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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 대한 가슴앓이를 할 수 있는 건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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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사회에 대한 가슴앓이를 할 수 있는 건 행복"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배우 권해효

권해효를 만났다. 큰 눈을 막 부라리며 후배들을 위협해도 사실은 밉지 않고, 약간 어리버리하고, 마음이 약해 결국은 후배들이 부탁한 것을 다 들어주던, 그래서 결국은 그 주위의 사람들로 하여금 다 하하하 웃게 만들어주던 내 TV 속 착한 선배를 만날 생각을 하니 무척이나 설레었다.

그런데 나야 재미있고 포근한 선배 권해효가 좋지만 '선배 전문배우'라는 타이틀이 혹시 부담이 되지는 않을까 궁금했다. "너무 한쪽 이미지로만 고착되는 것은 아닌가라고 나보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더 걱정을 많이 해준다.(웃음) 그런데 사실 변신은 이미 하고 있는 것 같다. 2000년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삼촌, 선배 역할을 많이 맡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내 주변에 식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웃음) 말하자면 자연스럽게 변신을 하고 있는 거다. 또 방송이 아닌 다른 부분, 공연이라든지 연극무대에서 계속해서 다양한 역할들을 시도하고 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별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권해효를 다만 배우라는 직업에 가둬두기에는 그의 행동반경의 폭과 깊이가 너무 넓고 깊다. 안티조선운동, 여성인권운동, 차별금지법반대운동, 반값등록금 1인 시위 등 주요한 문제 현장마다 거의 예외 없이 그가 있다. 그는 왜 TV 브라운관과 무대를 벗어나 사회 곳곳을 누비게 된 걸까? "사실 첫 아이를 낳고 나서부터 우리 사회에 대한 걱정이 많아졌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가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라는 점에서였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경쟁을 시키고, 명문대를 보내기 위해 많은 돈을 들여 학원을 보낸다. 또 과외를 시킨다. 아이를 사랑한다면서 그렇게 하는데 정작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 대해서는 신경을 안 쓴다. 우리 사회는 점점 쓰레기통이 되어 가는데, 아이들에게 황금 옷을 입혀서 쓰레기통에서 키우겠다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한 아이를 키우는데 한 마을이 필요함을 아는 사람의 아름다운 마을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쓰레기 같은 마을에 대한 분노가 뜨겁다.

그런 그가 요즘 집중하고 있는 문제가 있다. 바로 조선학교 문제다. "조선학교의 역사는 일본사회 내에서 조선재일동포에 대한 차별의 역사이다. 차별의 역사에 대해서 가해자였던 일본에 대해서 피해자인 한국 당국이 아무 소리를 하지 않는 사이에 쌓여 온 부끄러운 문제이다. 그런 것을 알게 되고, 보게 되는 것이 나에게는 일단 불편한 것이었다. 특별히 2002년도 금강산에서 있었던 6. 15 공동선언 통일대회에 참석한 조선학교 아이들이 3일 간의 대회를 마친 후 남과 북 언니, 오빠들과 헤어지면서 울부짖는 광경을 보고 와서 일주일 동안 가슴앓이를 심하게 했다. 잠도 안 오고…. 그러면서 조금씩 조선학교를 위한 후원콘서트도 해보고, 내 나이에 디너쇼도 해보고 그랬다.(웃음) 그렇게 조선학교에 책을 보내든지, 이벤트를 만들든지 다양한 방식으로 지난 10여 년 동안 조선학교와 연을 맺어왔던 분들이 도호쿠 대지진이 터지고 나서 모이게 된 것이다. 그것이 몽당연필과 같은 콘서트 형식의 공연이다."

그렇게 매번 마음 아픈 사연들을 만나다보면 힘들지는 않냐는 질문에 "사회에 대한 가슴앓이를 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긴장감을 주고, 건강함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또 나이를 먹어가지만 청년의 마음으로 살 수 있게 해주는 동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나마 사회에 대해 가슴앓이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다행이고, 행복이란 생각을 한다."라고 이야기한다.

매일 허허허 웃어서 그런 줄만 알았더니 사실 속으로는 늘 울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그의 속울음만큼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이 더 촉촉해졌던 거다. 미안하고 고마운 권해효 선배가 있어 참 좋다. <나꼼수> 김어준 총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왕눈이 선배가 있어 너무 든든해~~~"

지금까지 맡아왔던 역할 중 가장 애정이 가는 역할이 있다면?

