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묵자와 '묵자'
제자백가 중에서 공자 다음으로 그 인간적 면모가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는 사람이 아마 묵자(墨子)일 것입니다. 공자의 인간적 면모가 뚜렷한 까닭은 '논어'가 공자의 대화집(對話集)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하여 노자(老子) 장자(莊子)는 물론이고 맹자(孟子)나 순자(荀子)의 경우도 그 인간적 이미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에 비하여 묵자의 이미지는 훨씬 뚜렷합니다. 묵자는 사상과 실천에 있어서는 물론이며 그 이외에도 여러 가지 면에서 분명한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첫째로 그의 이름과 관련된 것으로 하층계급의 이미지입니다.
묵(墨)이란 우리말로 먹입니다만 묵자(墨子)의 묵(墨)은 죄인의 이마에 먹으로 자자(刺字)하는 묵형(墨刑)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묵가(墨家)란 형벌을 받은 죄인들의 집단을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설령 형벌과 죄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고 묵가의 검은 색은 노역(奴役)과 노동주의(勞動主義)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검은 노동복을 입고 전쟁을 반대하고 허례(虛禮)와 허식(虛飾)을 배격하며, 근로(勤勞)와 절용(節用)을 주장하는 하층계급이나 공인(工人)들의 집단이 묵가라는 것입니다.
묵자는 성이 적(翟)이라는 설이 있습니다.(淸 周亮工) 그의 이름을 묵적(墨翟)이라고 한 것은 묵형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히는 뜻에서 그것을 성(姓)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이지요. 과거에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그것을 이름에 밝힌다는 것은 심상한 것이 아니지요. 형벌을 받았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밝힌다는 것은 사람들이 국가의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공언하는 것이지요. 오히려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반체제적 성격을 분명히 선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묵(墨)은 성씨라기보다 학파의 집단적인 이름이라는 주장이 좀더 설득력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묵자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백성이 국가의 권위를 두려워하지 않을 때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사태가 일어난다는 것이지요(民不畏威 則大威至 : 老子) 당시는 혁명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묵가는 기층민중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통치집단의 정당성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좌파조직의 좌파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묵(墨)은 목수의 연장 가운데 하나인 먹줄(繩)의 의미로 읽기도 합니다. 먹줄은 목수들이 직선을 긋기 위해 쓰는 연장이지요. 그래서 법도(法度)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또는 엄격한 규율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또 '묵자'에는 묵자가 방성기구(防城機具)를 만들고 수레의 빗장을 제작하였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에 묵자를 공인이나 하층계급출신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묵자 자신이 그러한 계층출신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묵자의 사상이 하층의 노동계급을 대변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것이지요.
둘째로는 근검 절용하며 실천궁행(實踐躬行)하는 모습입니다. 검소한 실천가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히려 묵가를 비판하는 글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만 이 점에 대해서만은 모든 비판자들의 견해가 대체로 일치하고 있습니다.
맹자에 따르면 "묵자는 보편적 사랑(兼愛)을 주장하여 정수리에서 무릎까지 다 닳아 없어진다 하더라도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가(儒家)가 주공(周公)을 모델로 하였다면 묵가의 모델은 하(夏)나라의 우(禹)임금입니다.
우임금은 황하의 치수를 담당하여 장딴지와 정강이의 털이 다 닳아 없어지도록 신명을 바쳐 일하였던 사람입니다. 자기 집 앞을 세 번이나 그냥 지나간 것으로 유명한 임금입니다. 묵가들의 검소하고 실천적인 모습은 묵돌부득검(墨堗不得黔)이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묵자의 집에는 아궁이에 불을 때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였기 때문에 굴뚝에 검정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자신들의 이상적 모델을 유가의 모델보다 역사적으로 더 윗대인 우(禹)임금에까지 소급하여 설정함으로써 학파의 권위를 높이려하였다는 견해도 없지 않습니다만 묵가가 유가와는 그 사회적 기반을 달리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묵자는 일찍이 유학에 입문하였으나 유가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여 비유(非儒)를 천명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유가(儒家)란 예를 번잡하게 하여 귀족들에게 기생하는 무리라는 것이 묵자의 유가관(儒家觀)입니다. 우임금의 실천궁행을 모델로 삼은 것은 유가의 주봉건제가 아닌 하나라의 공동체적 질서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묵자는 제자들에게 우(禹)임금을 배울 것을 주장하여 거칠고 남루한 의복도 고맙게 생각하며 나막신이나 짚신에 만족하며 밤낮으로 쉬지 않고 몸소 실천하는 것을 근본 도리로 삼도록 가르쳤습니다. 우(禹)임금의 길을 따르지 않는 자는 묵가가 될 수 없음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묵가 집단이란 이처럼 헌신적 실천을 강조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몸에 살이 붙을 겨를이 없어 누구나 깡말랐고 살갗 또한 먹빛처럼 검었기 때문에 묵(墨)이란 별명이 붙었다고도 하였습니다. '장자'에도 묵가를 평하여 "살아서는 죽도록 일만 하고 죽어서도 후한 장례 대신 박장(薄葬)에 만족해야 했으니, 그 길은 너무나 각박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묵자는 다른 학파의 사람들과는 확실하게 구별되는 매우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회의 기층민중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며 검소한 삶을 영위하고 신명을 다하여 실천궁행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묵자'는 다른 책보다 난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묵자의 인간적 면모가 잘 나타나 있고, 또 그 사상적 기반이 분명하게 천명되어 있기 때문에 난해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예제를 함께 읽어 가는 동안에 묵자의 이미지가 더욱 분명해지고 다른 학파와의 차이가 부각되리라고 생각됩니다.
