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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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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60>

다가오는 동아시아의 시대(上)

필자가 보는 역사흐름의 기본 단위는 600년이다. 길게는 1800년이고 최소 단위는 60 갑자해서 60년이다. 오늘은 음양 오행을 써서 다가오고 있는 동아시아의 시대에 대해 조망해 보고자 한다.

역사는 순환한다. 아무리 순환론을 부인하는 자라 하더라도, 밀물과 썰물이라는 우주적 변화의 흐름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이 밀물과 썰물은 아주 미세한 시간 단위 속에도 존재하고 보다 유장한 시간 단위 속에도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오름이 있으면 내림이 있는 것이고, 주식이 상승할 때도 오르내리면서 올라가고, 내릴 때도 오르내리면서 내려가는 법이다. 일치일란(一治一亂)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것이다.

어떻게 감히 동아시아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필자를 두고 일러 '혹세무민'의 요망한 말을 일삼는 방사(方士)의 무리라고 단정짓기 전에, 얘기부터 들어보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는가!

먼저 서구의 지구 제패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서구의 흥기가 시작된 시점은 1604년 영국이 서인도 회사를 설립하면서부터였다. 그들은 미지(未知)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서구의 이데올로기를 한마디로 줄이면 'quest'이다. 탐구이고 모험의 원정이다. 서구인들의 이런 성향에 대해 소름끼칠 정도로 정확한 표현은 독일의 역사학자인 슈펭글러이다. 그는 자신의 책 '서구의 몰락'속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파우스트적인 인간의 눈에 비치는 세계에서 모든 것은 하나의 목표로 향하는 움직임이다. (중략) 살아가는 것이 그에게는 싸우는 것이고 정복하는 것이며 의지를 관철하는 것이다. (중략) 아폴론적 인간(그리스 로마 문명을 일컫는다; 필자 주)의 세계에서는 목표있는 운동도 없고..."

""파우스트적 문화는 모든 지리적 물질적 제한을 정복하고, 아무런 실제적인 목적도 없이 단지 상상을 위해서만 북극과 남극에 도달하려고 시도하고, 마지막으로는 지구의 전 표면을 하나의 식민 지역으로 삼고 경제 제도화했다. (중략) 오토 대제에서 나폴레옹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지배자는 이것을 행동에 옮겼다. 무한계적인 것이 그들의 목표이고, (중략) 그리고 오늘날 아직도 오래도록 끝나지 않는 세계전쟁, 그것의 목적인 제국주의이다."

"원양 항해의 이념, 이것은 바이킹의 정신이고 (중략) 죽은 왕을 배에 싣고 대양으로 보낸 원시 민족의 정신이다. 이것은 저 무한에 대한 어두운 동경의 격정적인 징후이다."

"그리스의 윤리는 헤라클레이토스를 제외하고는 싸움을 하나의 윤리적 원리로 삼지는 않았다. (중략) 이에 반해 반항을 극복한다는 것은 서구적 혼의 전형적인 충동이다."

이처럼 슈펭글러는 미지에 대한 탐구와 정복 정신이 서구 회화에 있어 원근법을 낳았고, 수학에서 방향이 주어지는 양의 개념인 벡터를 낳았다고 얘기하고 있다. 또 그는 이 정신은 갈릴레이와 뉴턴의 동력학을 낳았으며,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예수회를 낳았으며, 물리학에서 에너지와 장(field)의 개념을 만들어내게 했으며, 칸트를 비롯한 모든 서구의 철학자들은 현상으로서의 세계를, 그것을 인식하는 자아의 권력 요구에 굴복시키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이 의지는 전 지구를 지배하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낳았으며, 무한의 우주에 대한 동경과 그것을 설명하고 정복하려는 현대과학을 낳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무제한의 팽창을 전제로 하는 강력한 의지이고 힘이며 행동력이며 바로 서구의 혼이자 정신이다.