내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작품과 시청자들이 기억을 하는 작품이 다를 것 같다. 드라마 미니시리즈의 경우 대략적으로 비슷한 역할을 많이 해 온 것 같다. 학교 선배역할을 많이 맡아 왔는데, 선배 전문 배우라고 할 정도로 선배역할을 많이 한 것 같다.(웃음) 애정이 간다기보다는 기억에 남을 만한 역할로 얼마 전에 끝난 '사랑을 믿어요'에서의 권기창 역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오래된 드라마이긴 한데 1998~99년에 방영되었던 '은실이'라는 드라마에서 맡았던 장낙천 역할도 기억에 남는다. 시청자분들께서는 1994년도 '사랑을 그대 품안에'서의 역할을 많이 기억하실 것 같다. 드라마의 경우 시청률이 40%를 넘어가게 되면 매일 밤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본다는 것이다. 그런 작품에 출현했을 때 사실 사람들이 배역 자체를 기억한다기보다 당시 작품에 대한 반응이나 세간의 반응들을 더 오래 기억하는 것 같다. 배역에 대해서는 그다지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웃음) 한 때는 나도 내가 맡았던 배역의 이름을 모두 기억을 하고 있었는데 몇 년 전부터는 기억을 못한다.(웃음) 때로는 시청률이 높고 인기가 많은 작품과 좋은 작품과는 별개인 것 같기도 하다. 정작 많은 사람들이 남자 셋 여자 셋에서의 카페 주인 역을 많이 좋아하기도 한다.(웃음) 카페 밖을 나갈 일이 없어 개인적으로도 제일 편했던 역할이었다.(웃음)

▲ 배우 권해효 ⓒ프레시안(최형락)

언제부터 배우의 꿈을 가졌는지 궁금하다.

살아오면서 구체적으로 어떤 직업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배우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배우가 된다는 것을 특별히 꿈꿔 본 적은 없었다. 배우가 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은 대학 1학년 들어가서부터 했던 것 같다. 연기라는 것을 해보니깐 재미있기는 한데, '이것이 직업이 될 수 있나? 또 나를 사람들이 연기자로 생각을 해줄까?'라는 고민을 했었다. 1학년 마치고 군대를 갔다 오고, 복학을 해서 2학년 1학기 워크숍 작품에 참여를 했었다. 그 당시 학년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다. 작품에 배우로 출현하게 된 계기는 원래는 두 작품 중 한 작품에 스텝으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다른 쪽 작품에 배우가 부족해서 배우로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공연을 하고 있을 때 당시 담당교수님이 부르시더니 "너 배우해라" 라고 말씀을 하셨다. 배우로서 가능성을 보신 것 같다. 그것이 내가 처음 직업으로서 배우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 계기였던 것 같다.

선생님의 인정으로부터 배우에 대한 꿈을 꾸게 된 것인가?

그렇다. 그때 내가 연기를 잘했다.(웃음) 운도 많이 좋았던 것 같다. 대학 3학년 때부터 대학로 무대에서 공연을 했다. 대학 4학년 때도 대학로 무대에서 활동을 했다. 그 때가 대학로에 학전무대가 처음 생긴 때인데 학전무대에서 연기를 시작했다. 또 4학년 때는 영화도 찍을 수 있었다.

이후 1~2년 후에 '사랑을 그대 품안에'라는 작품을 통해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나는 소위 대학로 출신의 배우들에게 흔히 들을 수 있는 배고팠던 이야기는 별로 없다. 물론 그 기간 동안 수입은 적었지만 순탄하게, 특별한 어려움 없이 살아왔다.

전업배우로서의 생활을 시작한지 대략 20년 가까이 되었다. 이 세계가 얼마나 치열한가? 치열하다기보다는 수많은 트렌드가 변한다. 때로는 20년 동안 어떻게 이 생활을 했는지 스스로 대견하기도 하다.(웃음)

TV에서 감칠 맛 나는 역할로 늘 우리들을 즐겁게 해주는데. 작품을 고를 때 특별히 주안점을 두는 점이 있는지?

