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는 인간의 능동적 참여를 천명합니다. 천(天)이 해결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자의 천론은 당시의 생산력의 발전, 그리고 천문학의 발달과 무관하지 않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개인의 사상이란 크게 보아 사회적 성과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지요.
天有其時 地有其財 人有其治 夫是之謂能參
舍其所以參 而願其所參 則惑矣(天論)
“하늘에는 사시(四時)의 운행이 있고, 땅에는 자원이 있으며, 사람에게는 다스림이 있다. 이 다스림을 능참(能參)이라고 한다. 사람이 (천지와 동등한 자격으로 나란히) 참여할 수 있는 소지를 버리고(舍), 천지와 동등한 자격을 기질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은 환상(惑)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실천적 노력이라는 것이지요. 순자의 능참은 ‘실천론(實踐論)’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이를 제어하여 활용할 것을 강조합니다. '자연은 만물을 만들었지만 다스리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순자의 인본주의적 관점입니다. 이것은 유가학파의 공통된 입장으로서 문화사관(文化史觀), 발전사관(發展史觀)으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하늘만을 하늘같이 바라보거나 하늘을 칭송하는 숙명론(聽天由命)을 벗어던지고 스스로 운명의 개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운명이란 인간의 실천적 노력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것(人定勝天)이 바로 순자의 체계입니다.
하늘(天)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은 자신의 객관적인 운동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의지로써 그것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사람은 능참 즉 주체적 능동성을 발휘하여 인문세계를 창조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과 관련하여 순자는 결국 유가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천론(天論), 능참론(能參論), 중민론(重民論) 등 적극적 내용에도 불구하고 결국 같은 결론에 귀착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순자는 입장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지요. 세습귀족이 아닌 신흥 관료지주를 대변한다는 사회적 입장에서만 차이를 보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순자사상은 실제에 있어서 공자나 맹자에 비하여 훨씬 더 현실적이었으며 당시의 패자(覇者)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노장(老莊)의 입장과는 근본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지요. 인간의 적극의지와 능동적 실천에 근거하여 인문세계를 창조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그런 점에서 귀(歸)를 설파하였던 노장과는 근본적으로 입장을 달리 하고 있는 것이지요. 원시유가(原始儒家)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순자의 체계에게 있어서 하늘을 칭송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늘을 원망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람의 도리 여하에 따라서 그렇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순자의 체계에 있어서 지인(至人)이란 장자의 경우와 달리 천도(天道)와 인도(人道)의 구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明於天人之分) 사람입니다.
순자는 결코 하늘을 단순화하거나 그 존재를 격하시키는 법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늘의 신비스러운 작용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아는 것은 다만 이루어져 눈에 보이는 것에 불과하며 그 보이지 않는 무궁한 세계는 알 수 없다는 것(皆知其所以成 莫知其無形)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천공(天功)은 알 길이 없는 것이며, 성인은 하늘을 알려고 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범부들이나 하늘을 알려고 무리하게 지혜를 짜낸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순자의 주장에서 우리는 한 개인의 사상이나 한 학파의 사상이 다른 것과 어떻게 구별되고 동시에 어떻게 침투되고 있는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순자에게 있어서 하늘을 안다(知天)는 것은 하늘의 무한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대교(大巧) 즉 뛰어난 장인(匠人)은 손대지 않고 남겨두는 데에서 그 진가(眞價)를 발휘하며, 뛰어난 지자(大智)는 생각을 남겨두는 데에 그 진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남겨두는 것’은 천의 법칙을 모두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이상의 것을 구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천(知天)은 지기(知己)와 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면이 순자를 그 이단적 내용에도 불구하고 역시 유가로 분류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시간에 말했습니다. 학파는 결국 관점과 강조점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천론(天論)’과 ‘천명론(天命論)’의 차이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순자가 천명론(天命論)에서 명(命)을 제거함으로써 인(人)을 제자리에 놓고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조금 추가해두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소위 유가의 정통에 관한 것입니다. 유가의 정통은 도통(道統)계보가 만들어지면서 확정됩니다. 당말(唐末)의 한유(韓愈) 이고(李翶) 등 유학자들이 불교와 노장사상을 비판하고 유학을 유신(維新)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되어 송대의 주자(朱子)에 이르러 완성됩니다.
도통이란 말도 주자가 장구(章句)한 ‘중용’ 서문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이렇게 완성된 도통계보에서 순자가 제외되었던 것이지요. 순자가 유가의 이단으로 규정되는 것은 바로 이 도통계보에 순자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유가의 도통은 저도 어릴 적부터 할아버님으로부터 뜻도 모르고 자주 듣던 ‘요순우탕문무주공(堯舜禹湯文武周公)’이 그것인데 주공 이후 공자(孔子)-안자(晏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맹자 이후로는 천년을 건너뛰어 주렴계(周濂溪)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주희(朱熹)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물론 이 도통계보는 사제지간의 직접적인 전수를 기준으로 하지도 않았음은 물론입니다.
불교의 도통계보는 직접 의발(衣鉢)을 전수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유가의 도통계보도 불교의 전통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물론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와 달리 직접적인 학문의 전수가 아니라면 문제는 도통의 기준을 무엇으로 하였는가가 중요합니다.
이것이 처음에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완성한 주희에 이르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한마디로 이학(理學)의 발전과정으로 국한시키고 있습니다. 주희의 성리학은 기본적으로 이학(理學)입니다. 주희는 사서의 주석도 이학의 입장에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理)는 물론 매우 복잡한 철학적 주제이지만 쉽게 이야기한다면 바로 천(天)입니다. 이(理)는 천리(天理)입니다. 모든 사물에 반드시 내재되어 있으며, 세상을 관통하고 있는 최고의 원리이고 규범이고 이치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이며 천리입니다.
순자가 이 천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 도통계보에서 밀려나는 결정적 이유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다시 한번 확인해야 되는 것은 순자의 천론(天論)이 갖는 의미가 그만큼 결정적이라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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