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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고독하지 않을 가을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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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고독하지 않을 가을의 바다"

김민웅의 세상읽기 <119>

아마도 바다는 지금 매우 외로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허락도 없이 마구 몰려들어 온통 헤집어놓고는 아무런 인사도 없이 무절제하게 훌쩍 떠나버린 이들이지만, 그래도 그 소란스러움이 오히려 정겨운 흔적으로 애틋하게 그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사라진 것에 대한 사무치는 애정은 막상 사라질 시각이 오기 전까지는 거의 언제나 아직도 미처 예감하지 못하는, 일상의 그리 안타까울 것 없는 익숙한 풍경인가 봅니다.

코발트빛 하늘을, 수고롭게 닦을 필요도 없이 이미 맑은 거울처럼 담아내면서 육중하게 출렁이는 시간도 왠지 쓸쓸한 까닭은 포말같이 번지는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고, 태양을 향해 수줍어하지 않고 훨훨 벗은 자유의 육신이 내뿜는 체온이 만져지지 않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어느새 열기가 돌이킬 수 없이 식어버린 바다에서 더 이상의 추억을 기대하지 않는 무심한 시선이 서운해서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여름 내 떠들썩하게 모닥불을 피웠던 밤이 계절의 문턱을 넘으면서 낯선 손님처럼 모래사장에 내려앉으면, 이제 구름을 스쳐가는 달도 여인의 품에서 비장하게 꺼낸 은장도처럼 차츰 시리고 바람은 떠도는 나그네의 표정처럼 때로 서늘하게 가슴 속을 파고듭니다. 그건, 혹 거처할 곳이 없는 영혼이 그렇게 바람 안에서 홀로 숨어 지내다가, 인파가 사라진 해변의 숲 근처에서 마음 놓고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닮아 있습니다.

이럴 때쯤 해서야 비로소 바다는, 아우성치며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지 않는 가을의 담백한 산책 뒤편에 가려져 있던 전설과 비밀의 속삭임에 바짝 귀를 기울이는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로부터 그를 찾아오는 이들은 물론 비록 많지 않으나, 여름의 방문객들과는 사뭇 다른 사연을 품고 있음을 감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로써 자신의 고독은 찰나에 가까운 사치스러운 잠시였음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가령, 정작 건네야 할 말은 용기가 없어 차마 하지 못한 채 어설픈 이야기만 자꾸 꺼내는 남자 앞에 선 여자는 그의 서투른 입술보다 떨리는 눈빛을 거침없이 응시합니다. 보이지 않는 고백의 깊숙한 곳에 존재하고 있는 진실의 소리 없는 표적을 찾으려는 것입니다. 재빨리 걷어내기 어려운 침묵이 이어진다 해도 결국 서로 만날 수 있는 길이 따로 있음을 아는 이에게, 그것은 어떻게 해도 망각될 수 없는 인생의 빛나는 지점이 됩니다.

이처럼 결국 가을의 바다는 들리지 않는 소리에 지극히 민감해지고 보이지 않는 빛에 눈뜹니다. 그건 만사에 보다 너그러워지는 시작이기도 합니다. 집단으로 구별해서 판별했던 세상에서 분명 서로 다른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세밀하게 마주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보다 더욱 쓸쓸한 이들을 보듬어 안아 위로하는 기쁨을 배우는 시간의, 태초로부터의 사명을 직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처받아 갈 곳이 없어 이리저리 유랑자마냥 배회하는 영혼은 무수한 군중 속에서 도리어 고독해지지만, 단 하나의 존재일지라도 계곡 같이 가파르게 허물어진 심중에 정겨운 인연을 맺는 이가 있다면 그것으로 자기도 모르게 행복해지게 될 것입니다.

가을의 바다는 그래서, 더 이상 고독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맞이하는 이 계절의 신화가 그렇게 창조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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