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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맞는 일본언론의 엇갈리는 시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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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맞는 일본언론의 엇갈리는 시각들

일부에선 '제2의 패전' 우려 목소리도

패전 57년을 맞이하는 일본인들의 소회는 어떤 것일까. 대표적인 우익 언론 요미우리신문은 '태평양전쟁은 아시아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위한 전쟁이었으며 종군위안부란 애초부터 없었다'는 퇴행적 역사관을 거침없이 드러냈지만(프레시안 16일자 보도)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아사히신문의 경우 '평화로운 세기를 만드는 궁리를, 종전기념일에 생각한다' 제하의 사설을 통해 힘으로 국제갈등을 해결하려는 미국의 위험한 논리를 경계하면서 일본이 평화로운 세계를 만드는 데 일조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요미우리가 과거에 집착하며 일본에만 골몰해 있는 반면 아사히는 미래를 내다보며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두 신문의 상반된 역사관은 민족으로서의 일본인의 세계와 미래에 대한 전망이 아직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런가 하면 니혼게이자이신문의 사설은 민족의 앞길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데 대한 초조함을 드러내고 있다. '패전으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나라의 비극'이란 제목의 이 사설에서 닛케이는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을 제시하지 않은 채 10년 이상 장기불황에 빠져 있는 일본의 앞날을 다음과 같이 걱정하고 있다.

"일본은 아직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태평양전쟁 패전에 이르는 과정과 오늘날의 일본이 '제2의 패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경위를 비교 분석하면 놀랄 만큼 비슷하다. 역사를 직시해 거기서 교훈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그러한 사람들이 구성하는 사회ㆍ국가는 진보가 없다. 차세대에 이어주기 위해서라도 세 번 같은 전철을 밟는 어리석음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전범 추모를 둘러싼 일본내 국론분열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도쿄신문의 사설 '야스쿠니의 대립을 넘어, 종전기념일을 생각한다'가 그것이다. 이 신문은 전몰자의 야스쿠니 합사 또는 분사 문제와 관련해 "언제까지나 대립하지 말고 각각의 입장과 주장에 대해 어느 정도 관용적으로 대"하자고 제안한다. 다만 "'미래의 전사자를 맞이하기 위해'라는 전쟁 상정은 안 된다"는 전제와 함께.

8.15 57주년을 맞는 일본언론들의 사설은 과거에의 집착과 미래에의 전망, 국수적인 자존심과 국제사회 일원으로서의 책임감이 서로 뒤얽혀 뚜렷한 방향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거인이지만 외교ㆍ군사ㆍ무화적으로는 여전히 난장이에 불과한 일본의 오늘을 보는 듯하다.

일본언론들의 8.15기념 사설을 읽으면서 과연 우리는 8.15를 어떤 생각으로 맞이했는지 되돌아보자. 편집자


***평화로운 세기를 만드는 궁리를, 종전기념일에 생각한다/아사히**

어쩌면 새로운 전쟁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그런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전쟁기념일을 맞았다. 국가간 분쟁을 군사력으로 해결하는 인류의 악폐에는 신물이 난다. 그것이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경험한 20세기의 교훈일 것이다. 그러나 신세기에 접어들자마자 벌써 그 반성을 잊은 듯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힘의 정치로 되돌아가는 불안**

지난 해 9월 미국을 엄습했던 연속테러가 시작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미국을 지키는 유일한 전략은 새로운 적을 먼저 공격하는 것이다"라고 반복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핵의 선제사용조차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힘으로 억누르려는 발상이 또다시 태연하게 용인되려 하고 있다.

일본의 근대사를 돌이켜보면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의'주권선ㆍ이익선론'이 상기된다. "열강사이에서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권선뿐만 아니라 스스로 이익선을 지키기 않으면 안 된다." 주권선이란 일본의 영토, 영해를 가리키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중요시되었던 인접지역이 이익선이었다. 열강의 위협으로부터 일본을 지키기 위해선 진출하지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한 취지였다. 그로부터 반세기, 이러한 확장주의가 팽창을 계속해 비극의 종말로 8.15를 맞았다.

지금 '주권을 지키기 위해' 창끝을 밖으로 향하고 있는 미국의 주장에도 비슷한 위험은 숨어 있지 않은가. '부시방식'은 이미 이스라엘을 자극하고 팔레스타인분쟁을 복잡하게 하고 있다고도 알려졌다.

생각해보면 지난 세기, 2번의 대전 직후 혼란기에 있어 새로운 세계질서 구축에 가장 공헌한 것은 미국이었다. 그 미국이 지금 유엔을 경시하고 국제사회의 움직임에 자주 찬물을 끼얹고 있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배경으로 혼자서 독주하려 하고 있으며 그것을 유럽과 일본이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가 과제로 돼 있다.

