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프레시안 전문위원 백병규씨가 언론비평 계간지 <열린 미디어 열린 사회> 가을호에 기고한 '디지탈 종이와 신문업계의 혁명' 기사 전문이다. 백 위원은 이 글에서 최근 미국, 일본 등에서 시도되고 있는 '디지탈 종이' 개발 현황을 소개하면서 이 새로운 전자매체가 상용화될 경우 신문업계에도 큰 변화를 몰고 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필자와 <열린 미디어 열린 사회> 발행처인 <사단법인 열린미디어센터>측의 양해를 얻어 이 글의 전문을 게재한다. 편집자
만약 컴퓨터 모니터가 종이처럼 얇아진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아니, 종이처럼 얇아 둘둘 말거나 접을 수 있는 그런 표시장치가 실용화된다면 어떻게 될까?
게다가 한 장의 종이 같은 표시장치에 실시간으로 수많은 정보를 전달해 볼 수 있게 된다면? 가령 종이신문 지면과 똑같이 편집된 이 표시장치의 주가표가 실시간으로 바뀌는 주가 시세를 그 때 그 때 보여준다면? 스포츠면의 경기 사진을 손가락으로 누르기라도 하면 경기의 하이라이트 장면이 동화상으로 나타난다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제지업계와 인쇄 업체는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신문이나 잡지, 출판의 양상도 크게 달라지게 될 것이다. 매일 아침 신문을 배달하는 풍경도 자취를 감추게 될지 모른다.
아침마다 인터넷에 연결된 전자신문 한 장에서 그날 치 신문 수십 면을 차례로 넘겨가며 볼 수도 있고, 아니면 신문 넘기는 데 익숙한 독자들을 위해서는 종이신문 면 수 만큼의 볼륨을 갖는 전자신문을 한 장씩 넘겨가며 그날 치 신문을 받아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필요하다면 둘둘 말거나, 아니면 접어서 손에 들고 다닐 수도 있게 될 것이다.
결코 상상 속의 일이 아니다. 당장 눈앞의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먼 미래의 일도 이니다. 전자 종이(electronic paper), 디지털 종이(digital paper), 만능종이(smart paper), 혹은 전자 잉크(electronic ink)라고 하는 디지털 기록매체, 디지털 표시매체가 2천년 가까이 기록매체로서 확고한 자리를 지켜왔던 종이를 위협하고 있다.
***종이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들**
전자 종이를 개발하려는 노력은 1980년대부터 있어 왔다. 이 분야의 선두주자는 제록스.
제록스의 팔로 알토연구소(PARC)는 1980년 대부터 전자종이 개발팀을 두고 지속적인 연구개발 활동을 펴왔다. 그 동안 상당한 기술적 성과를 거뒀지만 제품화까지는 연결되지 못하면서 1990년대 초반에는 연구 활동이 한때 위축되기도 했다.
제록스의 연구 활동이 부진한 가운데 전자종이 개발에 불을 붙인 곳은 미국의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연구팀.
1997년 전자종이 기술을 개발한 MIT 미디어 랩은 이 기술의 상용화를 목표로 E 잉크(E Ink)라는 벤처 회사를 설립했다. E 잉크에는 미국의 대표적인 통신장비 업체인 루슨트가 수백만 달러를 투자했으며, 벨 연구소와 IBM이 참여하고 있다. 또 미국의 대표적인 신문 재벌 허스트 그룹도 관계를 맺고 있다.
MIT의 상용화에 자극을 받은 제록스도 별도 회사를 차렸다. 팔로 알토연구소의 전자종이 팀이 1999년 분사해 기리콘 미디어(Gyricon Media)라는 벤처회사를 설립했다. 여기에는 3M이 제휴사로 공동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일본의 대표적인 카메라 메이커인 미놀타도 전자종이 개발 대열에 함께 하고 있다.
이들이 개발하거나 상용화하려 하는 전자 종이는 말 그대로 ‘종이’를 지향하고 있다. 종이와 같은 특성을 고스란히 살리면서 디지털 기능을 부가하려 하는 것이 전자 종이 개발의 최종 목표이다.
종이는 서기 105년 중국 후한(後漢)의 채륜(蔡倫)이 발명했다. 종이의 영어 말인 페이퍼(paper)의 어원인 파피루스를 종이의 기원으로 보기도 하지만 지금과 같은 종이의 개발은 채륜의 종이가 처음이다.