대부분 작품을 고른다기보다 작품에 캐스팅 당하는 경우가 많다. 정작 방송이라는 곳에서 배우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이전에 맡았던 익숙한 역할을 맡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새로운 역할을 맡고, 시도할 수 있는 경우가 흔한 일이 아니다. 과거에는 단막극이 많아서 단막극을 통해서 다양한 배역을 시도해 볼 수도 있었다. 나 같은 경우도 단막극에서 맡았던 역할들은 지금의 선배나 삼촌 역이 아닌 문제아나 루저 역할을 많이 하기도 했다.(웃음) 최근 주말 드라마에 출현했던 배역들은 평소 출현했던 미니시리즈와는 조금 다르기도 했는데 굉장히 딱딱거리고, 말 많은 역할을 맡기도 했다. 현재 방송에서 배우가 새로운 역할을 시도한다는 것, 특히 배우가 스스로 작품을 고를 수 있기가 쉽지 않다.

이미지가 고정화 되는 것에 대한 부담은 없는지? 이미지 변신에 대한 갈망은 없는지 궁금하다.

ⓒ프레시안(최형락)
너무 한쪽 이미지로만 고착되는 것은 아닌가라고 나보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더 걱정을 많이 해준다.(웃음) 그런데 사실 변신은 이미 하고 있는 것 같다. 2000년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삼촌, 선배 역할을 많이 맡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내 주변에 식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웃음) 얼마 전 MBC 시트콤에서도 딸 셋을 가진 아버지 역을 맡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삼촌, 선배 자리에서 아버지 자리로 옮겨 가게 되는 것 같다.(웃음) 말하자면 자연스럽게 변신을 하고 있는 거다. 다양한 캐릭터에 대한 갈증이 있고, 없고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또 방송이 아닌 다른 부분, 공연이라든지 연극무대에서 계속해서 다양한 역할들을 시도하고 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별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또 대부분의 배우에게는 새로운 시도를 하기보다, 이전에 잘 해왔던 역할을 계속해서 잘해줄 것을 요구받는 경우가 많다. 특히 수많은 돈과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투여되는 방송에서는 소위 안전한 것을 택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그래서 어떤 역할이 있으면 그 역할을 가장 잘 할 것 같은 사람에게 배역을 맡기고 싶어 한다. 그런 방송 시스템을 이해하면 삼촌, 선배에서 이제는 아버지까지 그 부분의 전문 배우로 인지되는 것도 그리 나쁠 것 같지는 않다. 여러 가지 다양한 실험은 다른 곳을 통해서 하면 된다.

지난 7월 31일에 종영된 '사랑을 믿어요'라는 드라마에서 권위적이고 마초적인 가장 역할을 맡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한국여성단체연합 평등가족 홍보대사로 활동하는 등 양성평등문제에 매우 관심이 많은 걸로 알고 있다. 실제로 가정에서의 모습은 어떤지?

아, 그렇게 했다가는 죽는다.(웃음) 그 캐릭터 자체가 많이 희화되고 만화 같은 캐릭터였다. 그런데 그 역할은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가장, 아빠, 남편들에 대한 욕망도 담겨져 있는 역할이었다. 그런 형태의 가족관계가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한국의 아버지들의 위치를 생각해 볼 때 아버지들이 한번 해보고 싶은 역할이었던 것 같다. "어디 아버지가 밥 숟가락 들기 전에 밥을 먹어! 죽으려고" 이런 대사들이 아버지들에게 대리만족을 주었던 것 같고, 실제로 많은 아버지들이 가부장적인 장면을 좋아하시기도 했다. 그런데 실제로 요즘 그렇게 했다가는 죽을 것이다.(웃음)

안티조선운동, 여성인권운동, 차별금지법반대운동, 반값등록금 1인 시위, 재일조선학교돕기 운동 등 사회참여운동을 많이 하고 있다. 그것도 일회적이지 않고 꾸준히 활동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는데, 그렇게 지속적으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게 된 계기 혹은 이유가 있는가?

물론 하나하나의 사연이 있다. 그 사연을 모두 다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근본적인 문제인식은 사회 소수자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실 여성문제만 해도, 세상에 반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여성인데, 여성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소수자이다. 또 소수자 문제로 대표적인 것이 정규직, 비정규직 문제도 있다. 조선학교 역시 소수자 문제이다. 조선학교의 역사는 일본사회 내에서 조선재일동포에 대한 차별의 역사이다. 차별의 역사에 대해서 가해자였던 일본에 대해서 피해자인 한국 당국이 아무 소리를 하지 않는 사이에 쌓여 온 부끄러운 문제이다. 그런 것을 알게 되고, 보게 되는 것이 나에게는 일단 불편한 것이었다.

