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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과 고르바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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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과 고르바초프

<데스크 칼럼> 북한경제, 시간과의 사투

1987년 말로 기억된다. 알렉산더 헤이그 전 미 국무장관이 한국에 왔다. 레이건 행정부 초기인 81-82년 국무장관을 역임한 그는 한국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미 중앙정보국(CIA)의 극비 정보 등을 들먹이며 소련경제가 파탄 직전이라고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땔감마저 부족해 올겨울을 넘기지 못할 것이란 예측까지 했다.

당시 외신부 기자로 헤이그와의 인터뷰에 참석했던 필자는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소련경제 사정이 좋지 않다는 정도는 알려졌었다. 하지만 레이건 행정부 내 강경파의 일원이었던 헤이그의 발언은 과장됐다고 여겨졌다. 소련경제가 그토록 피폐했다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85년 집권 이후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찌(개방)를 앞세운 국내 개혁과 함께 미국을 상대로 한 과감한 군축 제안으로 전세계 지식인과 언론들의 찬사를 한몸에 받고 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비방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마저 들었다.

당시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만했다. 특히 86년 10월 레이캬비크 미ㆍ소 정상회담때 5년대 전략미사일 50% 감축, 10년내 모든 핵미사일 완전 폐기 등 그의 깜짝 제안에 레이건 대통령이 대처방안을 찾느라 한동안 허둥댔다다는 일화는 인구에 회자될 정도였다.

89년 10월 베를린장벽이 무너질 때만 해도 고르바초프는 국제정치계의 히어로였다. 40여년에 걸친 동서간의 냉전을 종식시키고 지구촌에 평화를 가져온 위대한 정치가였다.

그로부터 1년이 채 안된 90년 8월의 군부쿠데타로 그가 권좌에 밀려난 이후 '고르바초프 개혁'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른바 '노븨 믜슬리(新思考)'에 바탕을 둔 고르바초프 개혁을 이끈 기본적 동력은 경제난이었다. 40여년간 미국과 벌여온 핵군비 경쟁에서 소련경제가 나가떨어진 것이었다.

견디다 못한 고르바초프로서는 외교에서의 제1준칙이라고 할 수 있는 상호주의마저 내팽개친 채 일방적이고도 과감한 군축 제안을 잇따라 내놓은 것이었다. 속사정을 알 수 없었던 언론 등은 고르바초프의 과감한 평화 공세에 열광적 찬사를 보냈고...

그후 고르바초프는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지지율 1% 미만의 인기없는 정치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요즘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행보를 보면 십수년전 고르바초프의 행적이 떠오른다. 지난 7월의 임금ㆍ물가ㆍ환율 현실화에서부터 지난 주 북일정상회담에서의 일본인 납북자 문제에 대한 솔직한 사과, 입법ㆍ행정ㆍ사법권이 독립된 신의주 경제특구 설치 계획은 물론 사업가인지 사기꾼인지 정체조차 불분명한 외국인을 행정장관 임명하는 등 파격적인 조치들이 계속되고 있다.

그 때문인지 국내 일부 언론들은 김정일 위원장의 통치스타일을 '광폭정치' '통 큰 외교'라는 말로 묘사하고 있다.

반면 북일정상회담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유례가 없을 정도의 저자세를 보였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은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북일 수교에 따른 일본의 경제지원과 관련해 유달리 주체성을 강조해온 북한이 민족자존심마저 내팽개친 채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보상이 아닌, 남한과 같은 경제협력 방식을 택했다는 사실도 뉴스가 되지 못했다.

필자는 북한의 경제상황을 평가할 만한 전문적 지식도, 객관적 통계도 갖고 있지 못하다. 95-98년 '고난의 행군' 때보다는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것이라는 상식 수준의 지식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최근 김정일 위원장의 파격적인 정치ㆍ외교 행보에서는 심화되는 경제난에 대한 짙은 위기의식이 느껴진다. 북한은 어쩌면 시간과의 싸움에서 지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북한이 남한과의 공존, 나아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활로를 뚫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후반부터다. 90년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은 '하나의 조선' 정책을 포기하고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 편입하겠다는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힌 행위였다.

미 국무부 조사국의 북한전문가 존 메릴이나 로버트 칼린 등은 이미 당시부터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은 북한의 미국과의 관계개선 의지를 드러낸 신호라고 해석했었다.

그후 핵문제를 고리로 북한과 미국은 94년 10월 제네바 핵합의를 타결시켰고 이에 따라 북미 관계가 정상화될 것으로 기대됐었다. 그러나 제네바 합의 직후 치러진 미 중간선거에서 40여년만에 보수파인 공화당이 의회 다수 의석을 탈환하면서 북미관계 개선은 지지부진해졌다. 전임 클린턴 행정부 말기에 미 대통령의 방북까지 논의될 정도로 진전됐던 북미관계 또한 부시 대통령의 취임으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국 북한이 10여년간 공을 들여온 북미관계 개선은 여전히 시작 단계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다. 10여년의 세월을 잃어버린 셈이다. 이에 따라 다급해진 북한으로서는 중국과 남한을 시작으로 유럽 러시아 일본 등 미국을 우회한 외교 노력을 통한 경제재건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외부의 경제지원을 하루라도 빨리 받기 위해 파격적이고도 일방적인 정책 전환을 시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김정일 위원장의 시도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시간과의 싸움에서 북한경제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 거의 모든 예측은 틀리기 마련이라는 평범한 진리에 기대를 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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