묵자에 관한 '사기'의 기록은 단 24자입니다. 묵적(墨翟)은 송나라 대부로서 성을 방위하는 기술이 뛰어났으며 절용을 주장하였다. 공자와 동시대 또는 후세의 사람이라고 한다는 기록이 그것입니다.
현재의 통설은 묵자(BC.479-381)는 은(殷)나라 유민(遺民)들의 나라인 송(宋)출신으로서 주(周) 봉건제(封建制)로의 복귀를 반대하고 우(禹)시대의 공동체 사회를 지향하며, 일생동안 검은 옷을 입고 반전(反戰) 평화(平和) 평등(平等)사상을 주장하고 실천한 기층민중 출신의 혁신주의자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묵자'는 묵자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논어'와 마찬가지로 후대의 제자들이 스승의 언행을 모아서 편찬한 것입니다. 원래는 71편이었다고 하였으나(班固의 漢書藝文志) 현재는 53편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제자백가들의 책 중에서 '묵자'가 가장 난해한 것으로 알려진 까닭은 대쪽(竹簡)이 망실되고 뒤바뀐 채로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체계를 세워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오랫동안 도가(道家)의 경전인 '도장(道藏)'에 끼어 있었습니다. 청대(淸代)에 와서야 필원(畢沅ㆍ1730-1797)에 의해서 정리되어 '묵자주(墨子注)'16권으로 따로 출간됩니다. 그제야 처음으로 '묵자'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셈입니다.
그러나 1894년 손이양(孫詒讓)의 '묵자한고(墨子閒稿)' 15권이 출간됨으로써 비로소 뜻을 통해 읽을 수 있게 되었을 정도로 오랫동안 잊혀졌던 책입니다. 민국초기에 양계초(梁啓超) 호적(胡適) 등과 같은 비교적 진보적인 학자들이 주를 달고 분류함으로써 오늘날의 '묵자'로 정리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묵자가 난해할 수밖에 없는 또 한 가지 이유로는 '묵자'는 그 문장이 간결하고 쓸데없는 설명 즉 일체의 논변(論辯)이 없기 때문입니다. '묵자'의 이러한 면을 풍자한 예화가 '한비자'에 나옵니다.
진(秦)나라 임금이 딸을 진(晋)나라 공자(公子)에게 출가시켰습니다. 그 딸을 시집보낼 때 70명의 첩(妾)을 아름다운 비단옷을 입혀 딸려보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공자(公子)는 그 첩들을 사랑하고 그 딸은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논변이 많으면 그 핵심을 놓친다는 것을 비유로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묵자가 이러한 이유로 일체의 논변을 삼가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간결한 문장과 농축된 의미를 읽어내기가 그만큼 더 어려워진 셈이지요.
현재 전하는 '묵자'는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모두 53편입니다. 이 53편이 5부 15권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묵자의 중심사상은 제2부를 구성하고 있는 제2권에서 제9권까지의 25편에 개진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묵자의 10대 사상으로 알려진 그의 주장이 이 부분에 실려 있습니다. 우리가 묵자사상을 고루 개괄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편명(篇名)을 통해서 내용을 짐작해보지요. 상현(尙賢) 상동(尙同) 겸애(兼愛) 비공(非攻) 절용(節用) 절장(節葬) 천지(天志) 명귀(明鬼) 비악(非樂) 비명(非命) 등 10편입니다. 각 편이 대개 상중하로 구성되어 있어서 모두 25편입니다.
마지막의 2편을 제외하고 모든 편이 자묵자왈(子墨子曰)로 시작되고 있어서 묵자의 제자들이 기록하였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묵자'에는 그 이외에도 묵자의 가르침을 요약한 부분 그리고 논리학과 자연과학, 묵자의 언행, 방어전술 교본 등이 실려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묵자'는 읽혀지지 않았습니다.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묵자'는 사문(斯文)의 난적(亂賊)이었습니다. '묵자' 전편이 번역된 것도 불과 몇 년 전의 일입니다. 번역자가 가까운 지인입니다. 비전공인 나로서는 가까운 지인이 묵자연구자란 사실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후의 연구업적들도 제때에 읽어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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