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정치부 차장으로 있을 때 권력측에 밉보여 피해가다시피 옮겨간 곳이 문화부장 자리다. 나는‘야만부장’이라 자처하며 1년 반 동안 문화부 일을 열심히 하였다.
***車마빈과의 是非로 몸싸움**
그때 방일영(方一榮) 사장의 동생인 방우영(方又榮) 전무가 차태진(車泰辰)씨와 술을 같이 하잔다. 차씨는 용모가 미국 배우 리 마빈과 비슷한 데가 있어 차 마빈이란 별명으로 통하는 영화제작자로 신성일 엄앵란 콤비의 청춘물 등으로 당시 한창 뜨고 있었다.
좋은 요정에서 잘 마셨다. 그러던 중 한국일보 영화담당인 이명원(李明遠)기자 이야기가 나오자 차 마빈이 혹독하게 악평을 하는 게 아닌가. 그게 나와 시비꺼리가 되고 취중에 몸싸움에까지 근접하게되었다. 세상살이에「참을 인자(忍)」가 그렇게 중요한 것인데도 나는 성격이 너무 급하고 도꾸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나 유비(劉備) 와 같은 정치인에 필요한 인내심은 전혀 없었다.
이명원 기자는 나와는 가까운 사이였다. 1954년 부산에서 서울로 환도하여 대학에 2학년2학기 등록을 하게 되었는데 돈을 들고 서울대 문리대 창구에 줄을 서고 보니 내 앞의 학생이 이지적으로 생겼는데 일본어로 된 아인슈타인의「나의 세계관」인가를 들고 있다. 나는 의예과였고 그는 정치과였다. 서로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게되었는데 종교문제 이야기에 이르자 그는 “미국유학 갈 기회가 있을까하여 교회에 나간다”고 털어놓는 게 아닌가. 그 솔직함에 끌려 아주 친하게 되었다.
그가 나보다 앞서 한국일보에 입사하게 되었는데 한번은 자기 숙소에 가잔다. 따라가 보니 가톨릭신학대학 뒤의 낙산 밑에 텐트를 쳐 놓고 집이라고 하지 않은가. 하숙비도 절약하고 밤에는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사색도하고…. 얼마 못 가 대학 측한테 쫓겨나고 말았다.
이화대학의 메이 퀸이 입사하여 문화부에 배치되니 남성들 사이의 경쟁이 불을 뿜었다. 이명원 기자도 출전하여 어설픈 경쟁을 했는데 중간중간의 경과보고가 참 재미있었다. 그때는 나도 한국일보의 편집부기자였다.
그런 사이인 이 기자를 영화제작자가 신문사 사주 앞에서 악평을 하니 아무리 신문사는 다르다고 하여도 내가 방어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몸싸움이 험악해지려 하자 방전무는 떼어놓으려 나만 때리는 게 아닌가. 하기는 차 마빈은 알아주는 주먹이란 소문이었으니 그렇게 안 했어도 차 마빈이 화가 폭발했으면 내가 당했을 것이다.
홧김에 이명원 기자를 만나 경위설명하고 은근히 차 마빈에 반격하라고 했다. 그런데 들리는 소식은 둘이 계속 우호적이기만 하다고. 이 기자를 그 후로 「앙팡 떼러블」이라고 불렀다.
방 전무는 사장도 되고 회장이 되었지만 나를 아껴주었다. 내가 정치부장 시절에 장정호(張廷鎬)라는 유명한 언론인이 찾아와 조선일보에 입사하고 싶은데 방일영 사장은 괜찮은데 방 전무가 반대하여 성사가 안되니 설득하여 달라는 부탁이다.
장형은 부산거주의 유명한 소설가 김정한(金廷漢)씨의 사위로 그때 자유신문 사회부장이었다가 신문사가 문을 닫아 유랑하고있었다. 신문기자답게 취재를 해보니 방 전무를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남 부장밖에 없다는 결론이 났다고 했다.
즉각 방 전무에게 달려가 부탁을 했다. “이봐 조선일보 사람들을 키워야지, 외부에서 부장급을 데려오면 어쩌나, 안될 말이지” 방 전무의 입장은 분명하고 그럴듯했다. 나는 소진장의처럼 되었다.
“전무님 말씀이 지당합니다만 달리 한번 생각하면 조선일보 편집국에 이질적 요소를 집어넣어야 서로 경쟁을 치열히 하게 되고 신문이 발전하는 것이 아닐까요. 동종교배(同種交配)만 하면 종이 퇴화하는 것이고 이종교배를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 이종교배에 장정호씨는 다이아몬드와 같다 할까요.”
철옹성 같던 방 전무의 반대입장이 순간에 무너졌다. 역시 나를 믿어서일 것이다. 장정호씨는 입사한 후 나를 앞질러 조선일보의 편집국장이, 그것도 명 편집국장이 되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서울장안에 소문난, 세련되고 아름다운 살롱 마담에 빠져 수명을 단축했다는 추측이 신뢰할 만하다는 것이다.