그 동안 수많은 기술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종이가 기록 매체로서 확고 부동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기록성과 보존성이 탁월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가독성과 휴대성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얇아 책이나 공책으로 만들기 쉽고, 가벼워 휴대하기도 편했던 게 기록과 전달매체로서 적합했던 것이다.
전자종이는 종이의 이러한 특성을 어디까지 살릴 수 있느냐가 성패의 관건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 얇고, 휴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가벼워야 하며 또 유연해야 한다. 이와 함께 가독성도 뛰어나야 한다.
E 잉크나 기리콘 미디어가 개발한 전자 종이는 아직 종이의 물질적 특성에는 한참 못 미친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결코 예사롭지 않다.
***허스트 신문재벌도 참여한 E 잉크의 ‘임미디어’**
현재 이들 업체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은 얇고, 가벼워 휴대하기 편하고, 구부리거나 접을 수 있고, 야외와 같은 밝은 곳에서도 가독성이 뛰어나며 값이 싼 디지털 종이이다.
E 잉크는 1999년 임미디어(Immdia)라는 전자종이 제품을 발표했다. 두 개의 얇은 판 사이에 있는 쌍안성 캡슐(雙安性 캡슐:minuscule switchable capsule)이 전기적 자극에 따라 안에 있는 하얀 색소가 위로 갔다, 아래로 갔다 하면서 하얀 색을 띄거나 검은 색을 띄게 되는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머리카락 굵기의 크기인 이 쌍안성 캡슐이 바로 인쇄에 있어서는 우리말로 점이나 망이라고 하는 픽셀, TV브라운관이나 각종 디스플레이에 있어서 화소와 같은 역할을 한다.
임미디어 첫 제품은 전기적 신호를 보내는 얇은 막으로 둘러 쌓인 본체 두께가 2mm 정도였다. 걸개 그림처럼 이를 걸거나 부착할 때 사용하는 안전판을 포함해 총 두께가 5mm를 넘지 않는다. 첫 제품은 두꺼운 판지 수준이었지만 이를 더 얇게 하는 연구가 진행 중에 있다. 해상도도 그리 나쁘지 않다. 컴퓨터 모니터 수준보다 나은 200dpi의 해상도를 실현할 수 있다. 쌍안성 캡슐의 구성을 다양화하면 풀 컬러 지원도 가능하다는 게 E 잉크 연구진의 설명이다.
<그림> E 잉크가 개발한 전자종이 임미디어 내부 구조
문제는 두께다. 두께가 두꺼우면 얇은 디스플레이는 될 수 있지만 결코 종이를 대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전자 종이에 데이터를 보내고 표시하도록 하는 회로와 시스템을 어떻게 부착하느냐가 가장 큰 문제이다. 여기에는 루슨트 테크놀러지의 ‘F-15’라는, 프린트 하듯이 인쇄하는 분자회로 기술이 채택됐다. 아주 미세한 분자막을 입혀 필요한 회로도를 구성하는 기술이다. 이런 인쇄 분자회로 기술의 채택으로 임미디어의 두께는 더 얇아질 수 있게 됐다.
2mm의 본체가 더 얇아진다면 이 분자 인쇄 회로를 입혀 마치 기존의 책과 같은 전자 책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전자 책을 작동시키는 배터리와 마이크로칩, 메모리 칩 같은 주변장치는 책 등에 장착하는 방안을 모색중이다. 한 장 한 장이 지금으로서는 다소 두껍기는 하겠지만 수많은 내용을 표시했다 지울 수 있는 ‘만능 책’이 되는 만큼 다소의 불편함이나 이질감은 상쇄 될 수 있다는 게 개발팀의 주장이다.
임미디어는 현재 미국의 체인점 같은 데서 상품 홍보 및 가격 표시용 사인 보드로 활용되고 있다. 아직은 전자 종이보다는 두꺼운 사인 보드의 역할에 머물고 있지만, 종이에 근접하는 얇은 두께나 보다 선명한 풀 컬러 해상도의 실현은 시간 문제로 남아 있을 뿐이다.
***제록스의 기리콘 미디어가 개발한 스마트 페이퍼**
제록스의 기리콘 미디어는 1980년대 제록스의 팔로 알토 연구센터의 연구원 닉 세리돈(Nick Sheridon)이 개발한 전자 종이 기리콘(Gyricon)의 이름을 따 만든 회사이다.