이에 절제(sophrosyne)와 평정(ataraxia)이라는 그리스적 생활윤리, 인(仁)이나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공자의 이상, 현실을 초월해서 절대 자연의 경지에서 노닐자는 장자의 소요유(逍遙遊), 모든 존재와 인식 작용까지도 자성(自性)이 없다는 불교적 깨달음은 슈펭글러 말대로 '치유할 수 없는 갈망을 지니고 무한대로 팽창하려는 서구인들의 혼' 앞에서 한마디로 무용지물이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탄생한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바로 진보와 발전이다. 진보란 전진하는 것이며(progress, advance, march), 발전이란 팽창하고 확대하며 커 가는(expansion, extension, enlargement, development, growth) 것이다. 이 개념은 오늘날 너무도 당연시되는 바람에 우리들 모두 그 속에 젖어 살지만, 사실은 서구의 흥기와 함께 나타난 비교적 새로운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무제한적인 팽창과 확대의 정신은 현대수학에 있어서의 무한(無限, the infinite)에 대한 문제이며, 우주의 기원과 팽창을 다루는 스티븐 호킹의 천체물리학이다.

아무리 중국의 정화(鄭和) 원정대가 아프리카를 갔든 아메리카까지 갔든 그것은 중국 문명의 기본 흐름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었다. 로마가 당시 그들이 알고있던 전 세계를 지배했어도 그들의 눈은 언제나 로마로 향해 있었지, 국경 너머의 미지로 향하지는 않았다. 또 몽고의 기병대가 유럽을 정복해 들어갔어도 그것은 약탈을 위한 것에 불과했다.

그들의 마음은 북풍이 부는 몽고의 풀밭을 떠나지 않았기에 원(元)제국은 중국인들의 반항이 거세어지자 순순히 중국 땅을 내어놓고 몽고 초원으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우리 역시 그렇다. 어떤 한국인이 어찌 어찌하여 세계의 중앙인 뉴욕에서 치부하고 사회적 지위를 굳혔어도 마음과 눈은 언제나 서울에 머물러 있지, 그곳에 있지 않다.

이처럼 진보와 발전이라는 개념은 전적으로 근세 서구의 이데올로기이다. 그래서 현재 세상은 그들의 눈과 가치에 따라 저개발국과 개발된 나라로 나뉘는 것이며, 경제를 다루는 사람들은 GDP 나 GNP 가 언제나 플러스(+)여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지니고 있기에, 심지어는 경기후퇴까지도 마이너스 성장이라고 해서 성장의 범주 내에 넣고 있다.

그러나 이는 오름이 있으면 내림이 있다는 우주적 조수간만을 인정치 않겠다는 얘기이고 사리에 맞지 않는 생각이다. 필자는 서구인들을 '항해하는 사람들'(homo voyage)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항해는 어떤 장벽에 닿아있다. 미지를 향한 탐구와 원정은 끝나는 법이 없겠지만, 그것은 나중 얘기고 이제는 귀선(歸船)해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영국의 위대한 모험 판타지아를 대표하는 톨키엔의 '반지전쟁'을 보라. 프로도는 반지를 모르도르의 화염산에 던지고 나서 귀향해서 "그래, 이제 돌아왔어."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가!

서구인들은 서인도 회사를 설립하면서부터 위대한 원정에 올랐다. 1604 년에 시작된 이 미지에의 탐험은 1840 연대 중반에 아편전쟁에서 청제국을 박살내고, 1904년에 와서는 더 이상 정복할 땅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는 300 년에 걸친 대 상승기로서, 그 결과 선두주자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했다. 중국을 묵사발 만들고, 아프리카를 노예 공급지로, 인도를 생산기지로 만들어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다.

그러나 팽창 일변도의 이데올로기에 젖은 서구 제국주의 세력간의 투쟁은 마침내 그들간의 투쟁에 들어가게 된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유럽은 자멸하고, 그 법통을 이어받은 신흥 미국과 러시아가 로마제국의 깃발을 누가 차지하느냐를 놓고 전 세계 각지에서 그리고 달에 우주선을 누가 먼저 보내느냐 등, 우주공간에서까지 무제한의 경쟁을 펼친 끝에 미국이 승리했다.

