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너무 늦지 않은 출발이기를"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너무 늦지 않은 출발이기를"

서영석의 '삐딱하게 본 정치' <24> 李의 개혁성 가미를 기대하며

프레시안에 게재된 김현철 에세이집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내용을 보니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게 별로 좋은 얘기는 아닌 듯 보였는데, 그래서인지 이회창 후보를 적극 지지하는 언론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사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현철씨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리는 없다. 지난번 8.8 재보궐선거 출마가 좌절됐던 것도 결국은 이회창 후보의 입김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은 뻔한 사실이니, 김현철씨가 "너무 늦지 않은 출발이기를"이란 제목의 에세이집에서 "김영삼정부 당시 이회창 후보가 총리직에서 물러난 것은 이회창씨의 거듭된 실책 때문"이라고 주장했다고 그것이 반드시 정당성을 갖는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고 하겠다.

또한 김현철씨가 감사원장 시절의 이회창 후보를 놓고 "최소한의 기대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고 혹평한 것 역시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사감(私感)이 작용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필자에게 관심은 김현철씨가 한나라당 이회창후보를 "국정능력 무능자"라고 묘사하고 있는 감정적인 대목이 아니라 다른 데 있다. 김영삼정부 시절 이회창 후보가 발탁된 과정이 오히려 필자에게는 관심이란 얘기다.

김현철씨는 오늘날의 이회창 후보가 있기까지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공이 절대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구체적으로 주위의 반대와 우려가 만만치 않았던 감사원장, 국무총리 발탁과정을 소개하면서 "이회창씨는 본인이 어떻게 생각하건 문민정부의 개혁에 가장 책임이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이며 또 그 성과를 가장 많이 받은 사람 중 한 사람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김현철씨의 육필을 직접 인용해 보자.

"개혁의 주체가 세력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추진하는 개혁은 아무래도 능동적-적극적으로 나아가기 어려웠다. 또 문민정부가 개혁을 추진했던 시기 자체가 무엇을 건설하기보다는 적폐를 해소하고 잘못된 관행을 고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창조적 파괴'가 불가피한 시기였던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감사원에 대한 아버님의 관심은 각별한 것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회창씨를 감사원장으로 임명하는 과정에서 아버님은 매우 깊은 고민을 하셨다. 감사원이야말로 '창조적 파괴'를 함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기관이라는 것이 아버님의 생각이셨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회창씨는 그후 당대표로 등용되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신한국당의 대선후보로까지 선출되었다."

오늘날 개혁진영으로부터 "수구반동의 상징"으로 꼽히는 한나라당 이회창후보가 김영삼정부에서 입신한 첫자리인 감사원장에 취임할 때 계기가 바로 개혁추진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은 일종의 아이러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는 그야말로 김현철씨가 표현했던 그대로 "개혁의 주체가 세력화되지 못한 상태"였을 것이다. 3당합당 이후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민주계는 절대로 주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개혁주체의 부재상태가 아니었던들 이회창 후보가 감사원장으로 발탁될 리 없었을 것이고, 총리를 거쳐 대통령후보까지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가 신한국당의 경선에서 결국 대통령 후보로 당선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김영삼정부 개혁의 상징이란 점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개혁을 모토로 민정당에서 민자당, 신한국당으로 연결되는 보수정당의 대권후보를 쟁취했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러한 이회창 후보가 5년이 지난 지금 보수의 상징으로 50대 이상의 유권자에게만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다는 것도 역사의 패러독스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5년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회창 후보가 "수구반동의 상징"이 되었던 것일까. 오죽하면 "이회창 후보가 절대로 집권하면 안 되니 별로 유사성도 없는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의원을 단일화시켜 이 후보를 낙마시켜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는 것일까. 필자는 단견일지 모르나 김대중정부, 한나라당 안의 개혁세력, 그리고 이회창 후보 자신에게 공평하게 3분의 1씩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김대중정부가 집권 이후 이회창 후보를 몰아부쳤을 때 그를 결사옹위한 그룹은 다름아닌 민정계들이었다. 김기배 하순봉 양정규 의원 등 친위그룹들이 등장하게 된 것도 사실 이 때다. 그의 친위그룹에 보수일변도의 민정계가 포진됐다는 것이 이회창 후보의 개혁성을 상실하는 첫 단추였다고 필자는 평가한다.

김대중정부의 이회창 후보에 대한 탄압(?)이 결과적으로 그가 한나라당을 절대체제로 장악할 수 있게 했고, 다시 대권도전을 할 수 있도록 해줬으니, 역사는 어김없이 반복되는 것이 분명한 것 같다.

한나라당내 개혁세력들은 처음부터 이회창 후보에 대한 불신으로 출발했다. 그렇다고 대안도 없이 5년을 헤매다가 막판에 "김대중 정권으로부터 정권을 재탈환하기 위해서는 이회창 후보가 불가피하다"는 대안부재론의 늪에 빠졌고, 백기항복함에 따라 이회창 후보에 대한 영향력이 제로상태로 떨어졌다. 전적으로 전략부재의 한나라당내 개혁세력의 영향력 감소는 이회창 후보의 보수성을 더욱 부각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주변에 누가 있든, 누가 뭐라고 말을 하든, 이회창 후보 본인이 과거 김영삼정부 아래에서 감사원장에 발탁됐던 그 초심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수구반동의 상징으로 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란 점에서 이회창 후보 본인의 책임도 3분1쯤은 있다는 것이 필자 생각이다.

왜 각종 여론조사에서 20대와 30대의 지지율이 바닥이며, 대안만 등장하면 40대 지지율도 흔들리는 것인지, 누구보다 이회창 후보 본인이 이 점에 겸허한 자세를 보여야 한다. 개혁의 피를 수혈해 개혁성을 보강하는 데 너무 늦지 않은 출발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