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살펴본 다른 제자백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당대 사회에 대한 순자의 문제의식을 먼저 점검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의식이 오늘의 사회적 과제에 대하여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에 대하여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접근이 ‘순자’를 재조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순자는 대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직하학파(稷下學派)의 제주(祭主)였다고 합니다. 직하학파는 제나라 수도 임치(臨淄)에 있는 학자단지(學者團地)로서 당시 학문의 중심지이면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학파였습니다.
제나라 수도 임치는 폭 4km 전장 20km의 넓이를 가진 대단히 큰 성이었으며 모두 13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서문(西門)을 직문(稷門)이라고 했습니다. 이 직문 부근에 학자단지가 조성되었던 것이지요. 잘 알려진 ‘관자(管子)’가 바로 이 직하학자들의 선집(選集)입니다.
이 직하학파의 제주란 물론 제사의 책임자이지만 학문적으로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대학자라는 의미입니다. 제나라에서도 그를 매우 존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순자에 관해서는 그의 친필로 추정되는 ‘순자’ 32편을 남기고 있는 것 이외에 별로 알려진 것이 업습니다. ‘사기’에도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순자(荀子)의 생몰연대도 정확하지 않습니다만 전국시대 말기인 대체로 BC 313-238이 통설입니다. 이름이 황(況), 자(字)는 경(卿), 또는 손경(孫卿)이라고도 하며, 제(齊)나라의 직하학궁(稷下學宮)에서 오랫동안 학문 연구와 강의에 종사하여 제주를 3번씩이나 역임하였으나 후에 모함을 받아 초(楚)나라로 가서 난릉령(蘭陵令)을 역임하였으며,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의 학문적 권위나 유학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비중에 비하여 남아있는 자료는 매우 소략합니다. 그가 유가의 이단(異端)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당연히 그 이단의 내용이 어떤 것인가에 쏠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순자사상의 특징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통유가의 성격을 다른 시각에서 조명해 볼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유학(儒學)은 객관파(客觀派)의 갈래와 주관파(主觀派)의 갈래로 나누어집니다. 사회질서와 제도를 강조하는 순자계통이 객관파로 분류되고, 반대로 개인의 행위를 천리(天理)에 합치시키고자 하는, 소위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는 맹자(孟子)계통이 주관파로 분류됩니다. 이러한 차이는 후에 기학파(氣學派)와 이학파(理學派)로 나누어지기도 합니다.
순자는 예(禮)에 의한 통치를 주장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덕(德)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는 주관파와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주관파에서도 공자의 극기복례(克己復禮)를 계승하여 예(禮)를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순자의 예(禮)는 공자와는 달리 선왕(先王)의 주례(周禮)가 아니라 금왕(今王)의 제도와 법을 의미합니다.
대체로 안정기에는 예(禮)가 개인의 수양과 도덕규범으로 해석되고 사회변혁기에는 사회질서와 제도의 의미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국(戰國) 말기가 급격한 변혁기였음은 물론입니다. 순자의 예는 법(法)의 의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순자를 법가(法家)의 시조로 보는 견해가 여기서 성립하는 것이지요. 아마 전국 말기의 상황에서는 순자의 주장이 패자들의 관심을 더 많이 끌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법가이론을 집대성한 한비자(韓非子)와 진시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의 재상(宰相) 이사(李斯)가 순자 문하의 제자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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