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가에 대하여는 맹자가 가장 신랄한 비판을 가합니다. 맹자는 물론 맹자편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묵가만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아닙니다만 주로 묵가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자기이론의 정체성을 확립해 갑니다.
맹자는 묵가의 엄격하고 비타협적인 면을 비판합니다. 그리고 겸애라는 엄숙주의에 대해서도 그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에 어긋나는 것임을 비판합니다.
'맹자'에 맹자와 제자 도응(桃應)의 대화가 있습니다. 도응이 질문하였습니다.
"순(舜)이 천자로 있고 고요(皐陶)가 사법관으로 있는데 천자의 부친인 고수(瞽瞍)가 살인을 하였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필 순임금과 그 아버지 고수를 예로 든 것은 부자간의 사이가 나쁘기로 유명했었기 때문이지요. 이 질문에 대한 맹자의 답변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고수는 당연히 법에 따라 체포되어야 하고, 그리고 살인자를 사형에 처하는 것은 선왕의 법이기 때문에 순임금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맹자의 답변입니다. 그러면 순임금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맹자의 대답이 압권입니다. 이 답변이 유가와 묵가의 차이를 확연하게 드러내는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순은 임금자리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몰래 부친을 업고 도망가서 멀리 바닷가에 숨어살면서 부친을 봉양하면서 천하를 잊고 즐거운 마음으로 여생을 보내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맹자의 대답입니다. 임금의 사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들을 처단한 묵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러한 방식은 효(孝)라는 이름으로 별애(別愛)를 두호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논어'에도 유가와 묵가의 차이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섭공(葉公)과 공자의 대화입니다.
섭공이 공자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고을에 대쪽같이 곧은 사람(直躬)이 있습니다. 그 아비가 양을 훔치자 그가 그 사실을 관청에 고발했습니다."
공자가 말했습니다.
"우리 고을의 곧은 사람은 그와 다릅니다. (비록 그런 일이 있더라도) 아비는 자식을 위해 감추어주고 자식은 아비를 감추어줍니다. 곧음은 그 가운데 있습니다."
강의실에서 이야기하기는 좀 적절하지 않습니다만 선생이 학생을 편애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인정(人情)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자식도 편애하는 것이 인정이라는 것이지요. 사랑은 본질적으로 편애이며 편애하지 말라는 것은 사랑도 모르는 소리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소위 인정(人情)이라는 심성 역시 사회적으로 물든 것이고 역사적으로 물든 것이라는 인식이 묵자에게는 있는 것이지요. 묵자의 주장이 비현실적인 면이 있었던 점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모든 현실정합적인 주장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한계도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문제와 함께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묵가의 소멸이 묵가이론의 비현실성과 엄숙주의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위에서 지적하였듯이 묵가의 사회적 토대가 소멸함에 따른 것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끝으로 묵자에 대한 '장자(莊子)'의 평가를 소개합니다.
"실천행위는 과도하였으며 절제는 지나치게 엄정하였다. '非樂'과 '節用'을 저술하였다. 사람이 태어나도 찬가를 부르지 않았으며 죽어도 상복을 입지 않았다. 묵자는 만인의 사랑과 만인들간의 이익을 말하고 서로의 투쟁을 반대하였으니 그는 실로 분노하지 말 것을 설파한 것이다.
노래하고 싶을 때 노래하지 말고, 울고 싶을 때 울지 말고, 즐거울 때 즐거워하지 말아야 한다면 이런 묵가의 절제는 과연 인간의 본성과 맞는 것인가? 묵가의 원칙은 너무나 각박하다. 세상을 다스리는 왕도(王道)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묵자와 금활리(禽滑釐)의 뜻은 좋지만 실천은 잘못된 것이다. 스스로 고행(苦行)을 하게 하여 종아리에 살이 없고 정강이에 터럭이 없는 것으로 서로 경쟁을 벌이게 할 뿐이다. 사회를 어지럽히기에는 최상이요 다스리기에는 최하이다.
묵자는 천하에 참으로 좋은 인물이다. 이런 사람을 얻으려 해도 얻을 수 없다. 자기의 생활이 아무리 마른 나무처럼 되어도 자기의 주장을 버리지 않으니 이는 정말 구세(救世)의 재사(才士)라 하겠다."
묵가(墨家)는 중국의 사상사에서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최초의 좌파조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국시대의 패권적 질서와 지배계층의 사상에 대하여 강력한 비판세력으로 등장하여 기층민중의 이상(理想)을 처음으로 그렸습니다.
투철한 신념과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대중 속에서 설교하고, 검소한 모범을 보였으며 서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습니다. 묵자가 죽은 후에도 2백여년 동안 여전히 세력을 떨쳤었지만 그 후 2천년이라는 긴 망각의 시대를 겪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묵가(墨家)는 좌파사상과 좌파운동이 그 이후 장구한 역사 속에서 겪어나갈 파란만장한 드라마를 역사의 초기에 미리 보여주었다는 아이러니컬한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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