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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불신이나 절망을 얘기하는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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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불신이나 절망을 얘기하는게 아니다

신영복 고전강독<128> 제11강 순자(荀子)-5

인간의 본성이란 과연 있는 것인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선악판단 이전의 것입니다.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의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On Human Nature)’에 의하면 본성은 선악판단의 대상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인간의 본성이란 DNA의 운동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윌슨의 주장이 극단적 환원주의(還元主義)라고 비판되고 있습니다만 나는 그의 이론이 본성문제에 있어서 훨씬 논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DNA로 환원될 수 있으며 이 DNA는 40억 년 전에서부터 몇 억년 전에 이르기까지의 어느 시점, 또는 장구한 기간에 걸쳐서 이루어진 물질이라는 것이지요. 그것은 RNA와 단백질이라는 2개의 독립적인 반생명권(半生命圈)에서 성립한 것으로 기막히게 성공적(?)인 화학물질(化學物質)이라는 것이지요.

수십억 년에 달하는 지구상의 생명의 역사는 바로 이 DNA라는 물질의 운동이며 이 물질의 일대기(一代記)라는 것이지요. 윌슨에 있어서 본성이란 이 화학물질의 운동상의 특징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DNA야 말로 가장 원초적 생명이며 그런 점에서 곧 본성입니다. 그야말로 ‘불멸의 나선’(immortal coil)입니다.

이 DNA는 생명(生命)의 존속(存續)이 유일한 목적입니다. 개체의 존속과 개체를 넘어선 존속, 즉 생존(生存)과 유전(遺傳)과 번식(繁殖)이 유일한 운동원리입니다.

윌슨은 아주 재미있는 예를 들고 있습니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라는 질문에 대하여 명쾌하게 결론을 내립니다. 윌슨의 체계에 있어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명백합니다. 단연 계란이 먼저라는 것이지요.

닭은 계란 속의 DNA가 자기의 유전과 번식을 위하여 만들어 낸 생존기계(survival machine)일 뿐입니다. 닭은 DNA 유전과 번식을 위하여 만들어진 중간(中間) 매개체(媒介體)일 뿐입니다. 계란 속의 DNA가 자신의 유전과 번식을 보다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계란을 만들어내야 하고, 많은 계란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중간 매개체로서 닭을 만드는 것이지요. 닭은 계란의 생존기계(生存機械)일 따름입니다. 이것이 윌슨 이론의 핵심입니다.

윌슨의 이론에 의하면 DNA는 비단 닭만을 만들어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욕망도 이 DNA의 유전과 번식을 위하여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식욕과 성욕이 이 DNA의 활동인 것은 물론입니다. 나아가 인간의 정신활동도 DNA의 유전과 번식운동의 일환으로 이해하는 것이지요.

인간의 정신활동이란 일정한 수의 화학 및 전기반응의 총체적 활동을 일컫는 것에 다름 아니며, 이것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장치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인간의 이성(理性)은 그러한 장치의 다양한 기능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성뿐만이 아니라 사랑의 감정, 희생, 정직, 종교, 예술 등 일체의 정신적 영역도 이 DNA로부터 연유하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결혼제도는 물론이며 사회를 구성하고 국가를 건설하는 모든 사회적 현상도 일단 DNA의 운동으로 환원됩니다.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사회과학을 통합하리라고 예상되기도 합니다.

윌슨은 매우 흥미로운 임상경험들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자세히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만 예를 들어 근친혼(近親婚)을 금하는 사회적 관습에 대해서도 동일한 논리로 비판합니다.

지금까지 근친혼은 사회적 관점에서 설명되어 왔습니다. 공동체 내의 위계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거나, 또는 다른 부족과의 정략결혼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이론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윌슨은 임상경험을 통하여 그것이 DNA의 운동이라는 점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열성유전(劣性遺傳)을 기피하는 DNA의 운동이라는 것이지요.

사회과학이 생물학에 그 자리를 내주어야 할지 모른다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젊은 학자들로부터 지나친 유물론적 환원주의라는 비판받고 있습니다만 장황하게 ‘윌슨’을 소개하는 까닭은 윌슨의 이론에 대한 찬반의 문제와는 별개로, 우리가 본성을 선악판단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얼마나 저급한 논의인가를 반성하자는 것이지요.

‘묵자’편에서 소개됐다고 생각합니다만 묵자는 인간본성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백지(白紙)와 같은 것입니다. 묵자는 소염론(所染論)에서 인간의 본성은 물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이론이나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맹자의 성성설이나 순자의 성악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귀납적으로 구성한 개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맬더스의 인구법칙(人口法則)도 똑같은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식량은 산술급수로 증가하는 데에 비하여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따라서 기아와 빈곤, 전쟁 과 질병에 의한 사망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환경위생을 개선하려고 하거나 질병을 치료하려는 고상하지만 잘못된 애정을 거두어들일 것을 맬더스는 결론으로 내리고 있지요.

빈곤과 기아는 자연법칙이며 이에 개입하는 것은 도로(徒勞)라는 것이지요. 맬더스의 ‘인구론’은 사회개혁의 열망을 잠재우기 위한 이데올로기에 과학이라는 옷을 입히는 것이었지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라는 주장을 내장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데올로기에 법칙의 의상을 입히는 구조입니다. 순자의 성악설도 그런 점에서 같은 구조입니다. 전국시대의 사회적 혼란의 원인을 분석하고 처방하는 논리의 일환입니다.

순자의 이론체계는 교육이라는 후천적 훈련과 예(禮)라는 사회적 제도에 의하여 악(惡)한 성(性)을 교정함으로써 사회의 혼란을 방지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순자는 모든 사람은 인의(仁義)와 법도(法度)를 알 수 있는 지(知)의 바탕을 갖추고 있으며 또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선단(善端)을 갖추고 있다는 맹자의 주장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은 인간에 대한 불신(不信)이나 절망(絶望)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순자는 모든 가치 있는 문화적 소산은 인간노력의 결정이라고 주장하는 인문철학자(人文哲學者)임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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