한국사회에 대한 문제를 거창하게 이야기했지만, 사실 첫 아이를 낳고 나서부터 우리 사회에 대한 걱정이 많아졌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가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라는 점에서였다. 도대체 언제까지 아이들을 무한경쟁으로 밀어 넣을 것인지, 또 그렇게 성장한 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계속해서 쌓여 가게 되었다.

ⓒ프레시안(최형락)
우리는 아이들에게 경쟁을 시키고, 명문대를 보내기 위해 많은 돈을 들여 학원을 보낸다. 또 과외를 시킨다. 아이를 사랑한다면서 그렇게 하는데 정작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 대해서는 신경을 안 쓴다. 우리 사회는 점점 쓰레기통이 되어 가는데, 아이들에게 황금 옷을 입혀서 쓰레기통에서 키우겠다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 고민이 시작되니깐 그에 대한 해결방법이 나에게 없었다. 개인적으로 선택 가능한 것들이 아이들 유학 보내고, 돈 많이 벌면 된다는 정도인데 그것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사회가 이상하다고 생각이 들면 많은 사람이 함께 고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다행인 것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먼저는 우리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서로의 힘을 모아주고, 서로 지지해 주고, 그리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해 서로 십시일반, 즉 입금해주는 것이다.(웃음) 그렇게 해야지만 조금씩이라도 사회가 변화해가는 것이라 본다. 그리고 다행히 우리에게는 불가능할 것 같은 변화를 이룬 경험이 있다. 정치적 민주주의의 쟁취에 관한 경험을 우리는 지니고 있다. 그래서 언제나 문제의식을 가지고 꿈을 꾸는 일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조선학교, 60년 동안 철저하게 외면당한 아이들

조선학교의 경우도 막연히 조선학교 아이들이 어렵거나 힘들어서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나라가 힘이 없어서 어느 날 이 땅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중국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조선족이라 불리고, 이 땅에 오면 3등 시민 취급을 받는다. 연해주로 끌려간 사람들은 까레이스키라 불리고, 또 일본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좋게 표현하면 재일동포라 불린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돌아가고 싶었던 조국이 분단된 조국이 아닌 해방된 조국이라는 것이다. 하나 된 그리고 해방된 조국에 대한 바람과 믿음을 가슴에 품고 타지에서 살아온 것이다. 그리고 60여 년이란 세월 동안 아이들을 키우고, 학교를 만들고, 한글을 가리켜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 60여 년 동안 이들을 철저하게 외면해왔다. 나 스스로의 질문은 그들에게 나는, 또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이다. 그들을 외면해왔던, 몰랐던 그 세월이 나 스스로 너무 부끄러웠다.

한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그들이 지켜 온 가치가 너무나 좋은 것이 많다는 것이다. 학교라는 공간이 현재 한국과 같이 경쟁의 온상이 아닌, 한 공동체의 구심체로 작용한다. 또 아이들이 자신이 다니는 학교를 고향이라 부르는 것이다. 나는 자신이 다니는 학교를 고향이라 인식하고 부르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 들어봤다.

살아오면서 학교란 이름 뒤에 좋은 말 붙여 본 적이 있나? 나는 태어나서 내가 다니던 학교 뒤에 좋은 말을 붙여 본 적이 없다.(웃음) 그런데 조선학교 아이들은 우리학교는 고향이라는 말을 한다. 내가 이상한 건지 모르겠지만 놀라웠고 감동이었다.