냉전이 끝난 지 10년 남짓, 세계는 빈곤과 환경, 지역분쟁 등 인류가 직면한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국제시스템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각국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국제사회가 연대해 미국에 충고**

미국에도 할 말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유럽과 일본이 손을 잡아야 한다. '반미(反美)'의 결속이 아니다. 힘의 차이를 숫자로 보충해 전쟁만능론에 대해 (미국과) 대등하게 대화하기 위한 환경조성이다. 할 말을 해야 할 상대는 미국뿐이 아니다. 테러든 핵개발이든 미국이 적으로 삼고 있는 다양한 국제문제는 아무리 강한 미국일지라도 일국만으로는 해결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기구의 역할을 강화해 각국에 약속사항을 지키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제력이 있는 선진국으로서 아시아의 일각에 있으며 특정 종교색이 엷고, 과거에 군사적으로 쓴 경험을 가진 일본이 짊어져야 할 역할은 크지 않을까.

***할 말은 하는 일본으로 변신을**

일본의 외교는 미국에 보조를 맞추는 것이 습관처럼 돼 왔다. 독자적인 아이디어를 창출, 세계에 제안해 실현시키는 그러한 외교와는 거리가 멀었다.

평화를 향한 일본의 언동이 국제사회에서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과거 일본 군국주의가 아시아에 준 고통과, 일본 자신에 초래한 비참한 결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평화를 만드는 연대가 가능할 리 없다.

8월 15일이야말로 그러한 것에 대해 생각하는 날일 것이다. 내향적인 '위령과 기도'의 날로 끝내지 말고 '전쟁의 세기'를 진정한 의미에서 과거의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결의를 굳히는 날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종전기념일, 역사를 솔직하게 재검토하고 싶다/요미우리**

올해도 전몰자 추도일을 맞이했다. 정부주최 추도식전은 41번째다.

전후 57년을 맞이하는데 왜 41번째인가.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어 일본이 국가주권, 독립을 회복하기까지 연합군 총사령부(GHQ)가 일본에게 전몰자 추도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8월 15일은 '종전(終戰)의 날'로 되어 있다. 그러나 국제법상 종전의 날은 강화조약 발효날이다. 그 전까지의 일본은 GHQ에 의한 점령하에 있었다는 역사의 실태를 새삼 상기하게 된다.

이는 현행 헌법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47년 5월 3일 헌법이 시행된 후에도 GHQ는 언론ㆍ출판에 대한 엄격한 검열을 계속해 왔다. 헌법의 중심적 원리인 '집회ㆍ결사 및 언론ㆍ출판 그 외의 표현의 자유'(제21조)는 이행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야말로 실질적인 헌법 시행 50주년인 것이다.

45년 8월 15일에는 아직 일소중립조약을 깬 소련이 치시마(千島)열도부터 북방영토로 침공을 계속하고 있었다.

소련이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의 검사석, 판사석에서 일본을 재판했다는 것은 대단히 모순된 구조였다. 그것도 일본 장병들 수만명을 연행, 시베리아에서 혹사시킨 명확한 국제법 위반을 동시진행중인 상황하에서 말이다.

한편, 도쿄재판 중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에 의한 아시아로의 재침략도 동시진행중이였다. 네덜란드군이 인도네시아 독립군과 정전협정을 맺은 것은 도쿄재판이 종료된 49년이었다. 베트남 북부의 디엔비에푸에서 프랑스군이 항복한 것은 54년이 되어서였다.

제2차 대전에서 일본은 아시아제국을 침략한 것이 아니다. 당시 동아시아에는 중국, 태국 외에 미, 영,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식민지밖에 없었다. 대전에 돌입하기 이전부터 일중전쟁에 이어진 국면을 제외하면 일본은 이들 구미제국의 영토를 침공한 전쟁인 것이다.

***도쿄재판의 재검토를**

이 점에 대해서 도쿄재판의 독일대표 팔 판사는 구미제국에는 제국주의 행동의 역사에 비춰 일본을 재판할 자격은 없다고 하고 피고 전원을 무죄로 했다. 그러나 '팔 판결서'는 일본이 국가주권을 회복하기까지 GHQ로 인해 보도도 출판도 금지돼 있었다.

일본과 독일을 같은 줄에 세운다는 것도 잘못된 것일 것이다.

