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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만에 복권한 기구한 운명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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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만에 복권한 기구한 운명의 사상”

신영복 고전강독 <113> 제10강 묵자(墨子)-3

2) 묵자의 현실인식

공자와 묵자는 다같이 춘추전국시대의 사회적 상황을 '사회적 위기'로 파악하였습니다. 무도(無道)하고, 불인(不仁)하고, 불의(不義)한 이기적이고 파멸적인 시대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인식에 있어서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묵자는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3가지의 고통을 받고 있는 바, 주린 자는 먹을 것이 없고, 추운 자는 입을 옷이 없고, 일하는 자는 쉴 틈이 없다(有三患 飢者不食 寒者不衣 勞者不息)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묵자의 이러한 현실인식에서 묵자가 역시 기층민중의 고통과 현실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인식에 근거하여 묵자는 겸애(兼愛)라는 보편적 박애주의와 교리(交利)라는 상생(相生)이론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을 지침으로 하여 연대(連帶)라는 실천적 방식을 통하여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면의 실천적 과제로서 반전(反戰) 평화주의(平和主義)의 기치를 내걸고 헌신적으로 방어전쟁에 참여하였습니다.

묵자사상이 매우 넓은 범위에 걸쳐 있습니다만 우리는 2가지 점에 초점을 두기로 하겠습니다. 겸애(兼愛)와 반전평화주의를 묵자사상의 핵심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묵자는 그의 사상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그것의 실천에 있어서도 매우 훌륭한 모범을 보입니다. 실천방법이 개인주의적이거나 개량주의적이지 않음은 물론이고, 언제나 집단적이고 조직적이며 철저한 규율로서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을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강고한 조직과 엄격한 규율을 가진 집단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묵가는 불 속에도 뛰어 들고 칼날 위에도 올라설 뿐 아니라 죽는 한이 있더라고 발길을 돌리는 법이 없었다고 합니다. (皆可使赴火踏刃 死不施踵 : '淮南子')

아마 이러한 특징 때문에 전국시대(戰國時代), 그리고 진초(秦初)까지만 하더라도 묵가는 유가와 함께 가장 큰 세력을 떨칠 수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가장 큰 학파는 유가와 묵가이며(一世之顯學 儒墨也 : '韓非子') 공자와 묵자의 제자들이 천하에 가득하다고 하였습니다.(孔墨之弟子徒屬 滿天下 : '呂氏春秋')

'회남자(淮南子)'를 쓴 유안(劉安 BC.178-122)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묵가가 활동하였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사마천(司馬遷 BC.145-86)이 '사기'를 쓰던 기원전 1세기경에는 이미 묵가는 자취를 감추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한무제(漢武帝 BC.140-87)때 동중서(董仲舒 BC.179-93)의 건의로 유학(儒學)이 국교가 되면서 묵가가 탄압되었고 해외로 망명한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 시기가 대체로 BC.100년경입니다.

진(秦), 한(漢)이래 사회적 격동기가 종식되고 토지사유를 중심으로 하는 지주 관료중심의 신분사회로 정착되면서 묵가는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상하의 계층적 차별을 무시하는 평등주의 사상이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맹자는 이러한 겸애사상을 비현실적이며 비인간적인 엄숙주의로 매도합니다.

요컨대 묵가는 그 사상의 사회적 기반이 와해되면서 함께 소멸되었다고 해야 합니다. 기층민중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그들을 조직하여 세습귀족 중심의 사회를 개혁하려고 하였던 최초의 좌파(左派)사상과 좌파운동은 결과적으로 새로운 지배집단의 등장과 때를 같이하여 소멸하게 됩니다.

그리고 2천년이 지난 후인 19세기말에 와서야 비로소 유교사회의 와해와 때를 같이 하여 재조명됩니다. 2천년만의 복권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지요. '묵자'의 기구한 운명은 민중들의 그것만큼이나 유장한 흑암의 세월을 견뎌온 셈입니다.

20세기 초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중국에 소개되면서 신청년운동과 함께 '묵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습니다.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으로부터 부정적 평가를 받습니다. 제자백가 중 가장 위대한 경험론자, 평등론자로 평가받으면서도 하느님 사상(天志論)과 비폭력 사상 때문에 유물론과 계급투쟁의 적으로 간주됩니다.

한편 우파로부터는 세습과 상속을 반대하는 그의 평등사상 때문에 여전히 배척되는 기구한 운명을 다시 반복하게 됩니다.

공자가 춘추시대 말기의 사상가라고 본다면 묵자는 전국시대(BC.475-221) 초기의 사상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는 기원전 11세기 이래의 혈연 중심의 귀족봉건제(宗法社會)가 급격히 붕괴되고 새로운 비귀족적 지주계층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제가 태동하는 시기입니다.

BC. 8세기 이래 중국고대사회는 청동기에서 철제문명기로 접어들면서 토지생산력이 급격히 상승하여 봉건제후들간에 서서히 경제적 교류와 정치적 통합이 진행됩니다. 토지의 사유화가 다투어 진행됨에 따라 지주계층이 성립되고 또한 상인을 중심으로 하는 시장경제도 발전하게 됩니다.

이 시기의 사회적 변화에 대하여는 '논어'편에서 이야기하였습니다만 새로운 행정적, 경제적 및 군사적 이유로 도시의 발달을 가져오게 됩니다. 당연히 종래의 혈연중심의 인간관계가 새로운 것으로 변화하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이에 대한 수많은 담론들이 제자백가를 통하여 제기됩니다.

공자는 서주(西周)이래의 예악(禮樂)에 나타난 귀족중심의 통치질서를 새로운 지식인(君子)의 자기수양과 덕치(德治)의 이념을 통하여 회복(維新)하려고 노력하였지요.

이에 반하여 묵자는 종래 귀족 지배계층의 행동규범인 예악(禮樂)을 철저히 부정하고 유가의 덕치이념 대신에 생산에 참여하는 모든 인민의 철저한 공동적 연대(兼相愛)와 물질적 상호이익증진(交相利)를 통하여 당시의 사회를 새로이 조직하려고 하였습니다.

유가와는 달리 숙명론(宿命論)을 배격하고 인간의 실천의지 즉 힘(力)을 강조합니다. 실천의지를 추동(推動)하기 위한 장치로서 귀(鬼)와 신(神)의 존재를 상정하고, 그리고 천자의 절대적 통치권을 주장합니다. 만민평등의 공리주의(公利主義)와 현자독재론(賢者獨裁論)을 표방합니다. 묵가학설의 이러한 개혁성과 민중성은 유가사상과 대항하면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난번에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러한 과도기가 끝나고 중국사회의 역사발전이 진한(秦漢)이래로 토지사유를 중심으로 하는 지주 관료계층의 엄격한 가부장적 신분사회로 정착되면서 묵가학파는 사라지게 됩니다. 상하의 계층적 차별을 무시하고 평등주의를 주장하는 묵가학설은 결국 그 학설의 사회경제적인 기반의 와해와 함께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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