동북아 평화시대를 열어 가는데 빛나는 가교역할을 할 아이들

현재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로 분단된 조국이라는 점을 이야기 할 수 있다. 현재 극복해야 할 가장 큰 대상이 조국이 분단된 상황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분단을 극복하는 것을 어떤 식으로 할 것인가? 그 시기에 우리에게 완충제는 있는지, 또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나는 일본 땅 또는 연변 같은 곳에서 살고 있는 동포학교의 학생들이 굉장히 큰 완충역할을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막연한 생각이기도 하지만 왜 그렇게 생각을 하냐면 이들은 일본 땅에 살면서 북한을 이해하고, 남한을 조국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동북아 평화시대를 열어 가는데 빛나는 가교역할을 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우리들에게 도움을 받기만 하는 존재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사실 몽당연필 공연 콘서트는 일본 대지진 피해,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모임이라는 이름을 걸고 있기는 하지만 1주년이 되는 내년에는 대지진 피해라는 말을 뺄 것이다. 몽당연필이 공식적으로 하고 싶은 일은 한국사회에 일본조선학교를 알리는 것이다. 조선학교를 알린다는 것은 단순히 알린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외면하고 놓쳐버린, 그리고 배우지 못했던 부끄러운 현대사에 대해서 다시 돌아보고 반성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성 없이는 한국사회의 발전은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다. 현재 한국사회의 퇴행성이 이를 충분히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교육이다. 하루라도 빨리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에서 수능시험을 위해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닌, 민주주의, 공화주의란 무엇인가, 시민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토론하고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번이라도 이런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면 이 사회에서 소위 소셜테이너와 같은 조합어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언젠가 모 감독이 뜬금없이 "네가 대통령이 되면 무엇을 하고 싶으냐?"라는 질문을 했다. 너무 뜬금이 없어서 그런 생각 안 해봤다고 했다. 내가 그럼 감독님은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대통령이 되면 제일 하고 싶다는 것이 딱 한 가지라 했는데 대기업 최고 연봉 두 배 정도의 금액을 주고 최고의 인성과 최고의 사람들을 초등학교 1, 2학년 교사로 임용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무슨 말인지 깊이 이해가 되었다.

최근 들어 김여진, 박혜경, 김제동 등 젊은 연예인들의 사회참여가 늘고 있다. 이들의 활동에 대해 선배 소셜테이너로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요즘 이야기되고 있는 소셜테이너라는 개념을 생각해 볼 때, 그 개념에 제일 근접한 사람은 김여진씨나 김제동씨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 세대 속에서 매일 같이 소외당하고, 외면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의 특별한 자각과 시선을 가지고 SNS라는 도구를 활용해서 아젠다를 만들어가는 것을 볼 때, 현재 이야기되고 있는 소셜테이너라는 개념에 가장 근접한 것 같다.

소셜테이너 권해효와 배우 권해효가 서로 충돌하는 때가 있나? 있다면 그런 충돌을 어떻게 조정해나가나?

나 스스로는 일단 SNS를 잘 활용하지도 못하고, 지금 이야기되고 있는 소셜테이너라는 개념에 그렇게 부합되는 것 같지는 않다.(웃음) 개인적으로는 3년 동안 시민단체와 함께 하면서 기쁨조, 응원단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내가 전문가도 아니고 정책적으로 정책을 개발할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필요하다면 전심전력으로 활동가분들을 도울 뿐이고, 또 배우라는 개인사업자이기 때문에 동조세력 정도로 스스로를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둘 사이가 충돌하는 일은 별로 없다.

ⓒ프레시안(최형락)
다행히 소셜테이너라는 말이 긍정적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 옛날에는 폴리테이너라는 말이 있었는데 소셜로 옮겨 가고 있다. 폴리테이너라는 표현은 한국 사회에서의 정치에 대한 조소 섞인 표현이었다. 한국 사람만큼 정치적인 사람들도 없으면서 정치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 모순된 상황이 반영된 표현이었다. 과거 1970~80년대 군사독재정권을 지나온 시기에 소위 대중연예인들이 정계에 입문하는 과정에서 폴리테이너라는 말이 생겨났다. 일종의 비아냥이나 조소였는데, 최근의 소셜테이너라는 개념은 폴리테이너라는 표현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공정하게 그 반향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 긍정적으로 생각된다. 폴리테이너와 같이 비아냥이나 조소가 아니라는 점은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활발한 사회참여가 배우라는 직업에 부담으로 작용한 적은 없었나?

내가 처음 관심을 갖고 활동을 했던 것이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시기였다. 그 시기에는 그런 것 자체에 대한 것을 특별히 피부로 느끼지는 못했다. 내가 선거현장을 뛰어 다닌 경험은 많지 않다. 당시 선거 때 마다 대학가 청년들에게 투표를 독려하는 활동 정도를 주로 했다. 그때도 피부로 크게 부담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현재 SNS라는 폭 넓은 수단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 언론매체들은 정권 눈치보기에 급급하고, 현 정권 들어서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것이 더 위축되는 상황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요즘 소셜테이너라고 언급되는 분들이 훨씬 더 심리적으로 부담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은 한다.