나치독일은 전쟁 그 자체와는 별도의 차원에서 사상적, 조직적, 계획적으로 유대인 말살정책을 추진했다. 홀로코스트를 위한 조직운영은 때에 따라서는 군사작전상 계획보다도 우선시 됐다.

일본의 전쟁행동에도 여러 만행이 동반됐지만 특정민족을 말살시키려고 꾀한 적은 없었다. 독일의 "인도(人道)에 대한 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일본의 지도자들에게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일본을 무모한 전쟁으로 이끌었다는 의미에서는 A급전범으로 알려진 사람들은 'A급 전쟁책임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평화 염원하는 전몰자 추도**

어쨌든 GHQ의 언론통제하에서 진행된 도쿄재판의 '문명의 재판'사관을 다시 한번 재점검해보는 시기가 아닐까. 도쿄재판사관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자주 '일본 일국(一國) 성악설'적인 자학사관에 빠져버리곤 한다.

이른바 종군위안부 문제는 그 전형이다. 전시 근로동원이었던 여자정신대를 '위안부동원'을 위한 제도였던 것처럼 역사를 날조한 일부 신문의 캠페인 등은 자학사관의 극치라고 해야 할 것이다. 독일도은 점령지에서 장병의 위안시설용으로 국가적, 강제적인 '여성동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민족 말살정책의 폭거가 너무나도 거대한 악이었던 만큼 '여성동원'문제는 상대적으로 불문에 붙여져 독일지도자도 국민도 그런 일은 없었던 것처럼 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 자학사관파는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모르는 척 하고 "독일과 비교해 반성이 적다"고 논하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부터 일본의 정체성을 둘러싼 논쟁이 활발해지고 있다. 그 논의를 위해서라도 아시아 근대사의 실태, 그러한 시대환경을 고려한 후, 일본의 근현대사, 나아가 전후사를 허심탄회하게 재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현재의 일본에서는 이것이 결코 2차대전 이전과 같은 군국주의에의 복귀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본 국민의 대다수가 잘 알고 있다.

일본은 평화적인 국제환경과 자유로운 통상체제 없이는 국민의 풍요로운 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나라이다. 전몰자 추도에의 염원은 그것을 재확인하는 것에 의의가 있다.


***'패전'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나라의 비극/니혼게이자이**

좌절에서 무엇을 배우냐에 따라 인생은 크게 변하게 된다. 국가나 사회도 마찬가지로 실패로부터 무엇을 교훈으로 얻느냐에 따라 전혀 달라지게 된다. 태평양전쟁 패전으로부터 57년이 지났다. 우리는 그 패전으로부터 무엇을 배웠나.

결론부터 말하면 교훈으로 배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렇기보다는 반세기 동안 왜 일본이 전쟁의 길을 질주했던가, 그리고 왜 패했던가를 검증하는 것을 오로지 피해온 것처럼 생각된다.

***'제2의 패전' 초래하는 구조**

역사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과거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앞으로 일어날 또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제반문제에 대처하고자 할 때이다. 그러나 패전 후 폐허로부터 일어나서 풍요함을 추구하는 것에 급급해왔던 일본은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오늘날에 이르렀다.

전쟁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국내적으로는 좌우 양 진영의 무모한 논쟁에 불을 붙이는 것뿐이었으며, 외교적으로는 아시아국가들로부터 '잘못된 역사관'이라고 비난받는 여지를 낳는 것뿐이었다. 정면으로 역사와 대면하지않았고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고 오늘날에 이르렀다.

따라서 일본은 아직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태평양전쟁 패전에 이르는 과정과 오늘날의 일본이 '제2의 패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경위를 비교 분석하면 놀랄 만큼 비슷하다.

***관료 주도로 똑같은 잘못**

역사를 직시해 거기서 교훈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그러한 사람들이 구성하는 사회ㆍ국가는 진보가 없다. 차세대에 이어주기 위해서라도 세 번 같은 전철을 밟는 어리석음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야스쿠니의 대립을 넘어, 종전기념일을 생각한다/도쿄**

대립은 해도 항상 화해가능성을 찾는 것이 인간의 지혜이다. 여론의 통일은 절망적이라고 생각되는 야스쿠니문제를 구태여 생각해 봤다. 57회 종전 기념일이다.

8.15 야스쿠니신사를 방문했다. 경내의 일각에 선 '유취관(遊就館)'. 전쟁사를 새긴 전시관이다. 출구 가까이 참관의 감상을 적은 기장부가 놓여 있다.

"오늘의 평화는 선인들의 희생 위에 서 있는 것이다", "1개월 후에 전장에 나갈 몸이었다. 8월15일에는 물 한방울 먹지 않는다", "일본의 근현대사를 위한 전시(展示)다" 등등. 읽기에 따라서는 균형을 잃는 소개가 되겠지만 그 중에서도 신경이 쓰이는 소년, 소녀의 단문이 있었다.

