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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의 가장 큰 공헌은 예를 새롭게 정의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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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의 가장 큰 공헌은 예를 새롭게 정의한 것

신영복 고전강독<129> 제11강 순자(荀子)-6

우리는 이상과 같은 순자의 논리에 따라 먼저 예론(禮論)을 검토하고 연후에 교육론(敎育論)을 읽기로 하겠습니다. 그것이 순서지요. 자세하게 번역하거나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순자사상의 체계와 전체적 구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禮起於何也 曰 人生而有欲 欲而不得 則不能無求 求而無度量分界 則不能不爭 爭則亂 亂則窮 先王惡其亂也 故制禮義以分之 以養人之欲 給人之求 使欲必不窮乎物 物必不屈於欲 兩者相持而長 是禮之所起也 故 禮者養也(禮論篇)

“예의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사람은 나면서부터 욕망을 가지고 태어난다. 욕망이 충족되지 못하면 그것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욕망을 추구함에 있어서 일정한 제한이 없다면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다툼이 일어나면 사회는 혼란하게 되고 혼란하게 되면 사회가 막다른 상황에 처하게 된다.

옛 선왕이 이러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예의를 세워서 분별을 두었다. 사람의 욕구를 기르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되 욕망이 반드시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거나 물(物)이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양자가 균형 있게 발전하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예(禮)의 기원이다. 그러므로 예란 기르는 것이다.”

순자의 예론은 사회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사회이론입니다. 첫째 예란 물(物)을 기르는 것(養)이며 둘째 그 물(物)로써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툼과 혼란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다툼과 혼란을 방지하되 물질의 생산과 소비에 일정한 한계를 두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禮)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예란 당연히 사회의 제도와 규범입니다. 제도와 규범이 분계(分界)를 세워서 쟁란(爭亂)을 안정적으로 방지한다는 것입니다. 순자의 예는 후에 법(法)이 됩니다. 순자의 가장 큰 공헌이 바로 이 예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禮)를 새롭게 정의하였기 때문입니다.

순자의 예(禮)는 공자(孔子)의 예(禮)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흔히 지적하는 바와 같이 공자의 예가 주례(周禮)이고, 순자의 그것은 전국시대의 예이기도 합니다. 이 전국시대의 예가 바로 법(法)으로서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禮)에 도덕적인 내용 이외에 강제라는 법적인 내용을 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순자의 예론은 전국말기의 현실적 요구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이 등장한 신지주층(新地主層)과 상인계층(商人階層)의 이해관계와 그들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사활적인 패권경쟁을 치르고 있는 패자들에게 왕도(王道)와 인정(仁政)은 고매하기는 하지만 너무나 우원(迂遠)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국(戰國)통일의 기틀을 닦은 것으로 유명한 상앙(商鞅)이 진 효공(孝公)을 만났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상앙이 왕도(王道)를 개진하는 동안 줄곧 졸고 있던 효공이 패도(覇道)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벌떡 일어나 다가앉아 경청하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맹자편에서 읽었지요. 맹자가 양 혜왕을 만났을 때, 왕이 제일 먼저 주문한 것이 바로 "당신은 어떻게 이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겠소?"라는 것이었습니다. 인의(仁義)의 정치론은 이미 공자당시부터 제후들의 관심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에겐 유가의 주장이 그야말로 “공자 맹자 같은 소리”였습니다. 공자의 주유(周遊)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지요. 유가는 당시의 제후들에게는 왕도를 표방하는 장식적 의미 정도로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논어’편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유가는 그들의 사상에 만세의 목탁(木鐸)이라는 초역사적 의미부여를 하였습니다. 이 점에서 현실론으로 기울어버린 순자는 이단(異端)으로 매도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순자의 이러한 현실론은 논자에 따라서는 유가의 발전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맹자가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혁신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초도덕적 가치(價値)를 지향하고 천명론이라는 종교적 편향을 보였다는 점에서 오히려 보수적이었다고 평가됩니다.

이에 반하여 순자는 사회적 통제(統制)를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천명(天命)을 비판하고 관념적 잔재를 떨어버렸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순자사상은 실제로 유가의 예치(禮治)사상으로부터 법가의 법치(法治)사상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순자의 제자 중에는 한비(韓非)와 이사(李斯) 등과 같은 유명한 법가가 배출되었다는 것도 이러한 성격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순자사상은 현실인식과 인간이해에 있어서 냉정한 태도를 견지하였으며 그러한 냉정함을 바탕으로 하여 전통적 관념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명하게 단절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순자의 냉정함은 그의 문장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순자의 문장은 화려한 수사보다는 뜻의 창달(暢達)에 주안을 두었으며, 논설기능을 가일층 발전시켜 그의 글은 논리가 정연하고 주장이 분명한 위에 전체적인 구성에도 짜임새가 있는 것으로 정평을 얻고 있습니다. 특히 ‘천론(天論)’ ‘성악(性惡)’편은 고대 논설문의 규범이 되어 이후의 논설문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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