다만 한가지 현실적으로 차분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 중 하나는 나 역시 사람들을 만날 때 나와 관계된 사람들과 나를 아는 사람들을 만난다. 마찬가지로 SNS라는 소셜네트워크 공간에서 이야기되는 것들이 전부는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끼리의 생각이 전체인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 환경을 SNS가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SNS를 하지는 않지만 옆에서 보면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도 든다.

권해효하면 촛불집회 사회자로도 매우 유명하다. 사실 어떤 사회적 사안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지지를 표하는 것과 달리 공적 집회에서 사회를 보는 것은 또 다른 차원에서의 용기가 필요한 일일 것 같다. 대규모 촛불 집회의 사회를 볼 때 두렵지는 않은지? 혹시 있다면 그런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알고 싶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일이 사회를 보는 일이다.(웃음) 다른 일을 할 때는 내 주변 분들이 걱정을 안 하는데 대중 앞에서 사회를 보는 것은 주변 분들이 걱정을 많이 한다. 내 생각엔 살면서 사람들마다 해야 할 몫이 있는 것 같다. 2004년도 탄핵정국의 경우에는 탄핵된 다음날 500여개의 시민단체가 모여서 종로에서 첫 번째 민주수호 탄핵 반대 경연대회를 했다. 그 때 시민단체 진영에서 최광기씨와 나를 공동사회자로 지목을 했다.

당시 내가 사회자로 지목된 것에 나 스스로 놀랐다. 내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고, 집회의 성격상 특별한 정치색을 보이지 않는 사람을 필요로 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그것이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구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단지 바닥에 앉아서 촛불을 들고 있는 사람과 위에서 사회를 보는 사람이 참여의 방식이 다를 뿐, 내 참여의 방식은 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사회를 보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스스로 대견하다 생각하는 것은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그럴 능력도 없었고, 이전에 대중 집회에 대한 사회를 본 경험도 없었던 사람이다. 당시의 열기와 분노를 붙들고 힘을 집중시켜야 할 몫을 부여받은 것뿐인데, 그 부분에서 용기가 필요했다. 또 나한테는 그 열기와 분노를 3~4시간 붙들고 있을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 공동 사회자였던 최광기씨 뒤에 딱 붙어 있었다.(웃음) 그것이 내가 한 일의 전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경험은 개인적으로 내 인생에 있어서 정말 특별한 기억이었다. 삶을 살면서 수십만이 모인 그 광장에서 촛불이 들렸다 내려갔다 하는 모습을 단 위에서 볼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을 것이다. 역사의 한 장면 속에 내가 함께했다는 사실이 지금도 나에게 굉장한 전율로 남아 있다.

특별히 요즘은 몽당연필이라는 단체를 통해서 재일조선인 학생들을 돕는 활동을 매우 활발히 하고 있다. 이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프레시안(최형락)

2002년도 10월에 금강산에서 정말 뜻 깊은 행사가 있었다. 6. 15 공동선언 이후에 청년 학생들의 특별한 통일대회였다. 정확한 명칭은 6. 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해외남북 청년학생 통일대회였다. 일본에서도 오고, 중국에서도 오고, 미국에서도 오고, 북측, 남측 각각에서도 참여를 했다. 그 행사 마지막 날에 청년들이 헤어지는데 남과 북 청년들은 다음에 또 보자는 정도의 분위기였는데, 한쪽에서 울부짖는 청년들이 있었다. 바로 일본 조선학교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일본 땅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매일 같이 "난 조선 사람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 했던 학생들이다.

고국 땅에 와서 3일 동안 남과 북의 언니, 오빠들과 조선말을 쓰며 보내다, 다시 일본 땅으로 돌아가려니 아이들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들에겐 꿈만 같은 3일이었는데, 그 3일이 꿈만 같았던 만큼 그들이 당한 서러움의 시간 또한 매우 컸던 것이다. 헤어짐의 슬픔에 아이들이 울부짖는 광경을 보고 와서 일주일 동안 가슴앓이를 심하게 했다. 잠도 안 오고… 정말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 이후로 2004년도에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는데 그 일을 통해 일본을 자주 방문하게 되었다. 자주 방문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동포들을 만나게 되고, 동포들을 보다보니 2년 전 일이 다시 생각나서 혼자 조선학교를 찾아가 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조선학교를 위한 후원콘서트도 해보고, 내 나이에 디너쇼도 해보고 그랬다.(웃음) 개인적으로 조선학교를 도왔던 일은 어제 오늘일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나 말고도 조선학교에 책을 보내든지, 이벤트를 만들든지 다양한 방식으로 지난 10여 년 동안 조선학교와 연을 맺어왔던 분들이 도호쿠 대지진이 터지고 나서 모이게 된 것이다.