"일본을 위해 희생된 사람들에게 감사드린다"(12세의 소년), "그 시대에 생활했었다면 우리들도 전쟁을 지지했을 것이다. 집단은 무섭다. 무섭다"(여자고등학생).

***출발점은 무진(戊辰)전쟁**

어느 문장도 전시물이나 영상기록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이 엿보인다. 남자애들의 순수한 반응에 사실은 야스쿠니 문제의 출발점을 잠깐 봤다는 생각이 든다.

야스쿠니문제의 경위와 논쟁점을 대충 소개하겠다.

메이지유신의 내전, 무진(戊辰)전쟁에서의 관군 사망자를 기념하기 위해 1869년(메이지 2년) 건립된 동경초혼사(東京招魂社)가 후에 야스쿠니신사로 개칭된다. 그후 전란에서 사망한 군인을 중심으로 합사를 증가시켜 현재 246만여개의 위폐를 유지하고 있다. 위령은 일본 고래의 신도(神道)방식으로 실시된다. 1952년 종교법인이 됐다. 70년대에 걸쳐 야스쿠니신사를 국가가 관리하는 '야스쿠니신사 법안'이 국회에 5번 제출됐지만 모두 폐안됐다. 야당이나 불교계, 기독교 관계자가 반대했다. 78년 제2차 대전의 A급 전범 14명을 합사한 이후 총리나 각료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때마다 논의가 일고 있다.

'국가를 위해 순직한 사람들의 혼령을 국가의 책임으로 위로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참배추진 입장과 '특정종교(신도)를 국가가 조성하는 것은 정교분리를 정한 헌법에 위반한다'는 헌법상 견해의 대립이 있다. 여기다 A급전범의 합사를 알면서 실시되는 총리의 야스쿠니참배가 중국이나 한국으로부터의 반발을 초래해 국내문제에 그치지 않게 됐다. 정부는 한때 A급전범 위폐를 분사하려 했지만 신사측이 거절, 현재에 이르고 있다.

***새로운 추도시설 모색**

고이즈미내각은 작년 12월 "내외 사람들이 거리낌없이 추도의 뜻을 바치기 위한" 새로운 국립추도시설을 만들 수 없을지 생각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야스쿠니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염원하는 위정자(주로 자민당정부) 발상의 한 축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야스쿠니신사의 전통은 지키고 싶지만 야스쿠니 일변도로는 여론이 수렴되지 않는다. A급 전범의 위폐도 없는 새로운 무종교의 시설이라면 참가할 수 있다. 총리가 공식참배해도 외국의 귀빈이 방문해도 정교원리 원칙에 반하지 않는다.

아시아 각국으로부터의 불만도 아마 없을 것이며 누구라도 자유롭게 참배할 수 있는 보편적인 시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생각은 과거에도 있었으나 이 방안은 부상되거나 제안되거나 하면서 지금까지 왔다. 왜 실현되지 않을까.

야스쿠니신사야말로 '전몰자를 추도하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곳' 이라는 신사측과 일본유족회의 집착이 한편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 있는 치도리가부치(千鳥ケ淵) 전몰자묘지(무명전몰자 약 34만체)를 확충, 정비하면 좋겠다는 의견이나 개인의 혼령을 국가가 관리하면 안 된다는 생각도 있다.

***서로의 입장에 관용을**

전쟁의 참화를 기억하고 부전(不戰)결의를 세운다. 이 결의는 어떤 운영에 있어서도 공통된 것이다. 문제는 언제까지나 대립하지 말고 각각의 입장과 주장에 대해 어느 정도 관용적으로 대할까가 아닐까.

야스쿠니신사는 국가가 개입하지 않아도 계속 존재할 것이다. '어디까지나 야스쿠니'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신사에 가서 위령을 하면 된다.

신사측도 '유일, 절대'라고만 하지 말고 '분사'를 희망하는 유족에게는 그에 응하는 도량을 보여주기 바란다. 타종교에의 적대시도 마찬가지다. 철학자 우메하라(梅原 孟)씨는 "고래 일본에서는 신도와 불교가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었다"고 하고 있다.

새로운 시설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납득할 만한 기념비를 향해 지헤를 짜내야 한다. 다만 "미래의 전사자를 맞이하기 위해"라는 전쟁 상정은 안된다. 여자고등학생의 "집단은 무섭다"는 한마디에는 현대의 공포에도 통하는 불길함이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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