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애(兼愛)와 비공(非攻)을 중심으로 ‘묵자’를 읽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하면 반드시 읽어야 할 편들이 더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절용편(節用篇)입니다.
절용은 물건을 아껴 쓰는 검소함입니다. 절용은 밖에서 땅을 뺏어서 나라의 부(富)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비용을 줄여서 두 배로 늘리는 것입니다.
재물의 사용에 낭비가 없게 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묵자의 사과론(辭過篇)입니다. 과소비(過消費)를 없애는 것이지요.
“옛날의 성왕은 궁실을 지을 때 단지 생활의 편의를 고려하였을 뿐 결코 보고 즐기기 위하여 짓는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궁실을 짓는 법은 이롭지 않는 것에는 비용과 노력은 들이지 않는 것이다.”(聖王作爲宮室 便於生 不以爲觀樂也. 故爲宮室之法曰 凡費財勞力不加利者 不爲也 : 辭過)
“쓸데없는 비용을 없애는 것은 성왕의 도이며 천하의 큰 이익이다.”(去無用之 聖王之道 天下之大利也)
묵자가 무용(無用)한 것으로 드는 것 중에는 창칼을 비롯하여 궁궐 옷 음식 수레 배 장례 음악 등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묵자의 절용(節用)은 비공(非攻) 비악(非樂) 절장(節葬)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순자(荀子)는 묵자를 비판하여 ‘실용(實用)에 눈이 가려 문화(文化)를 모른다’(墨子蔽於用 而不知文) 즉 문화라는 소비가 생산을 증대시킨다는 반론을 폈던 것이지요.
절용이 미덕이다. 아니다.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다. 과소비를 삼가자는 캠페인을 벌이다가 다시 경기활성화를 위해서 소비를 늘려야 한다는 반대의 목소리에 가려지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체제하의 생산과 소비는 사람들의 삶을 기준으로 하여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사실 그 많은 음식점이 불황을 겪지 않으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외식을 해야 하는지 걱정됩니다. 마찬가지로 10개의 월드컵 경기장을 계속 채우려면 얼마나 많은 경기와 문화행사를 만들어내야 할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입장해야 할지. 생각하면 아득한 마음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경우든 사람들의 소용(所用)은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자본의 현재형태인 현재의 생산규모를 유휴화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차라리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새로운 상품이나 새로운 소재, 새로운 기술, 새로운 문화가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소용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최대한의 이윤을 얻기 위한 자본운동의 일환일 뿐입니다. 묵자의 절용(節用)이 과연 문화를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가 인간적인 것이 아닌지에 대하여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소용없는 물건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느냐라는 일견 인간적인 논리로 그것의 생산과 소비를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먹고 사는 구조를 어떻게 짜는 것이 온당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하여야 하는 것이지요. 기업의 논리, 경쟁의 논리, 효율성의 논리에 의해서 생산규모와 소비수준이 설정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진보는 단순화라는 간디의 명제를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묵자의 절용편(節用篇)은 소염론(所染論), 사과론(辭過論)과 함께 과잉생산과 대량소비로 귀착될 수밖에 없는 현대자본주의의 거대한 낭비구조를 조명하는 유력한 관점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낭비구조와 함께 거대한 소염구조(所染構造)도 함께 주목해야 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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