯤까지 계속되었다. 술집에서는 다투는 게 아니라 그렇게 모두가 친구가 되어야하는 것이다.
술집을 나오니 특파원들이, 나와 호스테스가 택시에 타자 문을 닫고 떠나보낸다. 의미 있는 배려다. 내가 호스테스를 집까지 바래다 주겠다고 하니 그녀는 여행자를 바래다 주는게 예의라며 나를 일본궁성 옆의 파레스사이드 호텔에 내려주었다. 밤샘으로 술을 마신 것이 미안하여 차비라며 두둑이 건네고 낮 12시에 호텔로비서 만나 점심식사나 하자고 약속하였다.
호스테스 소개를 빠트렸는데 그녀는 시골서 단과대학을 나오고 문학지망생이라 했다. 키는 좀 큰 편이고 용모는 수준을 얼마간 웃도는 호감가는 인상이다.
호텔방에서 곯아 떨어졌다. 인사불성이다. 갑자기 깨우는 소리. 눈을 뜨니 당시의 주일대사 이후락(李厚洛)씨가 우리 일행과 관저에서 점심을 하려 한다니 서두르라는 이야기다. 이후락씨가 누구인가. 당대의 실력자가 아닌가. 신문기자라면 뉴스원으로 놓칠 수 없는 존재이다. 서둘러 준비를 하고 대사관저에 갔는데 가서는 호스테스와의 약속을 상기하고 앗차차 하였다.
점심을 마치고 호텔에 돌아오니 이게 웬일인가. 2시 반쯤 되었는데 그녀가 로비에 단정히 앉아 기다리고 있는게 아닌가. 고급넥타이 선물을 갖고서. 부랴부랴 지하 아케이드로 가서 아는 게 샤넬밖에 없으니, 샤넬 중형크기를 하나 사서 답례 겸 사과를 하였다.
그러는 사이 일행은 하네다공항으로 떠나 버리고 나만 처지게 된 것이다. 대사관에서 차를 내주어 뒤따르게 되었는데 그녀가 굳이 공항까지 배웅하겠단다. 짧은 동경여행에 일본미녀가 하네다공항까지 배웅이라… 어떤 애정영화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하네다에 도착하니 일행과 우리 특파원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드디어 나타났다고 환호성을 올린다. 그것도 일본미녀를 거느리고서, 그들이 얼마나 놀랍고 부러웠겠는가.
하네다에서의 그녀의 자상한 배려와 친절은 접어두자. 귀국 후 얼마 지나 이종식특파원이 일시 귀국하였을 때 둘 사이에 중대한 의견대립이 생겼다.
나는 아전인수로 그녀가 나에게 호감을 가졌다고 뽐내는 말투였다. 그런데 이형이 그 핑크빛 상념을 깨버리는 게 아닌가. 이형의 해석인즉….
마카도는 동경에서 가장 큰 술집으로 호스테스도 가장 수가 많다. 그러니 그 경영기법이 철저히 점수제다. 손님에게 지명 받지 않은 채 불려갔으면 A점, 지명 받고 불려갔으면, A+B점, 그녀로 인해 손님이 몇 명 더 왔으면 A+B+(C×몇명)점, 매상이 오른 액수에 따른 퍼센티지점… 그런 식으로 철저히 점수 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서너명 데리고가서 그녀를 지명하고 모든 것을 맡기고 엄청 마셔댔으니 점수가 얼마나 올랐겠느냐하는 것이다. 그런 손님 몇 명만 확보하면 보너스는 물론 월급승급도 보장되지 않겠는가.
이형의 설명을 들으니 그럴듯하다. 아마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설마 그렇기만 할까, 그날의 분위기에 그녀가 호감을 갖게 된 것이 틀림없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아니 믿고 있다. 여자를 잘 이해 못하는 어리석은 자의 집착이다.
여하튼 일본접객업소의 그 친절하고 부드러운 서비스정신은 무뚝뚝하다 할 우리 종업원들이 꼭 본받을 일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