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묵가의 조직과 실천의 엄정함에 관한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여씨춘추’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입니다. BC 381년 양성군(陽城君)의 부탁을 받고 초(楚)나라의 공격에 대항하였으나 패하였다. 거자(鉅子) 맹승(孟勝) 이하 1백83명이 성(城) 위에 누워 자살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묵가(墨家)는 집단자살이라는 매우 비장한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거자(鉅子)는 묵가조직의 책임자로서 생사여탈권을 가질 정도로 조직규율이 엄격하기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묵자가 물론 초대 거자였음은 물론입니다.
맹승은 초나라의 양성군의 부탁으로 나라의 수비를 맡고 있었습니다. 패옥(佩玉)을 둘로 나누어 신표(信標)로 삼을 정도로 신의가 두터웠습니다. BC 381년 초나라의 왕이 죽고 내란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양성군은 왕실에 도전했다가 달아납니다. 초 왕실은 양성군의 봉지(封地)를 몰수하기 위해 군사를 보냈습니다.
수비를 맡고 있던 맹승은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왕실의 공격을 막을 힘도 없고 그렇다고 신의를 저버릴 수도 없다. 죽음으로써 신의를 지킬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최후의 선언을 합니다. 이러한 맹승의 결연한 자세에 대하여 제자들이 불가함을 간합니다.
자결이 양성군에게 이롭다면 죽는 것이 마땅할 것이지만 그것이 양성군에게 조금도 이로울 것이 없을 뿐 아니라 더구나 그것은 세상에서 묵자의 명맥을 끊는 일이기 때문에 불가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반론에 대하여 맹승이 펼치는 논리가 묵가의 면목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양성군에 대한 나의 관계는 스승이기 이전에 벗이었고, 벗이기 이전에 신하였다. 우리가 죽기를 마다한다면 앞으로 세상 사람들이 엄격한 스승을 구할 때 묵자학파는 반드시 제외될 것이며, 좋은 벗을 구할 때에도 묵자학파는 제외될 것이며, 좋은 신하를 구할 때도 반드시 묵자학파가 제외될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택하는 것은 묵자학파의 대의(大義)를 실천하고 그 업(業)을 계승하기 위한 것이다.”
결연한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맹승은 송나라에 가 있는 전양자(田襄子)에게 거자(鉅子)를 넘기고 자결했습니다. 그를 따라 함께 자결한 제자가 1백83명이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 이외에도 묵가의 엄격한 규율에 대하여 전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묵자 다음의 거자인 복돈(腹敦)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복돈의 아들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진(秦)의 혜왕(惠王)이 복돈에게 은혜를 베풉니다.
“선생은 나이도 많고 또 다른 아들이 없으시니 과인이 이미 형리에게 아들을 처형하지 말도록 조처를 취했습니다. 선생께서는 이런 제 뜻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복돈의 대답은 참으로 뜻밖이었습니다.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남을 해친 자는 형벌을 받는 것이 묵가의 법입니다. 이는 사람을 죽이거나 해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무릇 사람을 죽이거나 해치는 행위를 금하는 것은 천하의 대의입니다. 왕께서 비록 제 자식을 사면하셔서 처형하지 않도록 하셨더라도 저로서는 묵자의 법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돈은 혜왕의 사면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식을 처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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