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의 노무현 후보와 통합21의 정몽준 후보가 극적으로 단일화에 합의하고, 곧이어 실무진들이 단일후보선출까지의 일정과 방법을 일사천리로 만들어냈다. 신속하게 결정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청신호다. 이런 일들이란 길어지면 딴소리가 나기 마련이고, 딴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외부적 공격보다 내부적 분열로 망하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동안 1강2중의 구도에 시달려 왔던 민주당과 통합21측에서는 환호를 지르고 있다고 하고, 거의 정권인수위 분위기였던 한나라당은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그러나 민주당과 통합21, 그리고 한나라당 모두 분위기 잘못 짚고 있기는 마찬가지요, 우리 정치권의 고질인 ‘일희일비( 一喜一悲)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무엇이 그러한가.
무엇보다도 노(盧)-정(鄭) 두사람이 후보단일화에 합의했다고 단숨에 분위기가 역전됐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은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후보단일화 합의가 이뤄진 다음날인 16일 실시된 조간신문들의 여론조사 결과만 봐도 분명히 드러난다.
물론 다자대결시 그동안 3위였던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2위로 올라서고, 통합21의 정몽준 후보가 거꾸로 3위로 추락하는 새로운 결과를 보이긴 했으나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상승, 통합21의 정몽준 후보 하락이란 기존의 추세를 재확인한 것 뿐이었으며, “3자대결시 이회창 후보 1위, 단일화된 어느 후보에 대해서도 이회창 후보 승리”란 기존의 공식도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단일화 합의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는 단일화된 후보가 이회창 후보와 붙었을 때 차이가 극히 미세하게 좁혀지고 있는 것(조선일보-갤럽의 경우 이회창 대 단일화된 정몽준 = 39.8% 대 38.6%, 이회창 대 단일화된 노무현 = 42.3% 대 38.3%)정도를 들 수 있겠다.
하지만 그동안 전문가들도 선거막바지로 가면 노무현, 정몽준 두 후보의 지지율 편중현상이 일어나 누구든 한 후보가 급상승하고, 나머지 한 후보가 급하락하게 돼 결국은 이회창 후보 대 급상승한 후보의 양자대결로 좁혀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즉 단일화된 후보가 누구든 날이 갈수록 이회창 후보와의 차이는 좁혀질 수밖에 없는 추세적 특성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얘기며, 거기에 단일화 합의란 충격이 겹쳐져 이런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오로지 단일화의 효과라고만은 할 수 없는 상황이란 게 전문가들의 분석인 셈이다.
한나라당이 단일화 합의에 질겁을 하는 것도 이같은 추세적 특성 때문에 지레 엄살을 떠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민주당이나 통합21이 환호하고 있는 것도 단일화 합의를 역전의 계기로 삼기 위해서는 그 의미를 정도 이상으로 부풀릴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과장하는 측면도 있다는 얘기다.
결국 객관적으로 현 국면을 평가한다면 다음과 같은 정도가 정답 아닐까 생각한다. 즉 단일화 합의로 민주당과 통합21의 두 후보가 갈라진 채 따로따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붙었을 경우 백전백패가 예상되는 상황은 일단 벗어났다. 하지만 성공적으로 단일후보를 선출하고, 단일후보에서 탈락한 사람이 선출된 단일후보의 선대위원장을 맡는다 하더라도 지금 나오고 있는 여러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보듯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이길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인 상태다.
게다가 필자가 보기에는 앞으로 1주일 동안 단일화된 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일정들이 별탈없이 진행될 것인지도 사실 의심스럽다. 어떤 돌발적인 일들이 일어날지 전도를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후보통합이 과연 유권자 통합으로 직결될 수 있을 것인지도 사실 분명하게 단언하기 어려운 측면들이 많이 있다. 단일화된 후보 선출까지 과연 어떤 걸림돌이 있을지, 그리고 단일화된 후보가 무사히 선출되었다 하더라도 무엇이 난관인지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예선전에서 서로의 감정이 격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것이 무슨 얘기냐. 결국은 두 사람중 한 사람이 단일화된 후보가 되고 다른 한사람은 그 사람의 선대위원장을 해야 하는데, 그런 컴비네이션이 효과를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간 신뢰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후보와 선대위원장이란 하늘과 땅 차이다. 누가 하늘을 맡고 누가 땅을 맡느냐 결정하는 여론조사를 코 앞에 두고 페어플레이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여기저기서 싸움을 부추길 때 과연 이성을 잃지 않을 것인가 하는 점은 딜레마이면서도 극복해야 할 과제다.