***요정 백양에서 접시를 날린 일**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된 것은 신문사 입사 10년만이니 약간 파격이다. 방일영(方一榮) 사장이 국장급 이상을 술자리에 불렀는데 논설위원도 그런 대우를 받아 끼게 되었다. 효자동쪽에 있던 조금은 이름 있던 요정 백양.
제2공화국때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를 할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방미시에 미국 측으로부터 들은 장면정권의 제2인자격인 김영선(金永善) 재무부장관이 박 소장을 불러 술을 나눈 곳이 그 백양. 김영선씨의 그 후의 말로는 만나보니 조그마하니 생겨 일을 저지를 것 같지 않았다는 것. 도둑을 맞으려면 개도 안 짖는다는데 개는 짖었는데도 묵살한 꼴이다.
나는 10여명의 자리에서 가장 나이가 아래이고 하여 입구 쪽에 자리를 잡았다. 기생이 한 명씩 앉게 되었는데 내 옆에 온 기생은 매우 이쁘게 생겨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주인마담이 그 기생을 불러낸다. 내 자리 건너편에 두 자리쯤 떨어져 임 업무담당전무가 앉아 있었는데 나에게 배당되었던 기생이 웃옷을 갈아입고 그 옆에 가서 앉는 것을 신문기자 눈치가 놓칠 리가 없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내 옆에 새로 온 기생이 더한 미인이 아닌가. 흐뭇해졌다. 여색을 탐한다고 소문이 났던 임 전무, 주인마담에게 눈짓하더니 두 번째의 바꿔치기를 철면피하게도 감행하는 게 아닌가.
나는 주인마담에게 바꿔치기는 이야기하지 않고 “당신 잘못을 당신이 알렸다. 지금부터 세어보시오”하고는 접시를 하나, 둘, 셋하며 밖으로 던졌다. 장내는 긴장하였고 흥이 깨져 버렸다. 술도 몇 잔 안했는데 내가 주사를 부린 것처럼 되었다.
자리가 파할 때 방 사장은 나에게 쿠폰(당시는 수표 아닌 쿠폰이 있었다)을 주며 가서 2차를 더 하란다. 방일영씨는 관후장자라 할 것이다. 사주 앞에서 그런 불경(?)을 저지르고 목이 성한 직장이 요즘 있겠는가. 그런데 오히려 후하게 술값을 주기까지 하니….
술동료 조덕송(趙德松) 논설위원과 명동 바 「갈리레오」로 진출하여 밑도 없이 마셔댔다. 「갈리레오」는 명동에서 비교적 품위가 있는 곳이어서 김상협(金相浹), 이건호(李建鎬) 교수 등이 드나들었다.
차 마빈과의 사건, 그리고 요정 백양사건으로 나는 방사장ㆍ방전무 형제에게 술버릇이 나쁜 것으로 치부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나이가 휠씬 위의 선배인 임 전무의 못된 버릇을 까발려 이야기할 수도 없는 일이다.
세월이 20년 흐른 뒤에 흑석동 방일영씨댁에서의 세배자리에서 한담하던 중 내가 입을 열어 진상을 말했다. 임 전무가 그때는 살아있을 때였다. 그때 공개 안 했으면 기회를 놓칠 뻔했다. 임 전무 사후면 신빙성이 약한 게 아닌가.
백양사건의 원인을 밝히지 않은 20년 동안도 방일영씨는 나를 대단히 아껴주었다. 방씨의 도량이 큼은 소문이 나있다. 부하에게 뭉턱뭉턱 용돈을 준다. 다만 운 좋게 옆에 있던 사람이 불균형하게 횡재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말이다.
방일영씨가 김성곤(金成坤) 쌍용그룹창업자와 일본에서 스시를 먹은 이야기는 유명하다. 동경서 최고급인 스시집에서 대식가인 둘이 식사를 했는데 계산을 하려니 주인이 들어와서 큰절을 하더란다. “우리 가게 생긴 역사이래 가장 많이 스시를 드신 분이기에 영광으로 여기고 값을 받지 않겠습니다.”
한국의 통큰 유명인사들이 가만 있을 수 없다. 그에 해당하는 돈을 모두 종업원들 팁으로 주었다.
방 사주 일화를 하나 더 보태면―.
민기식(閔耭植) 소장이 부산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있었을 때 자유당의 부정선거에 협력하지 않아 자유당 경남도당의 압력으로 국방부가 민 소장의 예편을 경무대에 상신하였다. 그 정보를 심복으로부터 귀뜸 받은 그는 짚으로 서울로 달려와 방 사주에게 구명을 호소하였다. 통크게 교제를 많이 하는 방 사주를 믿어서이다.
방 사주는 유명한 경무대의 곽영주(郭永周) 경무관에게 부탁하고, 곽 경무관은 국방부 서류를 자기 서랍에 장기 보관해버렸다. 그래서 민기식 육군참모총장까지가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양쪽 모두에게서 정확하게 확인취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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