하지만 이는 유럽 절정기의 위대한 영광에 비하면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으며, 오늘날 절대 초강대국 미국의 영광은 만추(晩秋)의 화려한 단풍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후세 사람들은 알게 될 것이다.

서구의 내리막길은 1904년에 시작해서 300 년에 걸치는 대 하락인데, 이를 다시 60 년 단위로 나누어 다섯 기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이 하락은 절반의 시점인 2054 년까지는 세상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인식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락 1기는 1964 년 월남전이 그 대미를 장식했고, 현재 하락 2기를 달려가고 있다. 그중 하락 2기의 절반 부근에서 러시아가 손을 들었고, 미국만 남았다. 그리고 하락 2기의 절반 지점인 1994년부터 나타난 현상,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현상이 세인들의 눈에 구체화되는 시기, 즉 60 년의 60 % 지점인 1996년에 나타난 현상이 대단히 재미있다. 왜냐면 우리가 살고있는 당대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나타난 현상은 큰 전쟁이 아니다. 미국과 맞서 싸울 상대가 없는 까닭이다. 반면, 증시의 거대한 상승이 시작되어 엄청난 버블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 거품은 두 가지 경로를 통해 형성되었다. 미국인들은 소득의 일정 부분을 연기금을 통해 증시에 집어넣으면서 형성되었고, 또 한가지 경로는 미국이 전 세계의 소비 시장으로서 역할을 자임하면서 엄청난 돈이 미국 증시로 흘러든 것이다. 그리고 이 버블의 결정판은 신기술이 새롭게 거대한 수요와 시장을 창출해 낼 것이라는 믿음을 팔았던 나스닥이었다.

버블은 2000 년 초에 절정에 달했는데, 사실 이 거품의 본질은 이 세상에 지나치게 많이 쌓여있는 부(富)를 소멸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그냥 소멸시킬 수는 없기에 하늘 높이 쏘아 올린 것이다. 예전 같으면 전쟁이 부를 소멸시키는 계기가 되고, 반대로 야망을 가진 새로운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었는데 오늘날은 그런 장치가 없기에 시장이 부의 소멸 기능도 대신 맡고 있는 것이다.

금융자본들은 멕시코에서 엄청난 돈을 떼일 위기를 처해도 IMF 가 구제해 주었고, 한국과 동남아 등지에서도 한 푼도 떼이질 않고 모조리 회수할 수 있었으니 어떻게 부가 소멸될 수 있겠는가? 길은 하나밖에 없다. 증시를 한껏 끌어 올렸다가 높은 곳에서 위치 에너지를 이용하여 떨어뜨리는 방법이 그것이다. 이리하여 거대한 거품은 2006년이면 대부분 소멸하게 되고 그 후에는 길고 긴 디플레 시대가 오면서 세상이 정화될 것이다.

혹시 디플레이션이 온다고 해서 미리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경제 규모가 축소되면 축소 되는대로 균형점을 잡게 되면서 세상은 더욱 인간화되고 편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6 개월 쓰던 휴대폰을 3년 이상 쓴다고 해서 세상이 나빠지지는 않는다. 소득 인플레가 사라지면 화폐의 실질 가치가 올라가고 근검절약하면 사는데 별 지장이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무제한적 진보와 발전은 그 부작용으로 환경이 파괴되고 오염되어 왔으며, 그럼에도 빈부의 차이는 갈수록 커져가고 있다. 이 거품이 모두 소멸하고 세상이 맑아지는 시점은 2024년이다. 하락 2기의 종말점이므로, 미국은 여전히 강대국으로 비쳐질 것이지만, 이 시기가 바로 동아시아의 약진이 본격화되는 시기가 된다.

약진이라고 표현했지만, 중요한 것은 이 약진은 더 이상 서구적 이데올로기인 무제한적 진보와 발전이라는 개념을 답습하는 방식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동아시아의 약진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 그리고 그 중심에 우리가 어떻게 자리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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