단일화된 후보가 일단 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까부숴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 감정이 격앙되면 설사 승리한다 하더라도 진 쪽에서 진심으로 승복하면서 선대위원장으로서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할 것인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양쪽의 감정을 불지를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현실적 세력들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한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2) 따라서 두 후보는 물론이고, 후보를 보좌하는 측에서도 이런 감정적 문제의 수위조절을 제대로 해야만 한다. 후보단일화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일단 누구로 단일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결정되면 두 후보를 중심으로 모인 세력들이 한 몸이 된다는 점인데, 감정의 수위조절에 실패하면 실제 단일화해본들 단일화의 효과가 별로 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3) 아직 중앙선관위에서 확실한 유권해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만의 TV토론이 될지, 다른 후보까지 포함된 TV토론이 될지 알 수는 없지만, TV토론에서 두 후보가 상대방에 대한 차별성 부각시 수위조절도 문제다. 이런 감정상의 시비는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현실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4) 좀 곡절을 겪더라도 TV 토론뒤 여론조사를 거쳐 단일화된 후보를 선정까지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어느 누구 한 사람이 단일화된 후보로 선정됐을 때 진 쪽의 승복 여부는 후보단일화 효과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물론 사전 합의에 따르면 이긴 사람은 단일화된 후보가 되고, 진 사람은 그 후보의 선거대책위원장을 맡도록 돼 있으나, 진 사람의 주변인물들이나 저변의 지지자들까지 이런 결과에 승복할지 여부는 아직도 짐작이 어렵다.
5) 전문가들은 후보단일화가 됐을 때 지지층들의 단일화, 즉 노무현 후보의 표현에 따르면 유권자 통합의 정도가 한 60% 정도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어느 한 후보로 단일화된다 하더라도, 지지자들은 60% 정도만 옮아갈 것이란 얘기다. 그러나 그것은 열광적인 지지층들이 아무런 불만없이 단일화에 승복했을 때만 그렇다. 열광적인 지지층들이 승복하지 못하겠다고 나온다면, 그래서 후보의 단일화에 따르는 후속조치들, 즉 선거조직의 단일화 등에 차질이 생기고, 그에 따라 딴 소리가 터져나온다면, 후보단일화는 목적과는 달리 거꾸로 갈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즉 후보단일화란 이를 통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이기는 것이 목적일 터인데, 자칫 확실하게 져버리는 방향으로 갈 개연성도 여전히 남아 있다는 얘기다.
6) 이것은 후보단일화의 명분과도 관련된 것인데, 서로 정체성이 판연히 다른 두 후보의 단일화를 어떤 명분으로 포장해 지지자들을 설득할 것인가 하는 점은 단일화 이후에도 과제일 것이 분명하다. 한나라당의 공격도 후보단일화란 오로지 승리를 위한 야합이란 쪽에 집중될 것이 뻔하다. 유권자들이 한나라당의 공세를 믿을 것인지, 아닌지 현재로서 섣불리 단정지을 수는 물론 없다. 하지만 가령 정책정 동질성을 추구하기 위한 정책단일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한다든지 하는 식의 설득작업은 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노-정 두 후보의 단일화 합의는 사실상 단일화를 위한 첫 단추에 불과하다. 과거 DJP연대는 지지도면에서 압도적으로 앞서는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대통령후보를 김종필 당시 자민련 대통령후보가 지지해주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합의였지 그 이후는 요식행위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의 단일화는 서로 엇비슷한 지지율을 보이는 상황에서 이뤄지는 일이어서 중간과정도 매우 중요하고, 과정이 결과를 뒤엎을 수 있는 개연성도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다.
두 후보의 단일화 합의로 일단 단일화된 후보선출을 향한 정치실험은 시작됐지만, 그러한 실험이 성공할지 아직은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분명한 것은, 그럴 리가 없겠지만 한나라당이 후보 단일화 때문에 갑작스레 비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며, 민주당이나 통합21측이 축배의 잔을 들 시점도 전혀 아니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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