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인기리에 연재됐던 '남재희 회고-文酒 40년'의 연재를 재개한다. 앞으로 7회에 걸쳐 연재될 이번 글들은 '국방위 회식사건' 등 술과 얽힌 사건에 관한 얘기들이다. 이 글은 본래 '서울강서문인협회'가 발행하는 <江西文學> 2002년호에 '文酒40年-술이 有罪런가'란 제목으로 게재됐었다. 전재를 허락해 주신 '서울강서문인협회'측에 감사드린다. 편집자
***文酒40年-술이 有罪런가**
조선일보 편집부국장으로 운이 좋게 공짜로 유학을 하고 있을 때인 1968년 초봄의 일이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니만 언론연수과정에는 미국인 10여명을 중심으로 하여 영국 캐나다 남아공 일본 필리핀 한국에서 각 1명씩을 포함 17,8명의 언론인이 있었는데 이들이 한 학년의 과정을 마치고 뉴욕으로 단체연수를 하기로 하였다.
뉴욕타임스 방문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당시 뉴욕 주지사인 넬슨 록펠러 인터뷰, 「아틀랜틱」과 쌍벽을 이루는 고급월간지 「하퍼즈」잡지사 방문 같은 것이 있었다. 유엔본부방문에는 마침 일행에 일본언론인이 있어 유엔주재 일본대사가 리셉션을 열어주었다.
일본언론인은 동경신문의 지바 아쓰꼬(千葉敦子)라는 여류인데 그후 그녀의 암 투병기가 일본서 인기를 끌고 한국어로도 번역되었다. 여성은 2명이었는데 다른 한 명은 캐더린 매킨이라는, NBC-TV서 백악관을 출입했던 금발의 미국인이다. 뒷날 모두 유방암으로 저 세상 사람이 되었는데 모두 미혼이었음이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유엔 리셉션이 끝나면 모두 브로드웨이의 연극을 보러 가기로 되어있었다. 연극을 보는데 예약이 필요했던 듯 캠브리지에서 미리 예약을 받았는데 그 일을 맡았던 친구가 "라만차를 본다"고 했을 때 나는 어리둥절했다. 무식이 들통 날 뻔 했다. <라만차의 동키호테>인데 말이다.
처음 하버드대학에 도착했을 때 도서관순회가 있었다. 엄청난 규모인 와이드너 도서관에는 하버드출신인, 「천사여, 고향을 돌아 보라」의 토마스 울프의 특별실이 있다. 미국 친구는 내가 모르리라 짐작한 듯 혹시 그를 아느냐한다. 다행히도 학생 때 그의 소설 「시간과 강」을 영문으로 읽은 일이 있어 자신 있게 설명하여 체면을 세울 수 있었다.
브로드웨이의 연극을 보는 것은 대단한 경험이다. 그런데 주당인 나는 그것을 포기하고(표까지 갖고 있었는데) 술 마시는 일을 택한 것이다. 리셉션에서 만난 일본 교도통신(共同通信) 특파원이 기분이 통할 듯하여 그에게 음주순례를 제의, 그 날 밤새도록 다섯 군데 술집을 훑은 것이다.
35년 가까이 된 일이니 그 고마운 친구의 이름을 까먹었다. 교도통신의 야스오 요시스케(安尾芳典) 서울지국장을 만난 김에 상황을 설명하고 부탁을 했다. 그래서 다시 알아낸 이름이 호리가와 도시오(堀川敏雄). 유엔특파원 등을 마친 후 본사에서 국제국장을 지냈고 그 후 1980년에 정년, 타쿠쇼쿠(拓殖)대학 교수로 갔다가 94년에 은퇴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나보다 연상인데 그때 일이 하도 고마워 국제국장 시절에 예방하여 식사를 같이한 기억이 난다.
리셉션이 끝났을 때는 아마 밤 8시 가까웠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까놓고 주머니에 백달러가 있는데 그 범위 안에서 술을 마시자고 하였다. 그랬더니 그도 마침 백달러쯤 갖고 있으니 합치잔다. 다만 염치가 전혀 없게 된 것은 그의 차를 타고 다녔으니 나만 술을 즐겼을 뿐 그는 가이드역할만 한 셈이다. 정말 미안한 일이다. 꼭 신세를 갚아야할 텐데….
첫 번째로 간 곳은 저먼 타운이다. 독일사람들 밀집지역의 맥주집으로, 입장할 때 최소한 얼마 이상은 마시라고 표를 사란다. 일인당 3달러였나. 그 안은 젊은이의 천국이었다. 맥주를 즐겁게 마시며 음악에 맞추어 남녀가 춤을 추며 즐겼다. 족히 백명은 넘는 것 같다. 술맛 나는 곳이다.
