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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義)를 말하지 말고 이(利)를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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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義)를 말하지 말고 이(利)를 말하라”

신영복 고전강독<134> 제12강 한비자(韓非子)-2

“유가나 묵가는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백성은 임금을 부모와 같이 여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법관이 형벌을 집행하면 음악을 멈추고, 사형집행 보고를 받고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 선왕의 정치라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자식은 부모를 따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눈물을 흘렸다면 그것은 임금이 자기의 인(仁)은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좋은 정치를 하였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해내(海內)의 모든 사람들이 공자의 인(仁)을 따르고 그 의(義)를 칭송하였지만 제자로서 그를 따른 사람은 겨우 70명에 불과하였다. 임금이 되기 위해서는 권세를 장악하여야 하는 것이지 인의(仁義)를 잡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금의 학자들은 인의를 행하여야 임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임금이 공자같이 되기를 바라고 백성들이 그 제자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내용이 다소 길지만 법가사상의 요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컨대 맹자가 양혜왕을 만났을 때 의(義)를 말할 것이 아니라 이(利)를 말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지요.

법가의 이러한 변화사관은 한비자의 스승인 순자(荀子)의 후왕사상(後王思想)을 계승하였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후왕(後王)이란 금왕(今王)을 의미합니다. 후왕사상은 과거모델을 지향할 것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을 대상으로 하여야 한다는 현실정치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순자는 “후왕(後王)이야말로 천하의 왕이다. 후왕을 버리고 태고(太古)의 왕을 말하는 것은 자기 임금을 버리고 남의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순자의 성악설과 후왕사상이 제자인 한비자에게 계승되었으리라고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한비자는 내외정세가 위급존망지추(危急存亡之秋)여서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여 숱한 시무책을 국왕에게 바칩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비단 한비자와 한(韓)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변화된 현실을 인식하고 새로운 사고로 발상을 전환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지요. 다음 예제는 여러분도 잘 아는 화씨지벽(和氏之璧)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楚人和氏得玉璞楚山中 奉而獻之厲王 厲王使玉人相之 玉人曰 石也 王以和爲誑 而刖其左足 及厲王薨 武王卽位 和又奉其璞而獻之武王 武王使玉人相之 又曰石也 王又以和爲誑 而刖其右足 武王薨文王卽位 和乃抱其璞而哭於楚山之下 三日三夜 泣盡而繼之以血 王問之使人 問其故曰 天下之刖者多矣 子奚哭之悲也? 和曰 吾非悲刖也 悲夫寶玉而題之以石 貞士而名之以誑 此吾所以悲也 王乃使玉人理其璞 而得寶焉 遂命曰 和氏之璧.


“초나라 사람 화씨가 초산에서 옥돌을 주워 여왕에게 바쳤다. 여왕이 옥인을 시켜 감정케 하였더니 돌이라 하였다. 여왕은 화씨가 자기를 속였다하여 월형을 내려 왼발을 잘랐다.

여왕이 죽고 무왕이 즉위하자 화씨는 무왕에게 그 돌을 또 바쳤다. 무왕이 그 돌을 옥인에게 감정케 하였더니 또 돌이라 하였다. 무왕도 그가 자기를 속였다 하여 월형으로 오른 발을 잘랐다.

무왕이 죽고 문왕이 즉위하자 화씨는 이제 그 옥돌을 안고 초산에서 곡을 하였다. 문왕이 소문을 듣고 사람을 시켜 그 까닭을 물었다. ‘천하에 발 잘린 사람이 많은데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 슬피 우는 것이요?’

화씨가 대답했다. ‘저는 발 잘린 것을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옥을 돌이라 하고 곧은 선비를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니 이것이 제가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문왕이 옥인에게 그 옥돌을 다듬게 하여 보배를 얻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것을 화씨의 구슬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매한 군주를 깨우치기가 그처럼 어렵다는 것을 풍자한 이야기입니다. 한비자 자신의 경험을 토로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임금들이 법술(法術)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구슬을 얻고자 하는 마음같이 급한 것은 아니며 또 올바른 도를 가진 법술가들이 월형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은 왕에게 아직 옥돌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못박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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