기리콘 미디어가 개발한 스마트페이퍼(SmartPaper)는 전기 자극에 반응하는 수백만 개의 양시성 구슬(bi-chromal bread)을 픽셀로 활용한 것이다. 양시성 구슬 조각의 크기는 50미크론으로 각기 하얀 색의 반구와 검정 색의 반구로 돼 있다. 이 구슬들이 전기적 자극에 하얀 반구 쪽이 위로 가거나, 아니면 검정 반구 쪽이 위로 향함으로써 픽셀 역할을 하게 된다. A4 용지 크기의 페이지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2천만 개 정도의 구슬이 필요하다.
이 구슬들은 오일로 채워진 아주 얇은 캐버티에 채워져 있으며 전기 자극이 주어지면 전기 신호에 따라 오일 표면에 붙어 화상을 표시하게 된다. 이 장치의 두께는 종이 대여섯 장 정도이다.
50미크론의 구슬을 사용하면 200dpi 정도의 해상도가 가능하다. 30미크론 구슬을 사용하게 되면 해상도는 300dpi로 향상된다. 300dpi의 해상도면 신문 인쇄 상태 보다 약간 더 뚜렷하다. 기리콘 미디어의 스마트페이퍼는 음영 효과도 만들어 낼 수 있다.
문제는 활자나 그림을 표시하도록 하는 방법이다. 스마트페이퍼는 이 잉크의 임 미디어와는 달리 양시성 색소 조각에 전기적 신호를 보내는 방안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임미디어는 쌍안성 캡슐 앞뒤의 얇은 판이 전기적 신호의 전달 매체가 된다). 그 대안의 하나로 고안된 것이 ‘요술 지팡이(magic wand)’다. 요술 지팡이로 전기적인 신호를 쏘아 화상을 나타내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방식으로는 프린터나 복사기, 스캐너 대용으로는 사용할 수 있겠지만 기록매체로서 종이의 역할을 대체하기는 역부족이다. 이에 따라 외부 자극 방식이 아니라 자체 인쇄 (self printing) 방식의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스마트페이퍼 역시 체인점의 사인 보드 등으로 상용화되고 있다.
일본 미놀타도 2000년 두께 1mm의 얇은 컬러 전자 종이를 개발, 전자 종이 개발 선두 다툼에 나섰다. 메모리 장치를 붙이면 100페이지까지 정지 화상을 읽어 들일 수 있다. 또 2048×1440 화소의 해상도를 실현해 일반적인 모니터 보다 선명한 화질을 보여준다. 컬러 표시가 가능한 전자종이도 개발했다.
<사진> 미국의 할인마트에 내걸린 전자종이가 부착된 홍보용 걸개 그림
***둘둘 마는 컴퓨터 기술들**
미놀타의 전자 종이 개발에서 알 수 있듯이 아직은 종이보다 두꺼운 수준이지만 종이 수준의 얇은 전자 종이의 출현 또한 그리 먼 훗날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전자 종이가 말 그대로 종이의 역할을 대신하면서도 디지털 기능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수반돼야 할 주변 기술이 적지 않다. 얇은 디지털 종이에 적합한, 얇으면서도 효과적인 컴퓨팅 시스템과 전원, 그리고 저장 장치가 필요하다.
전자종이에 적합한 컴퓨터 시스템 구축과 관련해서는 임미디어의 분자회로 기술처럼 초박막 회로 기술과 초박막 반도체 기술 등이 활용되고 있다. 이른바 ‘둘둘 마는 제조기술(roll to roll manufacturing)’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먼로 파크에 위치한 롤트로닉스(Rolltronics)라는 회사는 종이처럼 둘둘 말 수 있는 초박막 반도체 기술과 회로 기술 개발 업체이다. 이 회사는 아주 얇은 플라스틱에 반도체 등을 포함한 컴퓨터 회로를 심는 기술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아주 얇은 플라스틱 막에 초집적 회로를 실현시키는 기술로 조만간 클럭 속도 10MH인 인텔의 80286 마이크로프로세서 수준의 초고속 회로를 얇은 플라스틱 막에 입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롤트로닉스가 개발하고 있는 또 하나의 ‘둘둘 마는 컴퓨터 시스템’ 가운데 하나는 초박막 저장장치. 아주 얇은 두 장의 유리 종이를 붙여 이를 저장장치로 활용하는 기술을 개발 중에 있다. 머지 않아 A4 용지 크기의 유리 종이 한 장에 기가 바이트의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는 제품을 대량 생산할 계획이다.
