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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최대한의 ‘변화’를 담아내는 구조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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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최대한의 ‘변화’를 담아내는 구조여야

신영복 고전강독 <109> 제9강 장자(莊子)-14

다음 예제는 '나비 꿈'과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혼돈칠규(混沌七竅)'입니다.

<예제 11>

南海之帝爲儵 北海之帝爲忽 中央之帝爲混沌
儵與忽 時相與遇於混沌之地 混沌待之甚善
儵與忽謀報混沌之德
曰 人皆有七竅 以視聽食息 此獨無有 嘗試鑿之
日鑿一竅 七日而混沌死 (內篇 應帝王)

儵(숙): 갑자기. 忽(홀): 홀연히.
숙과 홀은 둘 다 제왕의 寓意的 이름이다. 儵은 현상이 재빨리 나타나는 모양, 홀은 현상이 재빨리 사라지는 모양을 우의적으로 표현하고 있음. 각각 생성과 소멸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음.
混沌(혼돈): 渾沌과 같음. 沌은 덩어리를 의미함.
혼돈은 생성과 소멸 이전의 궁극적 통합체.
竅(규): 구멍. 鑿(착): 뚫다.

"남해 임금은 숙, 북해 임금은 홀, 중앙의 임금은 혼돈이었다.
숙과 홀이 자주 혼돈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은 그들을 잘 대접하였다.
숙과 홀은 혼돈의 은덕을 갚을 방도를 의논하였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쉬는데
오직 혼돈에게만 구멍이 없다. 시험삼아 구멍을 뚫어줍시다' 하였다.
날마다 한 구멍씩 뚫어주었는데 7일만에 혼돈은 죽어버렸다."

여기서 구멍을 뚫는 행위가 바로 통제적인 전체를 분(分)하고 별(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분별하고 분석(分析)하는 것이지요. 나누고 가르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그 전체적 연관이 소멸되고 남는 것은 분별지(分別智)이며, 분별상(分別相)이며, 개아(個我)로서의 존재들인 것이지요. 혼돈은 이러한 분석과 분별 이전의 총체적 세계를 의미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혼돈이 죽어버린다는 것은 이러한 진정한 세계상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장자'를 끝내면서 몇 가지만 더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장자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장자'에 어원이 있는 성어(成語)도 매우 많습니다만 우리가 잘 아는 조삼모사(朝三暮四)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조삼모사의 우화는 우리의 생각이 좁기가 원숭이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풍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달팽이 뿔 위에서 촉씨국(觸氏國)과 만씨국(蠻氏國)이 전쟁을 벌이는 소위 달팽이의 우화도 같은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예제는 생략하기가 마음에 걸려서 뒤늦게 소개하는 것입니다. 지식(知識)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간단히 소개하려고 합니다.

雖然有患 夫知有所待而後當 其所待者特未定也
庸詎知吾所謂天之非人乎 所謂人之非天乎(大宗師)

"지식이란 의거하는 표준이 있은 연후에 그 정당성이 검증되는 법인데 (어려움이란) 그 의거해야 하는 표준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내가 자연이라고 하는 것이 인위적인 것은 아닌지 그리고 내가 인위적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자연이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장자는 물론 이 구절에서 하늘이 하는 일과 사람이 하는 일을 나누고, 결국 하늘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照之於天)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장자의 결론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과 이 구절을 읽으려고 하는 까닭은 이 구절에서 '지식(知識)'에 대한 몇 가지 논의를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우리가 논의해야 할 문제입니다.

첫째는 조지어천(照之於天)의 입장에 관한 것입니다. 장자의 체계에서는 진인(眞人)의 입장입니다만 이것은 객관적 입장을 의미합니다. 지식에 있어서 과연 객관적 입장이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바로 이 점이 장자가 관념론자로 비판되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가치중립성(價値中立性)과 지식의 당파성(黨派性) 문제로 논의하여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둘째는 소대이후당(所待而後當) 즉 지식의 진리성은 소대(所待) 이후에 검증된다는 것이지요. 이 경우 소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관건입니다. 소대(所待)는 <예제 1>에도 나오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구절에 반복됩니다. 소대자특미정(所待者特未定)이 그것입니다. 소대가 아직 미정이라는 것입니다. 특(特)은 '다만' 또는 '아직'이란 의미입니다. 소대(所待)는 글자 그대로 '기다려야 할 어떤 것'입니다.

따라서 지유소대이후당(知有所待而後當)이란 의미는 지식(知識)이란 어떤 것을 기다린 연후에 그 진리성 여부가 판명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을 기다려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식이란 한 마디로 어떤 대상을 표현하는 명(名)입니다. 그 명(名)의 실체가 되고 있는 실(實)과 비교하여 명실(名實)이 부합(附合)할 때에 지식은 합당(合當)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소대자(所待者)는 실(實)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소대자특미정(所待者特未定)이란 이 실(實)이 아직 정해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상 그 자체가 변화한다는 것이지요.

변증법에서는 이론은 실천에 의하여 그 진리성이 검증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천의 조건이 변화하고, 실천의 주체가 변화하는 경우 검증은 매우 복잡한 것이 됩니다. 장자는 물론 이러한 논의를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간에 논의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지식과 진리성에 관한 논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변화(變化)'입니다. 변화를 담아내는 구조를 만드는 일입니다. 사회변동기에는 이러한 요구가 더욱 절실해진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최대한의 변화를 포용할 수 있는 구조에 못지 않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장자의 천(天)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자의 천(天)은 진리가 수많은 진리들로 해체되는 것을 막아주고 진리가 재(材)-부재(不材)의 차원으로 격하되지 않도록 해주는 최후의 보루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인(人)이며, 어느 것이 천(天)인가를 어떻게 알겠는가."
이것은 장자의 고민이기도 하고 우리의 고민이기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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