두 번째. 호리가와씨는 리셉션에서 좀 먹었지만 배를 채워야겠단다. 그래서 간 곳이 고층빌딩을 한참 엘리베이터로 올라 가서의 일본음식점. 시가지가 내다보이는 고층에 미니 일본정원도 있는 아담한 집이다. 그 장사의 품격이라니. 거기서 스시를 몇 개씩 들었다.
세 번째. 처음이라 잘 모르지만 아마 디스코(disco), 전에는 디스코테크(discotheque)라고 하던 데 일 것이다. 약간 높은 단 위에서 늘씬한 미녀들이 춤을 춘다. 조명은 반쯤이다. 그 앞에서 손님들은 몸매를 감상하며 술을 마신다. 춤추는 사람들도 있던 것 같다. 눈요기 집이라 할까.
네 번째. 자, 이제 일본사람들이 모여 즐기는 곳으로 가잔다. 작은 홀 가운데 피아노가 있고 둘레에 술좌석들이 있으며 사람들은 30명쯤 들어갈 수 있을까. 마이크는 돌고 손님들은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일본노래들을 신나게 부른다.
그러니까 뉴욕에 근무하는 일본 샐러리맨들의 일과 후 휴식처다. 요즘 서울에도 비슷한 데가 있지만 술은 적당히 마시면서 노래하고 담소하는 참 좋은 곳이다. 거기서 나도 한국노래를 한 곡했다. 그랬더니 한 청년이 인사를 청한다. 당시로서는 유명한 대기업의 2세였다. 여하간 반가웠다.
그쯤 되니 아마 새벽 3시는 지났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곳이 있단다. 다섯 번째는 24시간 문을 여는 중국집으로 옥수수죽을 먹은 것으로 기억한다.
나 혼자 왕창 마시고 즐거워한 셈이다. 뉴욕의 이른바 나이트 라이프를 그만큼 즐길 수가 없다. 훗날에 뉴욕에 들러 동아일보 출신 유명 언론인 김진현(金鎭炫-나중에 과기처 장관)씨의 소개로 「사상계」사장 장준하(張俊河)씨의 동생 창하(昌河)씨를 만나게 되고 그의 초대로 플레이보이 클럽에 가서 토끼처럼 차려입은 그 유명한 바니의 접대를 받으며 술을 한 일이 있는데 그렇게 해서 나이트 라이프의 보충관광도 한 셈이다.
장창하씨 말로는 클럽의 멤버가 되어놓으면 막상 돈도 그렇게 많이 안 들고 손님을 만족스럽게 대접할 수 있어 실리적이라는 것이다. 그럴 것 같다. 우리나라와 달라 그렇게 왕창 마시지 않고 적당히 몇 잔만 하는 게 미국인들의 음주행태가 아닌가.
뉴욕 밤 순회를 마치고 호리가와씨는 나를 타임 스퀘어부근에 있는 하버드대학 합숙소에 내려주었다. 하버드대학은 큰 대학이라 몇몇 중요 도시에 합숙소를 싼값에 운영하고 있는데 호텔식이 아니고 기숙사 같은 곳이다.
아마 새벽 4시쯤. 아무리 벨을 눌러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그렇지 않겠는가, 절대 취침시간 일 것이다. 그것은 이해하겠는데 내 방광이 터질 지경이어서 문제다. 어슬렁어슬렁 마땅한 곳을 찾아 걸었으나 영 신통치 않다.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마침 웬만큼 유명한 팬암 빌딩이 인적 없는 가운데 기념물처럼 서있다. 할 수 없다. 실례를 무릅쓰고 미국 최대도시의 그것도 중심부에서 방뇨.
인적만 보이면 달아나고 싶은데 오줌은 왜 그리 오래 나오나. 팬암의 경사진 바닥에 오줌이 5m, 10m… 흘러가고. 큰 일이다. 얼른 36계 줄행랑을 쳤다.
30여 년이 지난 후 오사마 빈 라덴은 뉴욕의 쌍둥이 세계무역센터에 비행기테러를 감행했다.
나는 30여년 전에 뉴욕의 팬암 빌딩에 오줌 세레를 한 셈이다. 방뇨테러인가. 지금 와서는 부끄럽기만 하지만 나는 그 에피소드를 한참동안 친한 미국인들에게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고 떠들어댔었다.
내가 존경하고 또 두려워하는 헨리 키신저 박사는 후진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 확립을 위하여 반미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였다. 방뇨사건으로 떠들던 것도 계속 미국에 기가 죽어지내다가 나의 정체성확립의 한 방법으로 무의식중에 일어난 일이라 할 수 있을까. 억지로 의미를 부여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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