전자 종이형 배터리 개발도 활발하다. 이스라엘 키부츠 에이낫(Kibutz Einat)에 본사를 두고 있는 파워 페이퍼(Power Paper)란 회사는 분말 석고판(plaster) 보다 얇아 실크 스크린 방식으로 종이에 입힐 수 있는 배터리를 개발했다. 아연과 마그네슘을 기존 배터리의 양극과 음극으로 사용하는 이 배터리는 평방 인치 크기가 1.5볼트의 전원을 공급할 수 있으며, 배터리의 유효기간도 최소 2년 정도가 가능하다.
이러한 ‘둘둘 마는 컴퓨팅 기술’과 ‘전자 종이’가 결합하면 하나의 온전한 전자 종이 컴퓨터를 만들 수 있게 된다.
***전자판 뉴욕타임스+전자종이=?**
종이 뒷면에 딱 달라붙는 컴퓨터 시스템과 전원이 제공된다면 전자 종이는 실로 막강한 파워를 발휘할 수 있게 된다. 둘둘 말수도 있고, 디자인에 따라서는 책이나 잡지, 신문처럼 접을 수 있는 전자 종이에 책이나, 잡지, 신문의 컨텐츠를 기존의 책이나 잡지, 신문 편집 상태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전자책, 전자 잡지, 전자 신문의 등장도 예상해볼 수 있다.
만약 이런 전자 신문, 전자 잡지, 전자 책이 출현한다면 신문이나 잡지, 출판 시장은 크게 변화할 것이다. 무엇보다 신문은 제작, 인쇄, 배달 시스템 전반에 큰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몇 장의 전자 종이 신문에 인터넷을 통해 매일 매일 인쇄된 신문지면 그대로 전송할 수 있게 된다면 지금의 종이신문을 대체할 공산이 크다.
그것이 설령 종이 신문 처럼 몇 겹으로 접거나 구길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부가되는 디지털 기능은 약간의 불편은 상쇄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신문 제작 비용과 유통 비용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인쇄비와 종이값, 배달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면 신문사들로서는 무척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뉴욕타임스 같은 신문은 디지털 전자 신문 시대에 대비해 다양한 인터넷 신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신문 판형 그대로 보여주는 PDF판은 국내 언론사들도 대부분 제공하고 있는 서비스다. 뉴욕타임스는 올해 초부터 PDF 서비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전자판(electronic edition)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뉴욕타임스 전자판은 신문 판형 그대로의 지면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는 PDF판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PDF판이 신문 한면 한면씩을 내려 받아 보아야 하는 반면 전자판은 신문 전체 지면을 한번에 내려 받아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 PDF판은 인터넷에 접속(on-line) 상태에서만 볼 수 있는 반면, 전자판은 한번 내려 받으면 21일 동안 컴퓨터에 저장돼 별도의 접속 없이 볼 수 있다. 뉴욕타임스 전자판은 이밖에도 단어별 기사 검색 서비스 등을 제공한다.
뉴욕타임스의 전자판 서비스는 휴대형 컴퓨터 등에서 매일 정기적으로 편집된 종이 신문 지면을 그대로 내려 받아 볼 수 있다는 점과 검색 서비스 등이 오프라인 상태에서 제공된다는 점에서 디지털 종이 신문의 초기 형태라고도 할 수 있다. 전자 종이, 디지털 종이가 제공되면 언제라도 전자종이신문, 디지털 종이 신문으로 전환될 수 있는 형태이다.
어쩌면, 전자종이신문은 이미 우리 코 앞에 바짝 다가와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종이 신문 산업에 미칠 영향은 말할 나위 없이 메가톤급이 될 것이다. 신문산업계는 10년 이내에 오프라인 인쇄나 배달 시스템이 온라인 전송, 혹은 무선 전송 시스템과 디지털 종이 신문으로 대체되는 대전환의 시기를 맞게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이러한 변화는 기존의 배달 시스템 속에서 독과점적으로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유력 신문들에게는 ‘악몽’일 수 있고, 인쇄 및 배달 시스템이 취약한 중소 매체들에게는 ‘복음’일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문제는 ‘컨텐츠’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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