몽당연필 공연이 처음부터 모금 활동을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면 소위 신영복 선생과 같은 덕망 있는 분들을 모셔서 했을 것이다. 그래도 무엇보다 판에 박힌 방식으로 하지말자는 의견에 따라 딴따라들끼리 몽당연필 공연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공연은 수익이 목표가 아닌 모금활동을 함께 해주신 분들을 위한 감사공연의 형식이다. 개인적으로 대한민국 최고의 뮤지션들을 매달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참 행복한 일이기도 하다.

무엇이든지 오래 지속하기 위해선 그 일을 하면서 내가 행복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그래서 내가 하면서 행복해지는 방식을 생각해 본 것인데 그것이 몽당연필과 같은 콘서트 형식의 공연이었다.

ⓒ프레시안(최형락)
몽당연필도 일종의 장기적 메시지다. 단순히 "힘내세요"라는 메시지가 아니다. 이제 이 땅에서도 조선학교 학생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고 있다는 메시지를 그들에게 보내는 것이다. 이러한 메시지가 조선학교 학생들에게 어떤 힘이 될까라고 물을 수도 있다. 남과 북 어느 한쪽을 택할 수 없었던 조선학교 학생들에게 6. 15 공동 선언은 정말 특별한 의미이다. 6.15 공동 선언이 있을 때 가장 행복했던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의 응원이 조선학교라는 공간에서 통일에 대한 소망을 키우는데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을 통해 그들이 더 이상 잊혀 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 또한 이야기해줄 수 있다.

얼마 전 중국이 동북공정과 함께 아리랑을 자국 문화에 편입시키면서 유네스코에 등재 신청을 했다. 한국에서 난리가 났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아리랑을 불러본 적이 있는가? 윤도현의 아리랑이 아니다. 연변, 길림성에 살고 있는 소위 자치족, 조선족이라 불리는 우리 동포들은 수십 년 동안 매일같이 아리랑을 부르며 술을 마시고, 지금도 그곳 어디에선가 부르고 있다. 문제는 그들이 그들 스스로 한국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으로써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계속해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이라고 할까 마음이 다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예민하게 촉수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지는 않나?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도 있는데 대한민국 땅에서 40대가 되고 50대가 될 때 흔히 먹고 살려다 보니, 또는 처자식 먹여 살리려다 보니라는 말로 우리가 덮어 버리고 저지르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예를 들어 대기업 과장이 과장이라는 직급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하도급 하청 업체들 뭉개고, 뒷돈 챙기고, 단가 깎아 가면서 그런 일을 한다. 그런 사람들이 한마디 꼭 하는데, 처자식 먹여 살리려다 보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망가지고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는 것인데, 그렇게라도 안 하면 좌절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이해는 한다. 나 개인적으로 그렇게 살지 않고 있다는 것이 한편으론 다행이라 생각하고 행복한 것이라 생각한다. 사회에 대한 가슴앓이를 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긴장감을 주고, 건강함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또 나이를 먹어가지만 청년의 마음으로 살 수 있게 해주는 동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나마 사회에 대해 가슴앓이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다행이고, 행복이란 생각을 한다.

얼마 전에 반값등록금 1인시위 등을 통해 오늘날 청년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에 함께 동참하기도 했었다. 마지막으로 청년들에게 하고픈 말이 있다면?

2001년부터 2008년까지는 꽤 많은 대학을 방문하고 새내기 새터나 동아리 등을 방문해서 청년들과 만나려고 노력을 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젊은 대학생들을 만나도 상호작용이 안 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청년들을 만나게 되면서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데, 내가 청년들과 대화하려는 것을 내 방식대로만 하려다 보니 어려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제는 청년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러 간다기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가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앞으로는 듣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래야 소통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고, 또 한편으론 기성세대로써 미안한 마음이 크다. 그냥 청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지금을 고민하라는 것이다. 내일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일을 위해서 오늘의 행복을 유보시키지 말라는 정도의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인터뷰 및 정리: 정치경영연구소 김경미, 양태성 연구원)

ⓒ프레시안(최형락)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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